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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2020/05] 이달의 순국선열 | 이진룡(李鎭龍)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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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독립장 : 이진룡(李鎭龍)



신출귀몰한 해서의 명장 

왜적 때려잡는 것이 나의 직업


○ 핵심공적 :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맞서 수년간 치열한 유격전을 벌였다. 이후 남만주에서 이주민을 규합하고 군사 훈련을 하고 군자금을 모았다.


○ 주요약력


1879년  황해도 평산 출생

1907년  황해 평산 의병장으로 항일활동

1911년  중국 관전에서 포수단 조직

1916년  군자금 확보위해 운산광산 송금마차 습격

1918년 5월 1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사형, 순국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이진룡 선생은 서간도에서 조맹선, 이종협과 더불어 독립부대를 조직하고 수시로 국내로 들어와 일제주재소를 습격했다. 하루에 백 리를 날듯 신출귀몰하며 민첩하게 공격하고 후퇴해 사람들은 그를 비모퇴(飛毛腿: 날아다니듯 빠른 사람)라 불렀다. 



지, 덕, 용이 합쳐진 문무를 겸비한 인물

이진룡 선생은 1879년 황해도 평산군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대대로 명문이던 유림가문 출신인 선생은 주변 사람들이 평가하기를 천성이 질박하고 정직하며 의를 존중하고 힘이 남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15살에 경서를 통달할 만큼 영특해서 지(智), 덕(德), 용(勇)이 합쳐진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의암 유인석의 제자로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한 항일 민족의식을 굳혀 갔다. 선생이 26살이 던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체결 됐다는 소식이 평산으로 전해졌다. 선생은 그 즉시 사람을 모아서 장인 우병렬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선생은 평산 지역의 화서, 의암계 유학자인 변석현, 채홍두, 박기섭 등과 함께 평산군 궁하면 산두재에서 의병 거의를 논한 후 깊은 산 속인 도평산에서 평산의병부대를 조직했다.

그 후 사방에 격문을 돌리자 격문을 보고 농민, 포수, 해산 군인등 4~5천 명의 의병이 모였다. 평산의병부대는 전판관 우병렬이 실질적으로 부대를 총 지휘하는 가운데 돌격장, 유격장 그리고 7개 중대장이 각기 소부대를 편성했고 선생은 유격대를 맡았다. 의병들은 유리한 산악지형을 배경으로 항일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거의 마지막까지 국내에서 활약한 평산의병대

이진룡 선생은 유달수, 한정만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일본군 토벌대를 소탕해 황해의병 활동에 사기를 북돋았다. 평산의병대가 황해지역을 장악하자 일제는 1907년 말 특별 부대를 구성해 선생의 부대를 공격한다.

공격해오는 일본군을 차례로 격퇴했지만 계속된 공격으로 의병부대는 점점 약해졌다. 선생이 부대장을 맡은 이후에는 비교적 적은 병력으로 일본 침략군과 친일 무리를 응징했다. 하지만 국내의 의병들은 해체되거나 만주로 떠나 황해도에서는 이진룡 평산의병부대만이 활약하고 있었고 일제는 현상금까지 걸고 선생의 체포에 전력을 다했다.

소규모 부대의 유격전으로 항전을 계속했지만, 국내 여건은 날이 갈수록 악화됐다. 그때 스승 유인석이 연해주 블랑디보스톡에 망명, 새로운 항전 기지를 찾아 북상하자 선생은 스승을 따라 연해주로 건너가 새로운 항일의병작전계획을 수립하고 군자금과 신무기를 구한 뒤 다시 귀국했다.

강화된 무장을 갖춘 평산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은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고 더욱 강렬하게 공격을 휘몰아쳤다.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자금을 조달하고 다시 새로운 무기를 확보해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도 국내에서 의병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쉼 없는 항일의병 무장투쟁 전개

1910년 3월 3일, 평산의병부대는 경의선을 지나는 열차를 전복시킨다. 열차 전복사실의 급보를 받아 출동한 일본군 평산, 개성 연합수색대를 격퇴했다. 그 후에도 지속해서 철로 파괴를 시도해 평산 주재 헌병은 철도경비를 전담해 병력을 분산시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무장투쟁은 군사상의 약점과 여러 조건으로 그 한계에 부딪혀 점차 항전의 기세가 위축되어 갔다. 한편 연해주로 망명한 유인석은 연해주 각지에 분산되어 의병세력을 통합, 단일 군단을 이룩한 십삼도의군을 편성했고 이진룡 선생도 여기에 참여했다.

하지만 의군이 편성되어 활동하기도 전에 나라가 망해 십산도의군도 해산했고 결국 이진룡 선생은 황해도 일대에서 독자적으로 대일항전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경술국치 이후 국가체제가 일제에 편입되어 국민적 지원도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이진룡 평산의병부대는 소부대 단위의 유격전을 지속했다.

이후 일제는 병력을 총동원해 평산의병부대를 공격했다. 1910년 11월 하순부터 4개월간, 1911년 9월 하순부터 약 한 달간 걸친 대공격으로 평산의병부대는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는 대 타격을 받고 말았다.


신출귀몰한 솜씨로 송금마차를 공격해 군자금 확보

이후 조직적인 의병항쟁이 불가능해 지면서 결국 선생은 부대의 지휘권을 중대장 한정만에게 위임하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 서간도로 향했다. 조맹선, 박장호, 윤세복, 차도선 등과 함께 장백현 무송에서 포수단을 조직하는데 포수단은 이후에 만주독립군의 모태가 된다.

이진룡 선생은 다시 조맹선, 이종협과 더불어 독립부대를 조직해 수시로 국내로 들어와 일제주재소를 습격했다. 민첩하게 공격하고 후퇴해 사람들은 그를 비모퇴(飛毛腿: 날아다니듯 빠른 사람)라 불렀다. 선생은 운산금광 송금마차를 습격하는 등 군자금 확보를 위한 활동을 벌였다.

신출귀몰하는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일제는 임곡이란 사람에게 선생을 찾게 한다. 임곡은 의사로 위장해 압록강 근처를 3년간 조사해 결국 선생의 거처를 알아낸다. 이진룡 선생은 1917년 5월 일제에 잡히고 말았다.

이전에도 잡힌 적이 있으나 세 번이나 탈출했기에 일본군은 만반의 준비를 한다. 구출작전도 실패해 선생은 평양까지 압송되고 말았다. 이진룡 선생은 마지막 유언으로 “장남에게 큰 은혜 있는 선생(유인석)의 사당에 참례하여 아비 죽은 것을 고(告)하라고 전하여 달라”고 남기곤 1918년 5월 1일 평양감옥에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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