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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전쟁과 의병장 [2020/09] 경기도 북부지방 조인환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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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의병 이후 군대해산 계기로 항쟁 확산

대규모 병력 운용으로 통감부도 긴장


글 │ 이태룡(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조인환 의병장은 군대해산 직후 충북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원주를 거쳐 양주, 파주, 적성 등지에서 가장 많은 의병으로 구성된 의진을 이끌고 일본군경과 싸웠다. 이때 일본군은 보병과 산포대, 공병대까지 동원하여 공격해 오는 상황 속에서도 조인환 의병장은 대담한 전술과 기습공격으로 일본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럼에도 조인환 의진에서 활약하다 살상된 의병도 부지기수지만 붙잡혀 재판을 받은 경우도 많았고, 조인환 의병장은 불행하게도 의진의 내분으로 인해 피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지만 그의 무덤은 물론, 위패 또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 안타깝다.  



군대해산 직후 의병의 모습


 군대해산 직후인 1907년 8월에는 해산군인이 의병대열에 합류하게 되자 의병의 불길은 더욱 거세게 전국으로 번졌다.

그에 앞서 을사년(1905) 7월, 강원도 영월 주천(酒泉)에서 원용팔(元容八)이 강원·경기·충북 등지의 의병을 모아 거의했다. 그는 무과에 급제, 선전관에 올랐으나 사직하고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었으나 을미왜란(1895)이 발생하자 인근의 동료 심상희(沈相禧)가 이끄는 여주의진 후군장으로 참여하여 김하락(金河洛)의 이천의진과 힘을 합쳐 남한산성을 점령했고, 뒤에는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진 중군장으로 맹활약을 벌였던 전기의병장 출신이었다.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뒤 일제의 군율통치와 고문정치에 반기를 들고 의병을 일으켰으니 후기의병의 물꼬를 튼 쾌거였다. 원용팔의 통문을 받은 정운경(鄭雲慶)이 충북 단양에서 거의하다 피체되어 황주 철도로 15년 유배를 갔고, 이어 민종식(閔宗植)의 홍주의병, 신돌석(申乭石)의 영해의병, 전덕원(全德元)의 용천의병 등이 의병투쟁을 벌였다. 

이처럼 후기의병은 을사늑약 전후 시작되어 2년여 동안 의병투쟁이 전개되고 있던 중, 해산군인의 참여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가평·원주·제천 여러 곳의 의병봉기는 모두가 해산병정들인데, 양총을 소지하고, 또 일찍이 조련을 거친 바 있으므로 규율이 있어 일병(日兵)과 싸우면 살상이 심히 많으므로 세력이 크게 장대하여 병수(兵數)가 거의 4, 5천 명이나 된다고 한다.”(필자 역)

(김윤식, 『속음청사(續陰晴史)』 하. 1907. 08. 19)

해산군인들이 군대해산 이전 의병활동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강원도·경기도·충청북도 일대의 의병들과 합류하게 되니, 그 기세는 대단했던 것이다.


▶“일병 100여 명이 군기(軍器) 28태(馱:바리-필자 주)를 싣고 강원도를 침입하였다. 그 때 동협(東峽:강원도-필자 주) 의병이 날로 치성하여 수재(守宰)가 다 달아나니 관청을 비운 곳이 19군(郡)이라.”

(황현 저/김준 역, 『매천야록』. 761쪽)


의병들의 위세가 크게 떨치자 부왜내각에서 임명된 군수들은 대부분 달아나고 강원도 일대는 의병들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변해 가고 있었지만, 『매천야록』에는 “관동지방 민중은 의병들의 음식 제공으로 인하여 감자의 종자를 구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기록하였다. 한국주차 일본군사령관은 군대해산 이후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8월 1일 경성에 있어서의 소전(小戰:시위대 봉기-필자 주) 이래 비염(匪焰:의병세력-필자 주이 특히 증가하고, 이후 각지에 만연하여 8월 6일에는 강원도 진위대의 폭동이 되고, 동월 10일에는 경기도 강화분견대의 폭동이 되어 기타 경기·강원·충청·황해·경상·전라의 제도가 상종하여 폭도(暴徒:의병-필자 주)를 보게 되었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1권. 499쪽)


양주·파주·적성에서 1천여 의병 이끌다


주차 일본군사령관이 일본군 참모총장에게 보고한 문서인 이른바 『조선폭도토벌지』에는 1907년 8월부터 9월 동안 주요 의병장 활약 개황을 정리하였다. (하단 표)

이 표에서 강화분견대 봉기에 일본군 1개 소대가 배치된 것으로 나와 있으나 실제는 달랐다. 8월 3일 수원진위대 해산을 완료한 고쿠라(小倉) 대위는 일본군 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강화분견대 해산을 위해 기관총 2정으로 무장한 오사키(大崎) 소위 이하 보병 1개 소대를 대동하고 갑곶에 상륙하려고 할 때가 8월 10일 오후 4시, 갑곶 동측 성벽에 잠복하고 있던 강화분견대 군인들이 갑자기 맹렬한 사격을 가하여 일본군 6명을 사살하고, 5명의 부상자를 내게 한 후 강화 동문쪽으로 향하자, 일본군은 갑곶 북측 고지로 후퇴하여 야영하는 상황이 되었다. 급보를 받은 일본군 사령관은 보병 제14연대 1대대장 아카시(赤司) 소좌에게 기관총 2정으로 무장한 보병 2개 중대, 공병 1소대를 이끌고 가서 진압하도록 하였다. 


이강년·신돌석 의진이 경북 문경 부근에서 의병투쟁을 벌였다고 했으나 이강년 의병장은 충북 제천을 중심으로 강원·경북·충북 3도 48진의 도체찰사(광무황제가 심상훈에게 비밀칙령 전달)로 활약했고, 신돌석 의병장은 일월산을 중심으로 영덕·영양·평해 등지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양주·파주·적성 등지에는 “조인환·권준·왕회종·김진묵 이하 약 1,000명”이 활약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이천·양평 등지에서 활약하던 조인환 의진이 의정부·파주로 이동해서 의병투쟁을 벌였고, 권준 의진이 적성에서, 왕회종·김진묵 의진이 마전·삭령·양주에서 약 1천명의 의병으로 의병투쟁을 벌였던 것인데, 서울 인근에서 대규모 의진이 활동하고 있다는 데 일제통감부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고, 특히 충북지역과 함께 공병부대가 동원된 것이다. 남한강, 한강, 임진강 등지에서 활동하던 의병진압을 위한 것이었다.


『조선폭도토벌지』에는 1907년 8월부터 12월까지 의병과 일본 군경과의 격전 회수와 의병수를 정리하였다.

1907년 11월부터 이듬해 1월 25일까지는 13도창의진이 서울진공을 전개하기 위해 전국 의병들이 경기도 양주지역으로 진격할 때였다. 그 시기 ‘양주·파주·적성에서 조인환·권준·왕회종·김진묵 이하 약 1,000명의 의병’이 활약하고 있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고, 5개월 동안 연인원 4만 4천여 명의 의병이 기관총과 연발총을 소지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조인환 의병장의 출생지와 


주요 의병장에 대한 일제 기록

『독립유공자공훈록』 제1권에는 조인환 의병장의 출생지를 경기도 양평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 기밀문서에는 두 곳으로 나타나 있다.

『폭도에 관한 편책』의 「폭도수괴 조사표」에는 ‘여주군 대송면(大松面) 포동리(浦東里)’라 하였고, 경기도 경찰부장이 내부 경무국장에게 보고한 문서 「수괴 조인환에 관한 건」에는 ‘양평군 양근읍’ 출신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한국주차 일본군사령관이 일본군 참모총장에게 보고한 문서 「군 참1발 제304호」(1908. 07. 15)에는 ‘저명한 한국폭도의 수령(首領) 조서’라고 하여 전국 주요 의병장 65명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 있다. 이 문서에서 조인환 의진과 연관이 있거나 활약지가 겹치는 10명의 의병장을 정리해 보았다.



이 기록은 의병장의 출신이나 출생지 등에 관한 것을 대부분 ‘불명’이라 했고, 그 활동상에 관한 것도 매우 부실하다. 특히 이인영 의병장은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는데, 지평이라 하였고, 권득규 의병장도 1907년 9월 2일 전사 순국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귀순한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조인환 의병장이 ‘토벌대에게 양근에서 체포’라고 했는데, 실제와는 매우 다르다. 조인환 의병장의 활동상이 1907년 8월부터 1909년 12월까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에 이어 내부 경무국에서 엮은 『폭도에 관한 편책』에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사』 「경기의병 각지 활약」 편에 

첫 번째로 등장 

1970년 12월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독립운동사』 제1권을 간행했는데, 조인환 의진은 이 책 속의 「제4절 경기의병의 각지 활약」에 맨 먼저 등장하고 있다. 


1. 조인환 의병부대

군대해산 후 충청도에서 기의한 조인환은 의병을 거느리고 1907년 8월 하순 경기도 양근(楊根)으로 이동하여 일군 아카시(明石) 중대와 격전을 벌인 후 9월 상순 양주·파주 부근으로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의병 부대원 약 4백 명은 소수단위(10여 명씩)의 게릴라부대를 편성하여 각지로 출몰하면서 싸우는 한편, 각 면·동에 통문을 발하여,


“전답곡(田畓穀) 추수자(秋收者)를 병작분반(倂作分半)하여 작인 소식(所食) 이외에 전주소식(田主所食)은 수일립곡(雖一粒穀)이라고 물계급(勿計給)하고 선복수출(船卜輸出)을 일병집류(一倂執留)이되 여혹위월(如或違越)이면 해작인(該作人)은 포살하고 해동(該洞)도 충탕(衝蕩)케 한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1권. 559쪽)

라고, 하여 군량확보에 주력하면서 친일관료들을 소탕하고 이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조인환 의병장은 1907년 8월 군대해산 후 의병을 일으켜서 그달 하순 경기도 양근(현 양평 속면)으로 이동하여 일본군 아카시(明石) 대위가 이끄는 부대와 격전을 벌인 후 9월 상순 양주·파주 지역으로 이동한 후 각지에 통문을 내었는데, 추수를 한 곡식은 경작자 몫을 제외하고, 토지소유자 몫은 모두 의병들의 군량미로 사용하겠다고 한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일본군 제13사단장은 보병 제52연대의 1중대를 파주 방면으로 파견하였다. 9월 8일 새벽 일본군의 기습에 의병은 격전을 벌여 이들에게 많은 손해를 입혔으나 16명의 전사자를 내고 말았다. 

“8월 하순 양근 부근에서 아카시(明石) 중대에 의하여 소탕된 수괴(首魁:의병장 -필자 주) 조인환이 인솔하는 폭도(의병-필자 주)는 9월 상순 경기도 양주 및 파주 부근으로 이동하여 약탈 횡포를 극하여 경원(京元)·경의(京義) 가도 부근에 적세가 만만치 않았다. 그로 인하여 제13사단장은 보병 제51연대 중대장 타나베(田邊) 대위에게 1중대 및 10중대의 반소대, 임시 산포 1소대, 공병 1분대를 주어 양주 부근을 또 보병 제52연대 12중대에게는 파주 부근을 토벌시켰다.(중략)


8일 타나베 토벌대는 폭도를 수색하면서 가라비리(加羅非里:현 광적면 가납리-필자 주)로 향하여 전진하던 중, 동지 서북방 석적리(石積里) 방면으로부터 보통 한인으로 분장한 남녀가 삼삼오오로 계속 아군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자들을 만났으나 그 대부분을 통과시킨 후 비로소 위장한 폭도라는 것을 간파하여 곧 총포탄의 사격을 가하였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권. 699~700쪽)


일본군은 보병과 산포대, 공병대까지 동원하여 공격해 오는 상황 속에서도 조인환 의병장은 얼마나 대담한 전술로 일본군과 싸웠는가를 그들의 보고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의병들의 피로 물든 산하


그 후 조인환 의진은 다른 의진와 긴밀한 연계를 하며 임진강 일대를 근거로 일본군을 기습하여 그들에게 다대한 피해를 입혔지만, 의병들의 피해는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음을 한국주차 일본군사령관이 일본군 참모총장에게 보고한 문서인 「한국폭도사건 피아(彼我) 손해 일람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1907년 7월부터 이듬해 7월 14일까지 1년 동안 일본군경에 의해 피살 순국한 의병이 1만 2천명에 가까웠으니, 삼천리금수강산이 그야말로 피로 물든 산하가 되었던 것이다.  



 조인환 의병장에 대한 공훈록과 신문기사


경기도 양평 출신이다.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이어서 구한국군이 강제 해산되기에 이르자 이러한 일제의 내정간섭에 대항하여 일제를 몰아내고자 의병을 규합하여 8월 4일 경기도 양근(楊根:지금의 양평)을 습격하여 군아·세무서·우편물취급소 및 일본인 가옥 등을 파괴·방화하였다. 이에 놀란 일인 우편물취급소 소장은 가족을 동반하고 도망 다녔다. 이 양근 습격 사건으로 일군에게 타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파주(坡州)·양주(楊州) 지방을 중심으로 한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임진강 일대를 근거로 수차 일병을 습격하였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제1권. 929쪽)


1907년 7월 19일 광무황제가 퇴위당하고 5일 뒤 24일 한일신협약(통칭 정미7조약)이 체결되어 일본 경찰이 경찰권을 휘두르게 되었지만, 일본으로부터 경찰이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던 까닭에 당시 의병투쟁에 관한 우리 기록은 의병장 문집이나 신문기사를 통하여 볼 수 있고, 러일전쟁과 을사늑약 전후에 우리 땅에 들어온 일본군의 기록인 「한국 폭도봉기의 건」에 나타나있다. 당시 비교적 의병에 대하여 호의적이던 「대한매일신보」의 기사에 의병장을 ‘의병 괴수’라고 한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황성신문」(1907. 08. 27)은 조인환·권득수 의병장을 ‘의병괴수’, 두 의병장을 ‘양한(兩漢:두 놈·두 무뢰배)’라고 했고, 이어 조인환·유각 의병장을 ‘倀魁하던 兩漢’이라고 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먹을 것이 있는 곳으로 범을 인도한다는 나쁜 귀신인 창괴(倀鬼)의 우두머리[魁] 두 놈·두 무뢰한’이라고 했으니, 엄청난 비하였다. 


1896년 전기의병 때는 어찌했을까? 당시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 서재필 귀화명)이 주도했던 「독립신문」에서 의병을 ‘비도’, 의병장을 ‘비도괴수’라고 했는데, 이 낱말의 뜻을 풀어보면, 비도(匪徒)는 ‘떼를 지어 다니며 약탈과 살인을 일삼는 무리’이고, 괴수(魁首)는 ‘악당의 우두머리’이니, ‘국수보복(國讐報復)’(나라의 원수를 갚자)의 기치를 들었던 의병을 보는 시각이 배달겨레와 엄청난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인환 의병장의 피살과 일제의 만행


조인환 의병장은 군대해산 직후 충북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원주를 거쳐 양주, 파주, 적성 등지에서 가장 많은 의병으로 구성된 의진을 이끌고 일본군경과 싸웠다. 조인환 의진에서 활약하다 살상된 의병도 부지기수지만 붙잡혀 재판을 받은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조인환 의병장은 불행하게도 의진의 내분으로 인해 피살되었다는 기록이다.


여주경찰서장 보고에 의하면 폭도수괴(의병장-필자 주) 조인환은 이천군 발면(鉢面) 파찰송리(杷察松里)에서 그 부하 7명에 의하여 살해되었다는 신문이 있어 즉시 순경을 파견하여 조사케 한 바 동지 촌민들의 말에 의하면 전년(1909년-필자 주) 12월 20日 오전 8시경 약탈품 분배를 놓고 부하와 다툰 끝에 총살되었다고 하며, 그 시체를 매장한 부근에서 조선도 한 자루를 발견한 바 이는 그가 상시 휴대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함.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7권. 16쪽)


일제는 그가 실제로 사망했는지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검안했다는 데서 분노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일제의 문서에 피살된 장소로 나와 있는 ‘이천군 발면 파찰송리’ 라는 장소를 살펴보니, 1914년 부면(夫面)과 발면을 합쳐 부발면으로 되었고, 1989년 부발읍으로 되었으나 파찰송리는 알 길이 없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지만 그의 무덤은 서울·대전현충원에 없다. 그리고 서울현충원 무후선열의 위패를 봉안한 충렬대나 순국선열유족회가 마련한 순국선열 위패 봉안소인 현충사(독립관)에서도 그의 위패를 볼 수가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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