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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2021/04] 건국훈장 대통령장│김익상(金益相)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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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바친 의열투쟁  


식민통치 심장부에 폭탄을 던지다


글 | 편집부


1921년 9월 12일 오전 10시 20분경 전기시설 수리를 한다며 조선총독부 청사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그는 2층에 올라가 폭탄을 던졌고 폭탄은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몰려온 헌병들에게 “2층으로 올라가면 위험하다”라는 말을 남기고 걸어 나왔다. 그가 바로 김익상 의사다.


  핵심공적

조선총독 처단 위해 총독부에 폭탄 투척 후 북경으로 탈출, 상해에서 일본 전 육군대신 처단 시도(황포탄 의거)로 사형을 선고받고 20여 년간 복역했다.


주요약력

●  1895년   서울 마포 출생

●  1919년   광성연초공사 근무

●  1921년   광성연초공사 봉천지점 기계감독

●  1921년   총독부에 폭탄 투척, 육군대신 처단 시도

●  1943년   일본 고등경찰 연행 후 암살로 추정, 

행방묘연,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가난한 청년의 삶을 바꾼 중국행


김익상 의사의 정확한 출생일은 알 수 없다. 다만 1922년 상해 황포탄 의거 당시의 나이가 28세로 보도된 사실을 고려하면 1895년생으로 생각된다. 의사의 본적은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로 지금의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이다.


성장 환경은 넉넉하지 못했다. 부친은 일본사람과 함께 목재 장사를 하다가 그에게 속아서 재산을 탕진했고, 그 때문에 다니던 삼호보성소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철공소 견습공으로 취직한다. 


1919년경에는 서울 교북동에 있던 담배 회사인 광성연초상회에서 근무하게 됐다. 인생을 크게 바꾸게 된 시기는 1921년이다. 그는 봉천지점의 기계감독으로 발령이 나 중국으로 가게 됐다. 어릴 때부터 비행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중국의 비행기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자금을 마련한 후 천진과 상해를 거쳐 비행학교가 있는 광동으로 갔다.


하지만 당시 광동의 호법정부는 북벌에 치중하느라 비행학교 운영을 일시 중지하고 있었으므로 입학하지는 못했다. 김익상 의사는 낙담하여 북경으로 갔다. 여기서 그의 인생을 크게 바꾼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만나게 된다. 


김원봉 만나 의열단 가입 

총독부 공격 위해 귀국


의열단은 1919년 11월 창단된 이후 본격적으로 대규모 파괴 투쟁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1921년에는 더욱 대담하게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 폭파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김원봉은 “조선의 독립은 2천만 민족의 10분지 8 이상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우리는 이때 선두에 나아가 희생이 됨이 마땅하다”는 말에 감복 받아 의열단에 가입했고 조선총독부 폭파 임무를 맡게 됐다.


김익상 의사는 1921년 9월 9일에 김원봉으로부터 폭탄 2개와 권총 2정을 건네받고 즉시 조선총독부 폭파 의거를 실행하기 위해 북경을 떠나 서울에 도착했다. 의사는 일본 경찰의 눈을 속이기 위해 아이를 데리고 가는 일본 여자와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면서 교묘히 부부행세를 하여 기차 안에서 검문을 피했다.

폭탄과 권총을 몸에 지니고 있어 여러 가지로 행동이 불편했지만, 남대문 역에서는 동행하던 일본 여자의 세 살짜리 아이를 안고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 서울에 도착한 뒤에는 아우 김준상의 집을 찾아가 하루를 묵었다. 다음날 아침 의사는 일본 전기 수리공 차림으로 남산 왜성대의 조선총독부 청사로 갔다.


조선총독부에 폭탄 던지고 

유유히 빠져나오다


  9월 12일 오전 10시 20분경 전기시설 수리를 위해 온 것처럼 대담하게 조선총독부 청사로 들어가 먼저 2층에 있는 비서과에 폭탄을 던지고, 이어 회계과에 폭탄을 던졌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폭발하지 않았으나 회계과에 던진 폭탄은 일시에 광음을 내며 폭발했다.


회계과에 던진 폭탄이 맹렬하게 폭발하여 15센티나 되는 깊이로 마루바닥이 파였고, 파편은 벽과 아래층으로 튀어 응접용 탁자가 부서지고, 유리창이 깨지고 여러 개의 책상과 걸상이 파손되는 등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 청사는 온통 아수라장이 됐다.


일제가 3·1 운동 이후 소위 ‘문화통치’를 펴 식민통치체제가 안정되어가고, 더 나아가 식민통치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감이 수그러져가고 있다는 선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렸다. 


범인을 잡기 위해 몰려든 헌병에게 의사는 “2층으로 올라가면 위험하다”는 말을 남기고 유유히 조선총독부 청사를 빠져나왔다.

의거 직후 의사는 이태원의 아우 집으로 돌아왔고 이튿날 평양으로 몸을 피했다. 여기서 다시 일본 의복으로 변장해 국경을 벗어난 뒤, 9월 17일에 북경에 도착하여 약산 김원봉을 만나 의거 사실을 보고했다.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사살 시도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선고


  조선총독부 폭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변화는 전혀 없었다. 김익상 의사는 재차 의거를 결심했다. 마침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필리핀을 방문한 뒤 3월 28일 상해로 온다는 보도가 있었고 의사는 다나카를 처단하기로 했다. 


3월 28일 오후 3시 30분에 오성륜과 김익상 의사 그리고 이종암이 차례로 다나카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의거 직후 오성륜은 현장에서 체포됐고, 의사는 추격하던 영국 경찰이 쏜 총탄에 맞고 중국 순경에 붙잡혔다. 이종암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


이송 중 오성륜이 감옥을 탈출하자 일제는 김익상 의사를 곧바로 상해에서 나카사키로 압송했는데 이는 탈출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김익상 의사는 재판정에서 “제2 김익상, 제3 김익상이가 뒤를 이어 나타나서 일본 대관 암살을 계획하되 어디까지든지 조선독립을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주눅 드는 바 없이 재판을 받았다.


결국, 김익상 의사는 나카사키 공소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의사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다시 20년 징역으로 감형되어 21년의 오랜 옥고를 치르고 2차 대전이 한창이던 때에 50세의 나이로 귀향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일본인 고등경찰이 연행해 가더니 어디선가 암살되고 만 것인지 종적이 묘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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