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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나는 삶 이야기 [2020/12]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김동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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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PEOPLE | 아름다운 사람들 

향기나는 삶 이야기


항일독립운동은 한민족의 가장 위대한 정신문화 

죽는 날까지 한국 위해 싸운 파란 눈의 애국자를 기린다. 


글, 사진 | 편집부 


  고등학교 시절 한국 대표 ‘주산 왕’으로 국제대회를 석권했고 금융전문가의 길을 걸으며 IMF 국제채권단 대표, 미국 체이스맨해턴은행 한국 대표, 미국 JP모건은행 한국 회장 등 최정상의 이력을 쌓아온 그에겐 45년간 이어온 아주 특별한 제2의 삶이 있다. 바로 ‘죽는 날까지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헐버트 박사의 숨은 공적을 찾는 일이다. 틈만 나면 미국, 영국, 일본 등을 구석구석 헤집고 다닌 덕분에 단행본 18권, 논문 304편을 찾아내는 행운을 얻었다. 헐버트가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세상에 남긴 귀한 자료들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태어나 살아온 배경도 나이·언어·얼굴색도 달랐지만, 두 사람은 역사 속에서 만나 스승이자 친구로 인연을 맺었다. 20년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를 이끌고 있는 김동진 회장은 이 모든 과정을 운명이라 말했다.     



인생을 바꾼 책 한 권, 그리고 운명의 시작


  대학 시절, 역사 강의에서 만난 <대한제국의 종말>이라는 책 한 권이 운명의 시작이었다. 저자인 헐버트의 출중함에 마음을 빼앗겼다. 책을 통해 그가 조선과 조선인을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 또 우리가 모르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얼마나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는지 놀라웠다. 


“학창 시절 헐버트 이야기를 책으로 읽으면서 두 가지 의문이 들었어요. 하나는 ‘헐버트가 누구이기에 우리도 모르는 우리의 정체성을 그리도 잘 헤아리게 됐을까’였으며, 또 하나는 ‘한민족을 위해 뼈가 바스러지게 동분서주한 헐버트의 이름이 이 땅에서 왜 이리 초라할까’였어요. 헐버트를 만난 지 얼추 반세기가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이 두 가지 의문에 그리 시원한 답은 얻지 못했어요.”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벽 넘어 벽이었다. 외국인 독립운동가에 대한 인식 자체가 부족했고, 한국인보다 훨씬 엄격한 잣대가 존재했다. 해외에서 힘들게 자료를 찾아 증거로 제시해도 기득권층에선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럼에도 주눅 들지 않고 나아갔다. 벽이 가로막으면 온힘으로 밀며 당당히 맞섰다. 


책 속의 헐버트는 우리 민족의 잠재력을 확신했고, 우리 모두에게 무한한 용기를 주었으며, 동시에 나라를 꼭 되찾아야 한다는 과제를 던지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진실했고 간절했다. 그리고 70년이 흘러 그 오랜 과제는 광복을 지나 산업화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의 가슴을 울렸다.   


당시 한일은행에 재직하며 야간에 건국대 법학과를 다니는 바쁜 생활이었지만, 밤잠을 줄여가며 주말 휴식과 모임까지 반납하면서 6개월 넘게 책과 시름했다. 수준 높은 고급영어여서 한 페이지를 읽는 데 하루가 꼬박 걸릴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그의 인생을 바꾼 <The Passing of Korea>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지금은 자신의 역사가 종말을 고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지만, 장차 민족정기를 어둠에서 깨워, 후대에 새로운 조국을 물려주기 위해 잠이라는 죽음의 가상이긴 하나 죽음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한민족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63년간 독립운동에 헌신한 진정한 영웅, 헐버트


  안중근 의사는 뤼순감옥 취조실에서 일본 경찰이 헐버트를 아느냐는 질문에 “헐버트를 만난 적은 없소. 그러나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아니 되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는 왜 파란 눈의 이방인에게 그토록 최상의 존경을 표했을까. 헐버트가 걸어온 길을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조선 최초의 교사였으며 우리나라 학교 운영 준칙을 만들고 교과서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근대교육의 초석을 놓은 선구자다. 육영공원, 배재학당, 한성사범대학(서울대학교 전신), 관립중학교(경기고등학교 전신)에서 20여 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며 민족지도자들을 길러냈다. 또한 한글의 우수성을 최초로 국제사회에 소개한 언론 외교관, 최초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 저자, 한민족의 뿌리를 최초로 탐구한 한국학의 개척자, 불세출의 역사학자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업적을 남겼다.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에 최초로 서양 음계를 붙인 이도 헐버트였으며, 한국YMCA를 탄생시킨 창립자이기도 했다. 한계가 없는 지적 호기심과 학구열, 정의를 향한 거침없는 도전과 실행력에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헐버트가 1889년 7월 5일 고종의 부름을 받고 육영공원 교사로 조선 땅을 밟은 후부터 1949년 8월 5일 한국에서 서거할 때까지 63년간 한국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했다는 사실입니다. 민권운동으로, 황제의 밀사로, 필봉과 강연으로 일본의 횡포와 침략주의에 맞서 싸우며 한국의 주권수호와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 영웅이죠.”


헐버트는 1895년 명성왕후 시해사건 직후 고종 침전에서 불침번을 서며 친일파로부터 보호했으며, 을사늑약을 고발한 <대한제국의 종말>을 출간했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임명되어 일본의 침략주의를 고발했다. 그로 인해 일본의 박해를 받았고, 1907년 미국으로 추방된 이후에도 독립운동은 계속되었다. 생계를 위협받으면서도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을 적극 도왔고 언론회견, 기고, 강연 등으로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당시 미국사회 지식인들이 모두 친일파였어요. 그런데 헐버트는 미국 정부의 잘못을 비판하고 한국인을 높게 평가했어요. 생전에 남긴 자료들을 보니, 한평생 저항의 인생을 살았더라고요. 처음엔 조선에 대한 중국·러시아의 횡포에 저항했고, 한자만 고집하고 부정부패에 찌든 조선사대부와 대립했고, 일본과 치열하게 싸웠고, 결국 모국인 미국에서도 대립각을 세웠으니까요. 그러한 삶의 궤적을 쫓아가면서 어느 순간 헐버트가 한민족과 영욕을 함께하며 남모르게 겪어야 했던 인간으로서의 고초와 고뇌가 애잔함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어요.”


김동진 회장은 국제금융인의 길을 마감하고 2010년 헐버트의 일대기 <파란 눈의 한국혼 헐버트>를 출간한 후 새로운 자료 발굴에 몰두했다. 미국에서의 활동에 대한 흔적과 상당수의 저술, 편지들을 찾아내는 행운을 얻었다. 지난해에는 헐버트 서거 70주년을 맞아 30년간 수집한 방대한 자료들을 집대성해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라!>를 펴냈다.  


“헐버트가 한민족의 정체성을 탐구할 때, 접근하기도 어려운 한국·중국의 한자 역사책과 씨름하며 어떻게 그 힘든 순간을 이겨냈을까. 한국 독립을 호소할 때, 일본에는 압도되면서 한국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미국의 지성사회에서 한국을 대변하는 헐버트의 처지가 얼마나 외로웠을까. 지난한 삶의 순간들을 상상하면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 합니다. 그래서 헐버트의 저술이나 업적이 꼭 세상에 빛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두 사람의 진심이 맞닿아 소중한 결실로 이어졌다. 헐버트는 2013년 ‘이 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었고 2014년에는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건국훈장과 금관문화훈장을 동시에 받는 영광을 누렸다. 2015년에는 서울아리랑상도 수상했다. 


미국과 한국, 두 남자 향기로운 삶 이야기


  김동진 회장은 한 시간 남짓한 인터뷰 내내 헐버트 이야기만 열정적으로 쏟아냈다. 그의 모든 에너지는 헐버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사실 본인도 평생 금융전문가로 살면서 국가에 헌신한 공로가 적지 않은데 말을 아꼈다. 궁금해서 물었더니 간단명료한 답변이 돌아왔다.  


“1978년 미국 케미칼은행에 입사해 30여 년간 국제금융인으로 일하며 우리나라에 선진 금융기업을 도입하려 노력했어요. 1983년 미국의 C/P를 국내에 최초로 도입했고, 1996년에 후순위채를 처음 소개했어요. 외자유치에 힘써 우리나라 산업의 성장기반을 마련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어서 기쁘고, IMF 외환위기 외채연장 협상에서 국제채권단 대표로 참가해 활약한 부분은 자부심으로 남아있어요.”


부연설명을 하자면, 그는 국제금융인으로서 자랑스러운 기록을 여러 차례 썼다. 1988년 미국 케미칼은행 뉴욕 본점 한국·대만 담당 매니저, 1999년 미국 체이스맨해턴은행 한국 대표, 2001년 미국 제이피모건은행 한국 회장, 2002년 PCA투신운용 대표이사 등을 역임했다. 2003년에는 외자유치 공로를 인정받아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그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헐버트의 나라, 미국에 성공의 발자취를 새기면서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헐버트와의 운명적 만남이 힘든 순간마다 그를 채찍질했으리라. ‘한국인은 합리적 이상주의자이며, 선천적으로 두뇌가 우수하고 적응성이 뛰어나다’는 헐버트의 책 속 문구를 나침반 삼아 낯선 땅에서도 당당하게 기를 펴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국적이 다른 두 남자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거슬러서 진심으로 교감했다. 그리고 겉모습은 다르지만 결이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 국적·나이·직업 등이 달랐다면, 열정·도전·애국심은 쏙 빼닮았다.    


종심(從心)에 이르러 다시 새로운 길을 나서다


“1999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를 만든 이후 20년간 헐버트의 업적을 발굴하는 일에 집중했어요. 2020년을 기념사업의 원년으로 삼아 올해부터는 헐버트를 알리는 일에 주력할 생각입니다. 전집을 발간하고 오페라나 영화 등 보다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갈 방법을 고민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남북과 세계를 두루 아우르는 헐버트기념관을 설립할 계획이에요. 헐버트가 진정 사랑한 한국의 역사와 문화, 한국인의 우수성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면 헐버트의 업적과 함께 한국을 알릴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닐까요.”  


지난해 발간한 저서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라!>를 영어와 일본어로 번역하는 일도 2년 안에 끝낼 예정이다. 그야말로 해야 할 일이 태산인데, 체력이 종종 발목을 붙든다. 김 회장은 요즘 밤 9시 15분부터 12시까지 운동하는 목표를 세웠다. 사랑하는 일을 더 오랫동안 행복하게 하기 위함이다.


“헐버트는 서거 1개월 전 미국 신문과의 회견에서 ‘한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이라며 한글, 거북선, 기록문화 등 5가지 이유를 들었어요. 특히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을 한민족의 가장 위대한 정신문화 가치로 평가하면서 1919년 3·1운동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애국심의 본보기’로 정의했어요. 단 하나뿐인 목숨을 조국독립에 바친 순국선열의 정신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역사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헐버트는 한민족이 언젠가 세계에서 웅비하리라는 예언도 했어요. 여러 모로 그렇게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순국선열의 위상을 바로 세우고 독립운동가 전체를 아울러 국민적 에너지를 모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1950년생인 김 회장은 올해 칠순이다. 공자는 칠순을 종심(從心)이라 했다. ‘나이 일흔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여도 법도를 넘어서거나 어긋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칠순의 그가 걸어갈 인생의 길이 헐버트가 걸었던 길과 맞닿아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헐버트는 칠순의 나이에 미국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외로운 싸움을 이어갔다. “나는 죽는 날까지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이다. (I will stand for Korean people until die.)” 헐버트는 미국 신문과의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고, 86세에 한국으로 돌아와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 약속을 흔들림 없이 지켰다. 아무런 대가 없이,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 끝끝내 인간애와 신의를 잃지 않았던 독립운동가 헐버트의 생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파란 눈의 애국자, 

헐버트 박사는 누구인가?


 외국인 독립유공자 중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 박사는 한민족에게 매우 특별한 인물이다. 그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건국훈장(1950, 독립장)과 금관문화훈장(2014) 두 훈장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다. 헐버트는 또 민족의 혼인 아리랑에 기여한 공로로 제1회 서울아리랑상(2015)도 받았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旅順)감옥에서 “헐버트는 한국인이라면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고 헐버트에게 최상의 경의를 표했을까? 헐버트의 공적은 이를 답하고도 남는다. 


 헐버트 박사는 조선 최초의 교사였으며 우리나라 학교 운영 준칙을 만들고 교과서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근대교육의 초석을 놓은 선구자다. 육영공원, 배재학당, 한성사범대학(서울대학교 전신), 관립중학교(경기고등학교 전신)에서 20여 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며 민족지도자들을 길러냈다. 또한 한글의 우수성을 최초로 국제사회에 소개한 언론 외교관, 최초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 저자, 한민족의 뿌리를 최초로 탐구한 한국학의 개척자, 불세출의 역사학자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업적을 남겼다.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에 최초로 서양 음계를 붙인 이도 헐버트였으며, 한국YMCA를 탄생시킨 창립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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