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순국선열 [2020/10] 건국훈장 독립장│조명하(趙明河)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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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육군 대장 처단
저 세상 가서도 조국 독립 이루리라
나는 삼한(三韓)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항쟁은 계속하리라.
- 조명하 의사의 유언 -
핵심공적
타이완 타이중 시에서 육군 특별 검열사 구니노미야 구니히코에게 칼을 던져 그를 처단했다.
● 1905년 5월 11일 황해도 송화 출생
● 1928년 타이완 타이중시에서
일본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처단
● 1928년 10월 10일 타이완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사형, 순국
●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독립항쟁가들의 무용담을 들으며 키운 애국심

같은 황해도 출신의 김구 선생과 노백린 선생 등 독립항쟁선각자들의 무용담을 전해 들었고 특히 그해 4월에 창덕궁 금호문 앞에서 있었던 송학선의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암살 미수 사건은 그의 마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독립을 위해 자신이 무얼 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선생은 마침내 큰 결심을 한다. 아들 혁래를 낳고 친정에서 몸조리하던 부인 오금전 씨를 어머니와 함께 보러 가던 길에 의사는 갑자기 “큰 볼일이 있어 멀리 떠나야겠습니다”라며 발걸음을 돌렸다. “여기까지 왔으니 처자를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극구 말리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친 채 돌아섰다.
본인의 결심이 처자식을 만나 흔들릴지도 몰라 자신을 채찍질했던 것이다. 여중구 등 친구 6명이 마련해준 여비를 받아 9월쯤 고국을 떠났다. 항일을 위해서는 우선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조명하 의사는 현해탄을 건너 일본 오사카에 도착했다.
상해 임시정부로 가기 위해 먼저 타이완으로

조명하 의사는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중국 상하이로 바로 가는 것은 일본 경찰의 통제가 심했고 신분이 노출될 위험이 있었기에 일단 일본의 지배 아래에 있어서 비교적 여행이 자유로운 타이완으로 갔다. 그곳에서 중국으로 갈 생각이었다.
1927년 11월 타이완에 도착한 조명하 의사는 상해로 가기 위한 여비를 마련하고자 타이중시(臺中市) 계광로(繼光路) 52번지에 있는 부귀원이란 찻집에서 매달 10원(圓)을 받고 일을 했다. 의사는 타이완에서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일제하에 고통을 받는 타이완 원주민들의 실상을 봤다.
조명하 의사는 타이완에 머무르면서 대만 총독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타이완인으로부터 단도를 구입하고 칼을 다루는 연습과 동시에 만약을 대비해 칼에 바를 독약도 준비했다. 하지만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고 의사는 원래 계획대로 상해로 떠날 준비를 한다.
중국 침략을 노리는 일본군의 수뇌 타이완 도착

당시 일제는 중국을 침략하기 위해 산둥성으로의 출병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그 전진기지로 타이완에 일본군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이 때문에 많은 일군 병력이 타이완 각지 요소에 배치돼 있었고 타이완 주둔 일본군을 검열하기 위해 구니노미야가 파견된 것이다.
의사는 타이중시에서 구니노미야의 일정을 조사했다. 1928년 5월 13일 타이중시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오전 10시에 기차 편으로 떠날 예정이라는 결정적인 정보를 입수했다. 그 정보에 따라 타이중(臺中)역에서 구니노미야가 숙박할 지사관사까지 철저히 답사했다.
마침내 5월 14일 운명의 날이 밝아오자 결연한 마음을 다지며 단도에 극약을 바른 다음 이를 가슴에 품고 예정 장소로 나갔다. 도로 양쪽에는 물샐 틈 없이 군인과 경찰들이 늘어섰다. 의사는 당시 동원된 수많은 환영인파 속에 몸을 숨겼다.
죽음 뒤에 성공한 조명하 의사의 거사
오전 9시 55분쯤 지사 관사에서 구니노미야를 태운 차가 출발했다. 타이중 도서관 앞 사거리 지점에서 좌회전을 위해 속도를 줄이는 순간 환영 군중 사이에 있던 의사가 잽싸게 나와 자동차 뒤쪽으로 뛰어올랐다.
위험을 느낀 운전사는 속력을 냈고 함께 타고 있던 오누마(大沼) 무관장이 구니노미야의 몸을 감쌌다. 의사는 그를 향해 단검을 힘껏 던졌다. 칼은 구니노미야의 목을 스쳐 가벼운 상처를 입힌 뒤 운전사의 등에 맞았다. 의사는 거사 후 “당황하는 군중을 향해 당신들은 놀라지 마라. 나는 대한을 위해 복수한 것이다”고 말했다.
조명하 의사는 그 자리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고 일본 군경들에게 포박을 당해 타이페이 형무소로 이송됐다. 그해 7월 18일 타이완고등법원 특별공판정에서 소위 황족위해죄와 불경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조명하 의사는 3개월 뒤인 10월 10일 타이페이 형무소에서 24살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의사가 사망한 지 3개월 후 구니노미야 구니히코는 패혈증으로 사망하여 조명하 의사의 거사는 마침내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