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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나는 삶 이야기 [2020/11] 독립운동의 산실, ‘임청각(臨淸閣)’ 지키는 이항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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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石洲) 이상룡 선생의 종손  

최대의 독립운동가 배출한 존경받는 명문가


독립전쟁, ‘지식’ 아닌 ‘정신’으로 하는 것


글, 사진 | 편집부


  경북 안동에 있는 『임청각(臨淸閣)』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500년이 된 고성 이씨의 종택이다. 이곳은 임시정부 수반이었던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이자, 선생의 아들, 손자 등 독립운동가 11명을 배출하는 등 4대에 걸쳐서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의 산실이다. 어찌 이뿐인가. 사위와 처가 쪽에서도 40여명의 독립운동가가 나왔기에, 임청각은 존경이라는 말조차 정녕 부족하다. 한 집안에서 나라를 이끌어갈 독립운동가를 이렇게 많이 배출한 것은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이곳을 잊고 살았다. 월간 <순국>에서는 올 독립전쟁 선포 100주년을 기념, 석주 이상룡 선생의 종손으로서 지금까지 임청각을 지키고 있는 이항증 선생을 만나 이상룡 선생 가문의 발자취와 후손으로서의 삶을 들어보았다. 



 임청각(臨淸閣)은 임시정부 초대국무령을 지내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무장독립투쟁의 토대를 마련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1932) 선생의 생가다.


 이상룡 선생은 누구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경제적인 풍요로움과 종손으로서의 권위를 보장받은 분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일제가 한일합병을 감행하자 나라를 빼앗긴 현실에 안주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의 길을 자처하였다.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전답을 처분해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여 당시 54세에 50여명의 가솔과 함께 북간도로 망명해, 독립운동기지인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무장독립투쟁의 중심에 서서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행동하는 지성인이었다. 1925년 임시정부 수반인 초대 국무령을 맡아 독립운동계 분파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공자와 맹자는 나라를 되찾은 후 읽어도 늦지 않다”


나라를 빼앗겼는데 유교는 무엇이고, 집안은 또 무엇인가. 선생의 치열한 독립정신과 의기를 볼 수 있는 것은 "공자와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며 유학자로서 책을 덮는다. 선생은 망명 직전 임청각에 있는 사당으로 올라가 신주와 조상 위패를 땅에 묻고 나라가 독립되기 전에는 절대 귀국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기도 하였다. “너희들은 이제는 독립군이다!” 가문 재산인 종들도 항일 무장투쟁에 동참시키고자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50여명과 함께 망명길에 오른다.  


 만주 망명길에 오른 2년 뒤인 1913년에는 아들 이준형에게 “조선으로(국내로) 들어가 임청각을 처분하라”고 하였으며, 그 후 국내로 들어온 아들 이준형이 “임청각을 팔겠다”고 하자, 문중에서 이를 말리면서 독립운동 자금 500원을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이상룡 선생의 생가이자 집안에서 11명, 사위, 처가 사돈 등 50여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임청각이 잊혀진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전면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8.15 경축사에서 ‘임청각(臨淸閣)’을 거론했기 때문이다. 


 “경북 안동에 임청각이라는 유서 깊은 집이 있습니다. 임청각은 일제강점기 전 가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 독립운동의 토대를 만든 석주 이상룡 선생의 본가입니다. (중략)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그 집을 관통하도록 철도를 놓았습니다. 99칸 대저택이었던 임청각은 지금도 반토막이 난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상룡 선생이 이회영 선생과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항일 무장투쟁의 산실이 되었다. 신흥무관학교가 배출한 김좌진, 김원봉, 지청천 등 3,500여명의 졸업생은 항일무장투쟁사에 한 획을 그은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의 주역이 됐다. 나라를 빼앗긴 국민에게는 큰 용기를 줌으로써 독립전쟁과 광복을 향한 실질적인 힘이 되었다.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한다니요?”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1925년 임정 초대 국무령까지 지낸 이상룡 선생의 후손도 일제로부터 가해지는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 했다. 만주에서 조국으로 돌아왔던 외아들은 일제의 회유에 시달리다 자결했다. 손자는 만주 감옥에서 투쟁하다 해방 이후 전쟁에서 병사했다. 고아가 된 증손자 이항증 씨와 증손녀 이혜정 씨는 고아원에서 3년을 지내야 했다. 


 석주 이상룡 선생 종손으로 지금까지 임청각을 지키고 있는 이항증 선생은 과거의 고단했던 삶을 담담하게 술회한다. 


 “돈이 없어가지고 고아원에 간 건 나만 아니고, 내 여동생까지 고아원에 같이 갔어요. 위로 형이 네 사람이 일찍 죽었거든요. 그래서 아버지 없는 조카가 아홉이 나왔어요. 재산이라곤 땅 한 평도 받지 못했는데, 걔들 크는 것까지 잘 보살펴 주지도 못했으면서 이들이 결혼할 때 여덟 번이나 혼주석에 앉아있었다. 이거는 말로, 글로 다 설명이 안 돼요. 이건 하늘만 아는 얘기지. 국가 공로가 있고 없고 둘째 문제고, 우리를 보호하질 못해서 고아원에서 컸다… 이러면 가문으로 봐서나 국가로 봐서나 큰 충격이죠.”


“어렸을 때, 정말 밥 한번 실컷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밥 한번 실컷 먹어봤으면 좋겠다'고 했어. 99칸 집(임청각)에서 쫓겨나 제대로 잠잘 집은 고사하고 밥조차 먹기 힘들었습니다. 모친께서는 그게 한(恨)이 되셨는지 90살 때 쓴 회고록에 적어두셨더라고. 그 많던 전답을 팔아 독립운동했는데, 정작 자식들은 먹을 게 없어서 굶고 있는 현실이 답답하셨던 게지." 


 "그 많던 재산 다 독립운동하는 데 썼지. 애들을 가르쳐야 하는 데 돈이 없잖아. 학교에서 쫓겨 오기 일쑤였어. 광복이 되었지만 친일파가 경찰과 관료로 그대로 남아 1950~1960년대는 독립운동했던 사람들을 죄인 다루듯이 했어. 독립운동가 가족이 제대로 대우받게 된 것은 4.19 이후부터야." 


 이항증 선생은 해방 후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했다면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고아원을 전전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뒤늦게나마 임청각에 대한 대통령과 국민적 관심에 감사하다고 말한다. 이어 “이제는 일제에 의해 철저히 망가지고 훼손된 독립운동가의 본산인 임청각이 다시 제 모습을 찾게 되었으면 한다"고 포브를 전했다.


 “일제는 독립정신이 이어지는 걸 가장 두려워했습니다. 사람을 키우려면 공부를 해야 하는데 그걸 막았어요.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독립운동가 집안은 철저히 공부를 못하게 막았습니다. 아무리 공부 잘해도 중학교를 갈 수 없게 했어요… 재산을 되찾으려 해도 변호사들도 떨어지는 게 많은 친일파 재판은 서로 맡으려하지만, 독립운동가 재판은 남는 게 없어서 서로 안 맡으려 합니다.”


 사람은 바람으로만 키우는 게 아니다. 사람을 키우려면 공부를 시켜야 뜻도 커지고 생각도 커지게 한다. 친일파는 공부를 해 부와 권력을 이어갔지만,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공부를 못해 뜻도 못 잇고, 아직도 가난하게 산다. 독립운동가 못지않게 그 후손들이 겪어야 하는 삶도 역시 고단했던 것이다. 광복이 된지 75년이 되었어도 독립전쟁의 그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나 사는 모습 보면 누가 애국하려 하겠나?”


 인터뷰를 한동안 안하시려는 이유를 묻자, 이항증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나 사는 모습 보면 누가 애국하겠나…. 독립운동에 혹시 누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지.”


 서울 현충원 임정요인 묘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선생이 바로 이곳에 잠들어 있다. “나라가 독립되기 전에는(조선 땅이 되기 전에는) 나를 데려갈 생각을 마라. 조선이 독립됐다 하면 내 유골을 유지에 싸서 조상 발치에 묻어다오” 


 1932년 6월 15일 이상룡 선생이 죽기 직전 동생에게 남긴 유언이다. 해방 후 45년이 지나서야 선생은 지난 1990년 중국 흑룡강성에서 돌아왔지만 이상룡 선생은 오랫동안 ‘무국적자’ 신세로 남아있었다. 일제 호적이 그대로 대한민국 호적이 됐는데, 당시 선생이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상룡 선생의 호적은 2009년도가 돼서야 바로 잡힌다. 국적 회복에도 후손이 500만 원 가까운 변호사 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국적 회복 관련 법률은 제정됐지만, 그 뒤처리는 개인에게 떠맡겨졌기 때문이다. 후손들은 심지어 임청각을 관리할 여력이 되지 않아 국가에 헌납하려고도 했다.


  문 대통령, 독립운동 산실로 ‘임청각’ 언급 관심집중 


 “슬퍼 말고 옛 동산을 잘 지키라. 나라 찾는 날 다시 돌아와 살리라.” 이상룡 선생이 고향집 임청각을 떠나 만주로 향하며 쓴 고별시다. 그는 독립전쟁을 하다 결국 살아서 고향 땅에 오지 못했다. 임청각에 다시 오지 못한 것이다. 일제는 임청각 마당을 가로지르는 철로를 놓았다. 정신적 맥을 끊고 ‘불령선인’ 불온한 조선인이 여럿 태어난 집이라는 이유다. 이 중앙선 철로 공사로 임청각은 두동강이 났다. 행랑채와 부속 건물을 철거해 99칸에서 70여 칸이 됐다. 


 문 대통령과의 인연을 묻자, 2016년 5월 27일 임청각을 방문했다고 한다. 이항증 선생이 사비로 만든 임청각 유래와 석주선생의 일대기 책자를 본 모양이라며, 그것이 인연이 되어 8.15 광복절 경축사에 임청각이 언급되어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문 대통령이 임청각을 거듭 언급하셔서 임청각을 두동강 낸 철로를 없애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중앙선 복선화 사업이 2020년까지 추진되지만, 임청각 복원에만 속도를 낼 것이 아니라, 친일파 청산과 함께 독립운동가를 조명하는 일이 제대로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가을의 향기가 가득 흘러넘치는 임청각 툇마루에 앉아 이항증 선생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와중에도 일제가 부설한 철도 위를 달리는 열차가 굉음을 내고 달려 불식간에 대화를 끊기도 했다. 최고의 독립운동가 집안의 민족정기를 깨부수려고 부설한 철도지만 이 집의 일가(一家)들은 일제의 흉계를 비웃듯 가문을 희생하는 아름다운 독립전쟁으로 조국을 지켰다. 그리고 임청각에서 나눈 이항증 선생과의 향기로운 대화는 석주 이상룡 선생 일가를 통해 한국 독립운동사를 이해하는 통로가 되었으며, 한편으론 대한민국의 민낯을 드러낸, 앞으로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 문득 바라본 저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청명해, 내 마음에 더욱 시리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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