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순국선열 [2021/01] 건국훈장 대통령장│김상옥(金相玉)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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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항쟁가 탄압의 상징
종로경찰서를 태운 불꽃
글 | 편집부
독립항쟁가 탄압의 상징이었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폭파했다. 주요약력 ● 1889년 1월 5일 서울 효제동 출생 ●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비밀결사 광복단을 조직 ● 1920년 암살단을 조직하고 일제 고관 처단 등을 추진 ●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 투척 ● 1923년 1월 22일 일경과의 전투 끝에 자결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1923년 1월 12일 오후 8시경, 서울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종로경찰서 서편 유리창으로 폭탄이 날아들어 폭발했다. 종로경찰서는 일제 식민통치의 골간을 이루었던 경찰력의 대표적인 본산이자 수많은 독립항쟁가를 탄압했던 곳이다. 3·1운동을 보고 화려하게 꽃피운 독립에 대한 의지 17세에 기독교에 몸 담아 동대문교회 부설 신군야학교에서 공부를 했는데 학교가 재정난으로 폐교하자 직접 동흥야학교를 설립하여 배움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 23세 때는 약행상을 하여 전국을 돌며 견문을 넓혔고 이어 영덕철물상점을 경영하며 경제적인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1913년에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 유창순, 한훈 등과 함께 비밀결사 광복단을 조직했다. 1916년 전라남도 보성의 조성헌병대를 기습하고 친일 분자 2명을 처단했다. 1919년 3·1만세운동을 겪으면서 전국 각지에서 울려 퍼진 독립만세의 함성은 한 청년에게 인생의 목표를 독립항쟁이라 정하는 커다란 계기가 됐다. 그해 4월 1일 동대문교회 내 영국인 피어슨 여사의 집에서 박노영, 윤익중, 신화수, 정설교, 전우진 등 청년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 혁신단을 조직했고 첫 작업은 항일지하신문 <혁신공보> 발행이었다. 김상옥 의사는 신문제작의 재정지원을 맡는 한편 배포책임자로 독립항쟁의 일선에서 활동했다. 평화적 노선에서 무력투쟁 통한 독립 쟁취로 재정적인 어려움과 인쇄시설 압수로 신문발행은 11월경 중지된다. 그 중간에 김상옥 의사는 일본 경찰에게 잡혀 고문을 받았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때 의사는 평화적인 방법의 독립항쟁이 가지는 한계를 절감하고 무력투쟁을 통한 독립 쟁취를 실행하고자 결심한다. 마침 1920년 1월 초순, 만주에 있는 독립군단체인 북로군정서에서 파견된 김동순과 상해에서 온 광복단 결사대 한훈을 만나 무력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협의하면서 그의 결심은 더욱 굳어져 갔다. 같은 해 4월 김동순, 윤익중, 서대순 등과 함께 암살단을 조직하고 실행행동책, 무기공급책, 재정책, 비밀문서책, 집총대장 등의 부서를 갖췄다. 김상옥 의사는 군자금 모집에 힘쓰는 한편, 별도의 의열투쟁을 계획해 권총 40정, 탈환 3천 발을 휴대하고 입국한 광복단결사대의 한훈과 1920년 8월 24일 미국의원단의 방한을 계기로 조선총독을 비롯한 일제고관의 주살과 적의 기관 파괴 등을 실행하여 국제여론을 환기하는 활동을 진행하기로 계획했다. 칩거보다 적극적 활동 위해 서울로 돌아오다 상해에서의 생활은 의미 있었지만, 칩거보다 밖에서의 활동을 더 원했던 김상옥 의사에게는 맞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때를 만들어가기를 원해 동지들과 상의한 끝에 1922년 11월 말, 안홍한과 함께 나무 상자에 권총 4정과 탄환 8백 발 그리고 항일문서 등을 가지고 상해를 출발 12월 1일 서울로 돌아왔다. 귀국 목적은 암살단의 숙원인 종로경찰서 폭파에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주살에 있었다. 동지들과 작별할 때 의사는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나 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라는 말을 남겼다 한다. 서울에 온 뒤 옛 동지인 전우진 및 이혜수의 집에서 정설교, 윤익중 등과 회의를 거듭하며 거사준비를 갖추어 갔다. 우선 필요한 것은 활동자금이었다. 이들은 항일문건과 독립항쟁자금영수증, 인장 등을 제작하는 한편 거사용 폭탄을 마련하는 등 준비를 서둘렀다.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후 일경 4백여 명과 총격전 끝에 자결 1923년 1월 12일 밤 8시경 의사는 종로경찰서 서편 간판집의 모퉁이에서 경찰서 서편 창문을 향해 폭탄을 투척했다. 폭탄의 굉음은 마치 일제의 탄압에 억눌린 민족혼을 일깨우는 우렁찬 함성과도 같았다. 김상옥 의사는 폭탄 투척 후 용산 삼판동(현 후암동)에 있는 매부 고봉근 집에 몸을 숨겼다. 사이토 마코토가 일본 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역을 지날 때 저격을 계획했으나 동대문서 한인순사 조용수에 의해 은신처가 발각되고 만다. 무장한 순사 21명이 고봉근의 집을 포위했지만, 김상옥 의사는 다무라(田村長七) 형사를 사살하고 이마세(今瀨金太郞) 경부와 우메다(梅田新太郞) 경부보에게 중상을 입히고 남산을 넘어 효제동 지인의 집에 숨었다. 하지만 그곳도 금방 발견되어 1천여 명의 경찰과 헌병에게 포위되었고 김상옥 의사는 양손에 권총을 들고 인근 가옥의 지붕을 타고 넘으며 무장한 경찰과 접전을 벌였다. 3시간의 전투 끝에 16명 이상의 일경을 사살했으나 탄환이 다하고 말았다. 상해에서 말했던 것처럼 남은 한 발의 권총을 머리에 대고 쏘아 스스로 자결, 순국했다. 그의 나이 34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