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순국선열 [2021/03] 건국훈장 독립장│김규식(金奎植)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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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에서 적군 섬멸
항일투쟁사의
빛나는 한 획 긋다
글 | 편집부
핵심공적 만주 왕청현 서대파에 설립한 연성사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북로군정서 대대장으로 청산리전투 승전의 주역이다. 주요약력 ● 1882년 1월 15일 경기도 양주 출생 ● 1930년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 1928년 고려국민당 군사부위원 ● 1926년 고려혁명당 중앙위원 ● 1925년 신민부 참여 ● 1931년 3월 23일 만주 주하현에서 피살, 순국 ●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의병항쟁 후 만주로 망명 무장투쟁으로 독립 추구 김규식 선생은 1882년 1월 15일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의병항쟁에도 참여했고, 북로군정서에서 대대장까지 역임하며 청산리전투에 참전한 사람이다. 김규식 선생은 의병활동과 더불어 만주지역 활동에서 볼 수 있듯 무장투쟁을 기본 수단으로 한 독립을 추구한 사람이었다. 선생은 대한제국의 장교로서 부위, 오늘날의 중위로 근무했다. 그에 관한 언급이 처음 나오는 자료는 1908년 의병항쟁에서다. 아마도 1907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당하자 의병항쟁에 뛰어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주요 활동지역은 강원도 철원 일대였다. 일제의 사료를 보면 1908년 4월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철원 지방을 횡행’하던 ‘전 육군참령 김규식’이 인천에서 체포되었다고 나온다. 활동지역으로 보아 양주 출생의 김규식 선생에 관한 설명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한때 감옥에 갇힌 적도 있다는 이야기다. 의병항쟁 중 부상을 당해 은신했다는 설명도 있다. 김규식 선생은 1912년 3월 만주로 망명한 이후, 몇 년간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김규식 선생이 만주로 건너간 이후 그의 행적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때는 1919년 북로군정서에서의 활동이다.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 전멸시킨 북로군정서의 주역 김규식 선생은 북로군정서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하면서 사관연성소의 교관으로 활동했다. 연성소는 1920년 9월, 289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졸업생의 대다수는 교성대로 편성되어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이동하던 중 화룡현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만나 접전을 벌였고 선생은 제2연대 제1대대장으로 청산리전투에 참전했다. 청산리전투 이후 일제는 만주 지역 한인기지촌의 민간인을 무차별 공격하였고, 독립군의 대부분은 일제의 공격을 피하고 러시아의 지원을 받기 위해 연해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활동하던 부대와 통합하며 사할린의용군이 만들어지는데 선생은 참모부원으로 임명된다. 하지만 자유시참변으로 인해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장기적 입장에서 독립군 인재양성에 주력 김규식 선생은 1922년 말, 목릉현 마교하에서 김좌진 이범석 등과 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국 지방관헌에게 무장 해제를 당해 영안현 영고탑에서 재기를 모색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주민들의 반발과 중국 지방관헌에 의해 다시 흩어질 수밖에 없어 선생은 동만주 지역으로 활동거점을 옮겼다. 1923년 5월 연길에서 고려혁명군이 조직될 때 총사령으로 활동하면서 경제활동과 군사활동을 동시에 하면서 장기적인 항일투쟁 운동기반을 마련해 나갔다. 만주 독립항쟁의 주류가 무장투쟁에서 자치적 독립항쟁으로 넘어가던 과도기 때였다. 고려혁명군은 대한군정서가 조직되자 흡수됐으며 김규식 선생은 대한군정서의 총사령에 선출됐다. 1925년 3월 대한군정서를 중심으로 신민부를 결성했다. 신민부를 비롯한 정의부와 참의부는 독립전쟁을 위한 조직이었다기보다는관할 구역 내에서 치안을 비롯한 사실상 자치기능을 수행하는 조직이었다. 그래서 무장활동 우선이냐, 자치가 우선이냐는 논쟁으로 군정파와 민정파로 갈리는 갈등이 생겼다. 김규식 선생은 그동안의 활동과는 다르게 2세를 교육해 장기적인 항일투쟁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입장에서 독립군 인재양성에 주력했다. 교육과 자치 활동에 집중하다 민족유일당 결성운동이 실패한 직후 김규식 선생은 연수현에서 교육과 자치 활동에 집중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생은 1930년 7월경 위하현에서 결성된 한국독립당의 부위원장으로 취임했다. 선생은 명예직에 가까운 비상임 부위원장이었으며 표면기관인 한국자치연합회의 간부도 아니어서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1년 3월경 선생은 한족자치연합회의 본부가 있던 주하현 하동농장을 방문했다. 지청천, 신숙 등과 만나 장래 운동을 협의하고 연수현에서 운영하고 있던 학교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하동농장에서 부정을 저지르던 백운봉과 최호 등은 김규식 선생이 자신들을 처벌하기 위해 왔다고 오해하여 선생과 일행이 머물던 한족자치연합회 주하지방 집행위원장인 이붕해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살해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52세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