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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2020/12] 건국훈장 대통령장 - 나석주(羅錫疇)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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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 자유 위해 일제와 치열한 총격전
뜨거운 민족혼 다시 깨우다 

글 | 편집부


  핵심공적

식산은행과 동양척식 회사에 폭탄을 투척하고 추적해오는 일경을 사살했다. 

주요약력

● 1892년 2월 4일 황해도 재령 출생

● 1920년 황해도에서 군자금모집, 친일파 처단 활동 중국으로 망명, 이후 의열단 등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

● 1926년 식산은행 폭파기도,동양척식회사 폭탄 투척 후 일경과 총격전

● 1926년 12월 28일 자결, 순국


동양척식회사는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고 경제적 수탈을 자행하는 일제의 기관이다. 1926년 12월 28일 이곳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던 청년은 이렇게 외쳤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 2천만 동포들아 분투하라, 쉬지 마라.”

“군자금을 마련하러 온 젊은이들입니다”

  나석주 의사는 1892년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진초리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곳은 당시 애국계몽운동단체인 신민회의 서북지방 책임자인 백범 김구가 설립한 양산학교가 있었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소년 석주는 양산학교를 거치며 독립투사로 다져진다. 청년이 된 나석주는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이 지방까지 번지면서부터 독립항쟁사에 큰 획을 그은 활동을 시작했다. 3월 하순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의 부호 최병항의 집에 6인조 권총강도단이 들었다. 이들은 모두 복면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강도답지 않게 모두 최 부자에게 엎드려 절을 했다. “저희는 일반 강도가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꾀하기 위해 군자금(軍資金)을 마련하러 온 젊은이들입니다.”

최 부자는 그들이 누군지 알고는 당시로는 엄청난 거액인 무려 630원(圓)을 내 주었다. “저희가 떠나면 즉시 일경에 연락하여 권총 강도를 당했다고 신고하십시오. 일경이 눈치채면 봉변을 당하십니다”6인조 강도단은 신출귀몰하게 다른 부자들에게도 들이닥쳤고 수사망이 좁혀오기 시작하자 나석주 의사는 1920년 11월 22일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횃불을 올려 잠자고 있는 민족혼을 깨우자

  의사는 상해에서 은사인 백범을 다시 만난다. 당시 백범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警務局長)이었다. 나석주 의사는 다시 스승의 지도를 받으며 독립항쟁을 계속했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원, 의정원 근무와 함께 의열단
에 가입해 폭파 활동과 군자금 모집 활동에 나섰다. 뿐만 아니라 이동휘가 세운 무관학교 등에서 전략전술을 연마했다. 

그해 5월 김창숙 선생과 김구 선생은 국내외 정세를 토론하며 독립항쟁의 방향을 함께 모색했다. “지금 횃불을 올리지 않으면 잠자고 있는 민족혼을 영원히 깨우지 못한다. 일정기관과 친일부호를 박멸하여 국내 동포의 잠자는 정신을 일깨워야 한다”는 의견에 일치를 보았다. 실행할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었다. 김구 선생이 먼저 나석주와 이화익을 추천했다. 김창숙 선생은 천진으로 떠나 두 명의 조선 청년과 만나 계획을 설명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하겠다며 나섰지만, 김창숙 선생은 나석주 의사를 선택했다. 

“백범도 그대의 장도를 학수고대하고 있소. 민족의 고혈을 빨고 있는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가 그대의 손에 폭파되는 날 일제의 간담이 서늘할 것이며, 잠자고 있는 조선의 민족혼이 불길처럼 다시 타오를 것이오. 대의를 위해 무운을 비는 바이오.”

단신으로 귀국하여 서울로…
조선식산은행에 폭탄 투척하다

나석주 의사는 예전에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고향을 떠난 것을 아쉬워했다. 거사를 치르기 전 고향을 방문하고자 했지만, 그 인근은 일제의 경비가 삼엄한 곳이라 방문하지 못하고 발길을 서울로 향했다. 의사는 마중덕이라는 중국인으로 위장해 남대문 근처에 있는 동춘잔(同春棧)에 투숙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마지막 밤이었다. 1926년 12월 28일 날씨는 투명했으나 겨울바람은 차가웠다. 나석주는 아침밥을 든든하게 먹고 낮이 될 때까지 거리를 배회했다. 그날 오후 2시 5분. 나석주는 식산은행으로 들어가 대부계 철책 너머의 뒷벽 기둥에 폭탄을 던졌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불발탄이었다. 오랜 기간 보관하면서 뇌관에 녹이 슬었던 것인지 폭탄이 던져졌다는 것조차 아무도 눈치채지 못해 나석주 의사는 식산은행의 정문을 걸어 나왔다.

서울 을지로에서 일본 경찰들과 
총격전 끝에 장렬하게 자결

동양척식회사로 향한 나석주 의사는 들어서자마자 일본인 1명을 권총으로 사격하고, 2층으로 뛰어 올라가 또 다른 일본인에게 총을 쐈다. 놀라 도망가는 토지개량부 간부들을 쓰러트리고 기술과장실에 나머지 폭탄 1개를 힘껏 던졌다. 하지만 그 폭탄조차 불발이었다.몰려오는 일본 경찰을 피해 동양척식회사 옆의 조선철도회사 건물로 건너간 다음 지금의 을지로1가인 황금정으로 피했다. 자신을 뒤쫓아 온 일본 경찰을 쏘아 쓰러트렸지만 이미 일경들의 포위망이 완전히 좁혀진 상태였다.

교전으로 몸을 숨기는 군중을 향해 나석주 의사가 외쳤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마라!” 추격하는 일본 경찰과 격렬한 접전이 벌어졌다. 일본 경감 다하타 유이지(田畑唯次) 등을 사살한 후 탄알이 떨어져가자 본인의 가슴에 대고 총을 쐈다.아직 숨이 붙어 있을 때 일본 경찰이 의사의 신분을 물었다. “나는 나석주다. 공범은 없다. 나 혼자 한 일이다”고 말하며 나석주 의사는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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