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순국선열 [2020/11] 독립장 - 이회영(李會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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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지킨 천 년 명문가
이회영(李會榮)
신민회를 조직했으며 서전서숙과 장훈학교를 설립해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일가족이 만주에 정착해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한다. 항일구국연맹에서 흑색공포단을 지휘해 일제와 무장투쟁을 벌였다. ○ 주요약력 1867년 3월 17일 서울 출생 1907 신민회 조직 1911 교민자치단체 경학사 조직 1912 신흥무관학교 설립 1924 재(在)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조직 1931 항일구국연맹과 흑색공포단 설립 1932년 11월 17일 사망 선생은 명문가에서 태어났음에도 세상을 보는 시각과 선각자적인 안목이 뛰어났다. 신지식을 받아들여 평민적 사고와 행동으로 우리의 독립운동사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역사는 선생을 독립운동가 또는 아나키스트로 평가하고 있지만, 위대한 사상가이며 혁명가로 기록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신라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온 명문가 자손 이회영 선생은 개방적이고 호탕한 성격이었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지만 일찍부터 개화사상을 받아들였고 감리교에 몸을 담은 후에는 당시의 양반 출신이라면 생각하기 어려운 인간 평등사상도 받아들인다. 선생은 스무 살이 지나면서부터 집안의 노비에게도 존댓말을 썼고 아버지 이유승이 사망하자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해방해 평민으로 만들었다. 특히 과부가 된 여동생의 거짓 부고를 낸 다음에 다시 결혼시킨 일은 당시 유력가문이라면 생각도 할 수 없던 행동이다. 이회영 선생의 개방된 사상과 큰 인물다운 행동은 만주 망명 후는 물론 마지막까지 일관되게 나타났다. 선생의 사고 전환과 실천은 오늘에서 되돌아볼 때 당시 상황을 비추어보면 정말 위대한 선각자라고 할 수 있다. 독립을 위한 국내 계몽활동과 신민회 조직 이회영 선생은 21살 때 독립협회에 참가한다. 이상재, 이상설, 이범세, 서만순, 조한평, 여규형, 이강연 등과 교류하면서 민중 계몽, 신진 정치가 간의 협력, 내치와 외교정책의 수립 등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수습하려 힘썼다. 당시 계몽운동의 하나로 공옥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관이었던 이상설과 당시 외무부 교섭국장이었던 동생 이시영과 함께 을사늑약 철회 운동을 벌였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않겠다고 생각한 선생은 나인영, 기산도 등과 함께 을사오적 암살을 모의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동시에 형제들과 함께 해외에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했다. 1906년에 재산을 처분하고 노비를 해방시킨 다음 만주에 서전서숙을 세우고 그곳의 교장으로 이상설을 초빙한다. 하지만 이상설의 헤이그 특사 파견과 일제의 방해로 서전서숙은 다음해 문을 닫고 말았다. 국내에서는 공옥학교에서의 인연으로 안창호, 신채호, 이시영 등과 함께 1907년 4월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한다. 선생은 중앙위원에 취임하고 교육, 계몽, 강연 활동을 했다. 이 활동의 하나로 그해 11월에 사립경성장훈학교를 설립하는 등 국내외에서 독립을 위한 활동을 벌였다.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다 선생은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설치하고 독립운동 기반 닦기에 들어간다. 선생은 국내를 오가며 비밀리에 여러 인사와 접촉해 다양한 계획을 추진했다. 그중 하나가 광무황제 망명이다. 아들 이규학이 광무황제의 조카딸과 결혼을 하는 기회를 틈타 광무황제와 접촉했다. 그러나 실행만 남겨둔 상황에서 황제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중단된다. 1921년 임시정부에 내분이 일어났을 때 선생은 신채호와 함께 조정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세 개의 파로 나뉘면서 통합은 실패했고 선생은 실망해 임시정부를 떠났다. 그 뒤로는 무정부주의 활동을 펼친다. 1924년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설립에 참여했고 이듬해인 1925년에는 비밀결사 다물단을, 1931년에는 한·중·일 아니키스트 합작으로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해 의장으로 취임하고 산하에 일제 요인제거와 기관 폭파를 위한 단체인 흑색공포단을 설립했다. 일제기관 파괴활동을 하는 흑색공포단 지휘 선생이 지휘한 흑색공포단은 일본, 대만, 중국인 등도 참여한 범국가적인 행동단체였다. 흑색공포단은 경제부, 정보부, 선전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정보부와 행동 대원은 1930년에 선생이 조직한 남화한인청년연맹 단원이 주로 맡고 있었다. 흑색공포단이 가장 처음으로 한 일은 중국 국민당 내에 있던 친일 그룹 리더인 왕정위 저격이었다. 그 후 천진과 복건성의 일본총영사관 관저에 폭탄을 던졌고 이어 천진에 군수물자를 싣고 입항한 11,000톤급의 일청기선에 폭탄을 던져 선체 일부를 파손하고 많은 사상자를 냈다. 1932년 이회영 선생은 활동범위를 넓히기 위해 만주의 다렌으로 가려고 했다. 당시 만주는 일제의 지배에 있었기에 모두 말렸으나 선생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다렌에 간 선생은 항구에서 일본 경찰에게 잡히고 만다. 조선인의 제보와 일본 밀정의 첩보로 이미 선생이 다렌에 있다는 정보가 알려졌던 것이다. 일본 경찰의 고문은 노인의 몸으론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일본 경찰은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감옥에서 자살했다고 발표했으며 증거를 숨기기 위해서 서둘러 시신을 화장했다. 1932년 11월 17일, 선생의 나이 65세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