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순국선열 [2020/11] 독립장 - 채응언(蔡應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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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 정예 게릴라전으로 일제를 타격한
마지막 의병장, 채응언(蔡應彦)
평남 강원도 일대를 무대로 엄정한 군율을 강조함과 동시에 소수 정예의 게릴라전술을 전개하며 일제에 대해 적극적인 무력항쟁 전개 ○ 주요약력 1907년 군대해산 후, 의병부대 부장으로 활약 1908년~1910년 황해도 안평순사주재소·수안헌병분견소, 함경도 마전동순사주재소 공격 1911년~1915년 의병 해산을 거부하고 의병대장으로, 북한지역에서 항일 무장투쟁 1915년 11월 4일 평양형무소에서 사형 집행으로 순국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1915년은 대한제국기 의병사에서 매우 주목되는 해이다. 의병이 종식된 해로서 올해로 100주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후에도 의병활동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1915년에는 일본에 의해 자행된 경복궁침범사건과 을미사변 그리고 단발령을 계기로 시작된 의병항쟁이 약 20년의 대단원을 내리는 상징적 사건이 있었다. 바로 의병장 채응언의 체포가 그것이다. 1907년 군대해산령으로 통분 이기지 못해 의병 투신 의병장 채응언은 평남 성천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황해도 곡산으로 이사하여 화전을 전전할 정도로 가난한 농민이었다. 하지만 건장한 체력과 용기를 바탕으로 협객적 농민로 성장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않고 저항하였다. 19세기 후반 외세의 침탈로 위태로워진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는 우국적 지사로 변모하였다. 일제의 정치 경제적 침탈이 본격적으로 자행되던 1907년 중반, 대한제국의 육군보병부교(陸軍步兵副校)로 복무하던 그는 1907년 군대해산령이 내리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고자 의병에 투신하였다. 처음에는 유인석 계열의 의병부대에서 잡일을 하다가 능력을 인정받아 소모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던 중 의병장이 전사하자 그가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엄정한 군율 강조, 소수 정예의 게릴라전술 전개 1908년에는 황해도 안평(安平)의 순사주재소와 수안(遂安)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여 일본 헌병을 사살하였고 또한 함남의 마전도 순사주재소를 급습하여 많은 무기를 노획하였다. 그 뒤 1911년 김진묵(金溱默)의병장의 부장으로 각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일본군과 전투를 계속하여 다대한 전과(戰果)를 거두었다. 이후로는 부하 3∼400여 명을 휘하에 두고 의병장이 되어 경기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 등 각도를 신왕귀래(神往鬼來)하면서 항일전을 전개한 바 있다. 1913년 6월 3일 밤에는 황해도 대동리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여 일본군을 사살하고 일본수비대를 불질러 일본군 수명을 부상케 하였다. 한편 오승태(吳承泰)와 합세하여 선암(仙岩) 헌병분견소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1915년에는 평남 성천군 옥정리(玉井里) 산기슭에 근거지를 두고 신출귀몰한 게릴라전을 전개하면서 군자금을 조달키 위해 7월초에 부유한 한인에게 항일독립사상을 고취시켜 군자금 조달에 협조하도록 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일제, 채응언 체포를 위한 특별수색대 조직 그런데 마을 사람(일설로는 채응언의 처남이라고도 한다)이 밀고하여 평양 헌병대 성천(成川)분대와 파출소장 전중(田中瀞雄) 등이 출동하였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채응언은 약속한 군자금을 받으러 안광조를 데리고 밤 11시쯤 산을 내려오다가 잠복 중이던 일본 헌병과 격투가 벌어져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적중하지 못하니 단도로써 육박전을 전개하여 30여 분 동안 격렬히 싸우다가 체포당하였다. 그리하여 전중 상등병은 많은 부상을 입고 현상금 250원을 탔고 그의 보조원으로 그의 체포에 힘쓴 박성빈(朴聖彬)과 강태규(康泰奎)가 각각 50원, 20원씩을 받았다. 그 후 7월 8일에 경무부의 전전(前田) 보안과장과 전중 상등병 등에게 호송되어 평양 헌병대에 구금되었는데 이 때 그의 체포 소식을 듣고 달려나온 사람들이 무수히 많아 평양 시내는 일대 혼잡을 이루기도 하였다. 일본 헌병중위에게 호된 심문을 받은 뒤 21일 평양지방법원으로 송치되어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나라와 위해 싸웠을 뿐, 강도가 아니다 수감된 뒤 일인 검사에게 취조를 받고 소위 살인 및 강도죄목으로 기소되어 8월 31일 사형언도를 받고 분개하여 "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걸고 싸웠는데 강도란 당치 않다"로 항변하였다. 감옥에서 자신의 옷으로 끈을 만들어 목을 매고 자결코자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자 판결에 불복하고 상고하였다. 9월 21일 평양 복심법원(覆審法院)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그 해 11월 평양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었으니 격렬한 항일전을 전개한 독립투사로서 일생을 마치고 장렬히 순국하였다. 채응언은 마지막 의병장답게 자신의 의병활동이 정당하였음을 일제가 교수형에 처할 때까지 계속 주장하였다. 그가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협객적 농민과 우국지사를 거쳐 보국구민의 의병장으로의 성장을 통해서 우리 근대사상의 민족운동의 심화과정을 확인하였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이에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