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순국선열 [2020/10] 건국훈장 대한민국장│허 위(許蔿)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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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기개의 충절 지닌
구국 애민의 불세출 의병장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허위는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
- 허위 선생에 대한 안중근 의사의 평
핵심공적
명성황후 살해에 분개하여 1896년 경상북도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1907년 군대해산 후 경기도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13도 창의군 군사장으로 서울 진공작전을 수행했다.
● 1854년 4월 1일 경상북도 선산 출생
● 1896년 경상북도 김천에서 거의, 의병 활동
● 1907년 경기도에서 재차 거의, 의병 활동
● 1908년 13도창의군 군사장으로 서울 진공
● 1908년 10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초야에 묻혀 살던 선비, 의병을 일으키다
허위 선생은 1854년 4월 1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임은동에서 태어났다. 허위 선생의 위로 세 명의 형이 있었는데 둘째 형은 어릴 때 죽었고 첫째 형인 허훈은 퇴계학파를 계승한 성리학자이며 셋째 형 허겸은 독립투사였다.
허위 선생의 집안은 대대로 이름 높은 학자 집안이었다. 당연히 선생도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으며 당대 최고의 학자 성재 허전 선생밑에서 공부를 하며 8살 때에 시를 지어 주변을 놀라게 하는 등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났다.
선생의 나이 마흔이 되던 1894년, 전국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허위 선생이 살던 구미 인근의 선산과 상주 등지는 동학 세력이 강성하던 지역이어서 환란의 중심에 있었다. 가족들은 전쟁을 피해 지금의 청송 지역인 진보군으로 일시 피난하였다.
허위 선생이 역사의 전면에 나오게 된 시기는 1896년이다. 전해인 1895년에 명성황후의 살해 사건이 있었던 다음 달에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전국에서 항일 의병이 연이어 일어났다. 몇 달간 전국의 의병 소식을 듣던 선생은 본인도 의병으로 나설 마음을 먹게 된다.
의병으로 활동하던 허위 선생, 관직으로 나아가다

의병은 무장을 갖춘 후 성주와 지금의 김천인 김산에 진을 쳐두고 대구로 진격하기 위해 각지에 격문을 발송해 의병을 모집했다. 예전에 동학군을 격파한 전력이 있던 지례 군수는 의병을 막기 위해 군내의 군대를 소집하는 한편 대구관찰사에게 의병 봉기를 보고했다.
김산의병은 지례의 군대는 쉽게 격파했으나 공주와 대구에서 출동한 관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은찬과 조동호 등의 의병주모자들은 관군에 포로가 되었고, 선생은 잔여 의병 가운데서 포군 1백여 명과 유생 70~80명을 모아 북상을 계속하여 충북 진천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해산하라는 임금의 밀지를 받고 의병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허위 선생은 해산 후 큰형의 집에서 학문에 열중했다. 3년 후 신기선 선생의 천거를 받아 관직에 나간 후 성균관박사, 주차일본공사수원, 중추원의관, 평리원수반판사를 거친 뒤, 1904년 8월에는 오늘날의 대법원장서리에 해당하는 평리원서리재판장에 임명됐다.
일제의 침략에 항거해 다시 의병을 일으키다

1904년 일제는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조인(調印)하게 하면서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더욱 가속화했다. 허위 선생은 이상천, 박규병 등의 동료들과 함께 전국에 배일통문을 돌려 일제 침략을 규탄하고 전 국민이 의병의 대열에 나설 것을 촉구했으나 이 일을 빌미로 일제는 허위 선생을 감옥에 가두고 항일 투쟁을 중단하라고 했으나 허위 선생이 조금도 굽힘이 없자 일제는 헌병의 감시 아래 강제로 고향으로 보냈다.
감시를 받으며 살던 허위 선생은 ‘을사늑약’ 소식을 듣게 됐다. 이때부터 선생은 각 지역을 돌며 의병을 다시 일으킬 준비를 했다. 이어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 당하고 군대가 강제 해산됨에 따라 허위 선생도 의병을 일으켰으며, 곧 이인영 부대를 추축으로 하는 전국 의병의 연합체인 13도창의군에 참여한다.
경기도 북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군을 격파
13도창의군은 전국 각지의 의병장들에게 서울을 향해 진군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발송했다. 동시에 한국 주재 각국 영사관에 선언문을 보내 항일전의 합법성을 내외에 공포하였다. 의병전쟁은 광무황제의 칙령에 따른 한국의 독립전쟁임을 강조하고 국제법상 교전단체이므로 전쟁에 관한 모든 법규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 각지로부터 집결한 의병의 규모는 총 1만여 명에 달했다. 양주에 집결한 의병장들은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한 뒤 서울 진공작전에 돌입했다. 하지만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의 타계소식을 듣고 문경으로 급거 귀향하고 격문 등으로 인해 이미 공격사실이 알려진 뒤라 철저하게 준비된 일본군의 방어를 뚫지 못해 서울진공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허위 선생은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을 무대로 유격전을 시작했다. 일본군의 진지를 기습하고 통신을 마비시키고 부일 매국분자들을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하지만 1908년 6월 11일 은신처를 탐지한 일제에 의해 잡히고 말았으며 1908년 10월 21일 55세의 나이로 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