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나는 삶 이야기 [2020/05] 광복회 임우철 원로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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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 원로회의 초대회장 임우철 애국지사
자주 독립 위해 몸 바친 삶
당신의 아름다운 역사를 기억합니다.
글 | 편집부
힘없이 생명을 빼앗긴 동포들을 보다 한창 꿈이 많을 시기인 스물한 살. 당시 임우철 지사가 바라본 조국의 현실은 암담하고 참담했다. 그 시절 우연히 보게 된 처참한 조선인의 처형 사진. 나무에 묶여 세워진 몸에 칼로 벤 머리를 달아맨 사진을 보며 몇몇 일본인이 서로 낄낄대며 웃고 있었다. 얼핏 본 또 다른 사진에는 작두에 목을 걸친 사람을 작두로 자르려는 장면이 담겼다. 청년이었던 임우철 지사는 처형이라는 명목으로 힘없는 조선인들의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일본인들의 태도에 머리 한쪽을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그즈음 일제는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조선을 통치하려 했다. 내선일체는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뜻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조선인의 정신을 말살하고 조선을 착취하고자 만든 구호였다. 그러나 조선인 처형 사진을 보며 조소하는 일본인의 모습에서 내선일체라는 문자에 담긴 의미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임우철 지사는 내선일체의 허구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임우철 지사에게 일본인이 왜놈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우연은 운명처럼…내선일체의 허구성 비판 그는 꿈이 컸다.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전문가로 도약하면 비록 일제의 감사 속에서라도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품었다. 일본 유학길에 오른 때가 1941년. 동경 공옥사고등공업학교 토목공학과 야간부에 입학하며 전문가의 길을 택했다. 하지만 참혹하기만 한 조선인의 처형사진을 보고 낄낄대던 일본인들을 본 충격은 그를 다른 길로 인도했다. 패망한 민족의 서러움이 하숙방 다다미로 스며들었다. 가슴속이 파랗게 멍든 것만 같던 나날을 보내며 방황하던 중에 동급생 박희준을 만났다. 박희준 역시 배움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살고자 유학에 왔다. 박희준은 독백처럼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반드시 기술을 배워 배를 탈거야. 그 배는 미국, 영국, 독일 등 유럽을 다녀. 마음에 드는 곳에 내려 공부도 하고 취직도 할 거야. 뭐든지 할 수 있어. 사업도 할 수 있고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서도 뭐든 할 수 있어. 몸이 아프면 나을 때까지 살펴줄 수도 있지. 생각해봐. 얼마나 행복해! 나는 꼭 배를 탈거야.” 박희준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은 청년 임우철에게 위로와 용기를 심어주었다. 그리고 임 지사는 같은 학교에 유학하고 있던 김명기, 김좌목, 김응춘 등 동급생과 함께 자주독립 의지를 고취하는 운동에 나섰다. 내선일체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모임을 결성하고, 졸업 후에는 한국인만의 회사를 설립해 민족자본을 육성했으며 공업학교의 교원이 되어 후학을 양성하고, 국어를 널리 보급했다. 더불어 궁성요배를 배척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1942년 2월 한국으로 송환되었다. 일제로부터 받은 잔인한 고문과 고통스러운 삶 한국에 송환되어 1943년 12월 전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과 불경죄’라는 명목으로 2년 6개월의 징역을 선고 받은 임우철 지사. 당시 그는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 일제는 한국인 동급생을 이름을 대라고 압박하며 물고문을 비롯한 온갖 매질을 감행했다. 거꾸로 매달기, 손톱과 살갗 사이로 대꼬챙이 찔러 넣기 등 말로만 들어도 참혹한 고문을 이어갔다. 청년 임우철의 열손가락은 성한 곳이 없었다. 찔리고 꺾이고 차이는 고통의 시간을 해방이 될 때까지 견뎌야 했다. 육신의 고통이 너무 지나치면 어지간한 다른 고통은 잊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고문의 기억은 너무도 잔인하고 끔찍해 되새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임우철 지사는 해방 후 풀려난 후에도 자녀나 친척 등 누구에게도 고문당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말을 꺼내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를 것 같아서다. 하지만 다시는 이러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있는 자리에서 성실하게…이 시대의 진정한 독립운동가 해방 이후에도 대한민국의 상황은 어지러웠다. 그는 한국전력, 대한중석 등 굴지의 기업에서 근무하며 토목전문가로서의 역량을 쏟아 부었다. 특히 1998년 4월에는 한국기술개발(주)의 광주 제2순환도로 공사와 비금도 철도교량 교각을 지휘 감독해 완성에 힘을 보태는 등 대한민국 토목 발전에 공헌했다. 그리고 2001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남다른 애국 애족의 발자취를 기리며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했다. 임우철 지사의 좌우명은 ‘타산지석 가이공옥(他山之石 可以攻玉)’이다. 다른 산에서 나온 거친 돌이라도 나의 옥(玉)을 가는 데 쓸모가 있다는 이 말은, 다른 사람의 잘못되거나 하찮은 언행이라도 자기 지식이나 인격을 닦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래서 임우철 지사는 항상 남을 함부로 비평하지 말고 겸손함으로 대하라고 조언한다. 그것이 자신이 겪어온 삶의 선언인 까닭이다. 100세를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꼿꼿하게 일상을 보내고 있는 임우철 지사에게도 여전히 남은 바람이 있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반민족행위로 승승장구했던 친일파들이 여전히 국립현충원에 묻혀 있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국립묘지안장법 개정을 촉구하는 임우철 지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바로 잡지 않으면 우리 후손들이 고생합니다. 또한 지금 우리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워지겠습니까?” 이처럼 임우철 지사는 여전히 독립정신의 끈을 놓지 않고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