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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2020/05] 이달의 순국선열 | 송학선(宋學先)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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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독립장 : 송학선(宋學先) 선생


안중근 의사를 본받아 실행한

조선총독 제거 시도


■ 핵심공적 : 조선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 사살을 시도했으며, 이는 6.10 만세 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주요약력


● 1897년 2월 19일 서울 서대문 출생
● 1926년 사이토 총독 처단 시도
● 1927년 5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총독을 못 죽인 것이 저승에 가서도 한이 되겠다.


    - 송학선 선생의 법정 진술 중



정직하고 청결한 것을 좋아하던 외유내강의 성품

송학선 선생은 1897년 2월 19일 서울 천연동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는 이름을 인수나 학선으로 불렀다. 학선이라고 부른 것은 배움을 좋아하고 매사에 학문과 선행을 일삼으라는 뜻에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가 말한 선생의 성격은 “성질이 본래 정직하고 청결한 것을 좋아해서 평소에 음식을 먹어도 깨끗한 것만 좋아했다”고 했다. 그 같은 평가와는 대조적으로 거사 이후 보여준 대담성과 침착성을 볼 때 외유내강인 강직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던 듯 하다.

선생은 13살 때인 1909년 서대문공립보통학교 1학년에 다니던 중, 아버지의 사업이 파산하는 바람에 가족들이 흩어지게 되었다. 아버지는 전라도로 연근 장사를 떠났고 선생과 동생도 집을 떠나야만 했다. 17살 때야 아버지가 돌아와서 가족들이 다시 모일 수 있었고 선생은 만리동에 있는 조선인쇄소에 취직했다. 그리고 20살 때인 1916년에는 서울 남대문에 있는 일본인 토다(戶田春藏方)가 경영하는 농기구회사에 취직했다. 선생은 여기서 발동기 운전과 수선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동생 삼학선도 같은 회사에 다녔다. 


일본인 직장에서 받았던 민족적 차별

선생이 반일 감정을 느낀 것은 매우 어렸을 때부터였다고 한다. 어느 날 친구들과 진고개에 놀러 갔다 우연히 하얼빈에서 침략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봤다. 이때 안중근의 의거에 대해 친구들과 얘기를 했고 그를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품었다고 한다.

선생이 본격적으로 반일의식을 가지게 된 것은 농기구회사에 있을 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가정 사정으로 취직했지만, 일본인 회사여서 차별을 받았고 병으로 강제 해고당하면서 그러한 의식이 더욱 뚜렷해졌을 것이다. 그 후 선생은 그 같은 반일의식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고자 안중근과 같은 거사를 실행하기로 결정했고 조선 총독을 목표로 삼았다. 총독을 제거함으로써 우리 민족을 억압하는 일제에 투쟁하는 것을 보여 주고 우리의 독립의지를 알리고자 했다.

거사를 실행하기 위해 신문이나 책 등에서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사진을 보고 그의 얼굴을 머릿속에 새겨두었다. 사이토를 처단할 칼을 구해 틈만 나면 칼을 갈면서 자신의 마음을 다지고 뒷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상대로 칼 꽂는 연습을 했다.


순종 붕어로 결심한 사이토 마코토 처단

1926년 4월 26일 융희황제가 붕어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비통함을 참을 수 없어 곧바로 창덕궁으로 달려가 망곡 대열에 참여했다. 융희황제의 빈소는 창덕궁에 마련되었고 빈소의 출입문은 창덕궁의 서남문인 금호문이었다. 선생은 그 문을 통해 총독부의 고관들이 출입하는 것을 보고 이곳에 총독이 반드시 올 것으로 생각했다.

총독을 처단하기 위해 칼을 품고 며칠간 기다린 끝에 4월 28일 1시쯤에 금호문 안에서 세 명의 일본인이 차를 타고 나오는 것을 봤다. 중앙에 앉은 자가 총독 사이토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던 차,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사이토 총독이다”라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선생은 바로 자동차 뒤를 따라가며 실행의 기회를 엿보았다. 금호문을 빠져나온 자동차는 창덕궁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아 잠깐 멈췄다. 선생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동차로 뛰어올라 총독이라고 생각한 자를 향해 전광석화같이 가슴과 배를 찔러 쓰러뜨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선생이 사이토로 생각하고 처단한 사람은 사이토 총독과 체격과 생김새가 비슷한 일본인민회 이사인 사토(佐藤虎次郞)였다. 선생은 사이토 총독을 처단했다고 생각하고 재빨리 차에서 뛰어 내려 재동 쪽으로 달아났다. 뒤에서 수십 명의 일경이 추격했다.


송학선 선생의 의거로 촉발된 6.10 만세운동

쫓아온 수 십 명의 일본 경찰들과 격렬한 싸움을 벌였으나 결국 머리에 상처를 입고 붙잡히고 말았다. 일경에 체포될 때까지 선생은 자신이 처단한 사람이 사이토 조선총독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심문를 받는 과정에서도 당당하게 심문을 받았다.

일제 경찰은 처음에는 단순한 살인사건으로 알았는데 사이토 총독 처단을 위해 자동차를 습격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놀랐다. 선생은 처단한 자가 사이토 총독이 아닌 데에 크게 실망했다. 검찰 심문이 진행되는 동안 선생에 대한 소문이 퍼져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재판을 받은 과정에서도 선생은 언제나 당당한 태도로 일제의 행위를 꾸짖고 의거의 동기를 밝혔다.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총독을 못 죽인 것이 저승에 가서도 한이 되겠다.”

사형을 선고받은 선생은 항소할 생각이 없었으나 가족의 만류에 항소했다. 변호사는 항소에서 사형만은 면하려 했으나 결국 사형을 판결받았고 1927년 5월 19일 오후 2시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아무도 모르게 사형이 집행됐다. 가족들은 유해를 찾아가라는 통지를 받고 선생의 사형 사실을 알게 됐다. 그의 나이 30살 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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