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나는 삶 이야기 [2021/04] 역사를 쓰는 올곧은 손, 소설가 박 도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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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역사는 꺼내어 알리고,
알려진 역사는 더 정확하게…
처연하고 숭고한 이야깃거리 가득
우리나라 근현대사, 활자로 살아난다
글·사진 | 편집부
일흔 중반을 넘은 나이에도 아랑곳없이 길을 걷고 또 걸으며 작가적 소임을 다하고 있는 그를 강원도 원주 치악산 자락에서 만났다. 그는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 끊임없이 길을 걷는 꿈, 민족의 역사가 그의 발길과 함께 나아가는 꿈을 말이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 허형식 장군을 만나고 식민과 분단, 독재와 이념의 장벽으로 가려져 알려지지 않은 비운의 영웅.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같은 경북 구미 출신이며 철길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 동네에서 태어났지만 행보는 현저히 달랐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제1호로 추서될 정도로 항일 운동에 앞장섰던 허위 선생으로 인해 일제의 핍박이 극심해지자 허 씨 일가들이 전부 만주로 망명했고 허형식 장군 역시 부친을 따라 만주로 이주했다. 그는 스물한 살 되던 해인 1930년 5월 1일 ‘5·1절 시위행진’을 계기로 항일운동에 전면 등장하게 된다. 당시 한인 청년 40여 명을 규합하여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을 습격하였다가 체포되면서 동북항일연군과 연을 맺게 된다. 26세에 동북항일연군 안에서도 뛰어난 지도자로서 자리매김하면서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큰 성과를 올렸다. 동북항일연군 지도자 조상지와 양정우 사망 이후 대부분의 대원들은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소련으로 도피했으나 허형식 장군은 또 다른 외세의 앞잡이가 되지 않겠다며 끝끝내 만주에 남아 일제와 싸우던 중 토벌대의 습격으로 전사했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박도 작가는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중 허형식 장군의 마지막을 적은 글을 보고 “한동안 눈을 뜰 수가 없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아직도 “그의 생을 되새기노라면 벅차오르는 감동과 가슴 아릿한 통증이 동시에 찾아와 홀로 그를 그리워하노라” 고백한다. 항일 파르티잔의 아름다운 일대기를 담다 박도 작가의 표현처럼 ‘곱고 깨끔한’ 귀공자 티가 나는 앳된 모습의 사진 역시 이 소설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알려진 바가 워낙 없어 소설을 표방했지만 책 말미에 ‘부치는 글’을 쓴 장세윤 박사는 “이 작품은 일반소설이라기보다는 실록, 전기에 가깝다고 본다”면서 “일부 픽션 부분은 사실 전개에 무리가 없는 내용으로 최소화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평했다. 아닌 게 아니라 박도 작가는 이 실록을 쓰기 위해 2000년 8월 다시금 답사 길에 올랐다. 하얼빈에서 중국 헤이룽장성 공산당자료실 김우종 실장과 동포 조선민족사업회 서명훈 회장을 만나 허형식 장군의 항일투쟁사에 대해 다시금 자세히 듣고 기록한 후 허형식 장군 순국 희생지를 찾았다. “현지에서는 허형식 장군 고향 출신 첫 참배객이라고 열렬히 환영해주었어요. 허형식 장군을 기억하는 동네 분도 만났지요. 기골 장대한 풍채로 늘 실탄과 비상식량을 두 어깨에다 엑스 자로 메고 다녔다는 이야기, 이따금 늦은 밤에 찾아와 밥을 부탁했던 이야기 등을 듣고는 그냥 떠나오기 섭섭하여 ‘허 장군 고향 사람이 60년 만에 갚는 밥값’을 드리고 왔어요.” 귀국 후 허형식 장군의 구미 임은동 생가와 유족들을 탐방했으나 고향의 생가는 폐허가 되었고 임은 허 씨 10여 가구 중 허호 씨만 고향에 남아있었다. “허형식 장군이 전사한 청봉령 들머리에 ‘허형식 희생지’ 기념비가 있고 인적 드문 그 길을 오고가는 중국 현지인들이 들꽃을 바치곤 해요. 경안형 중심지에는 그를 기리는 ‘형식 공원’이 건립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영웅을 기리는 마음이 만주 벌판에는 아직도 살아있는데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같은 구미 출신임에도 황산 허위 선생의 항일운동과 허형식 장군의 함자조차 몰랐다는 게 부끄러웠지요.” 여러 차례 허형식 장군의 이야기를 쓰고자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고 15년여의 세월이 흐른 후에야 ‘소설’이라는 형식의 ‘실록’이 탈고되었다. “1년 동안 독한 마음으로 집필했는데 다시 보아도 미흡한 점만 보였어요. 하지만 역사에 파묻힌 한 항일 파르티잔을 세상 밖으로 꺼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결국은 이렇게 활자화되었습니다.” 기자로서 다시금 써내려가는 이야기들 박도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준 역사는 『허형식 장군』뿐만이 아니다. 『항일유적답사기』를 시작으로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영웅 안중근』 등 소설, 실록, 답사기 등 다양한 형태로 출판되어 우리의 아프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게끔 하고 있다. 각각의 책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나 따뜻하고 뭉클한 이야기들이 뒤따른다. 『항일유적답사기』의 유일한 서평을 써준 정운영 기자와의 연을 시작으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예순이 넘은 나이, 이미 일선에서는 물러날 나이인데 오히려 갈망하던 ‘기자’의 꿈이 이루어진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게다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세상은 알수록 놀라웠어요. 글을 올리는 방식, 사진을 전송하는 방식들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댓글로 소통한다는 점이나 전 세계에서 실시간으로 기사를 읽을 수 있다는 건 정말 신기했지요. 늦깎이 기자로서, 작가로서 조금 더 의미 있는 글을 쓰고자 ‘의를 쫓는 사람’ 연재를 시작했는데 스웨덴 독자의 전화를 받고 얼마나 신기했는지. 그분에게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끈질기게 뒤쫓던 권중희 선생을 추천 받았어요.” 그렇게 추천 받은 권중희 선생을 인터뷰하면서 쓴 글은 추후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로 출판되기도 했다. “권중희 선생 인터뷰 말미에 마무리 말씀을 부탁드렸더니 ‘로또 복권에 당첨이 되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가서 백범 선생 암살에 관한 단서를 찾고 싶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그대로 기사에 담았는데 예상치 못했던 독자들의 폭발적인 피드백이 있었습니다.” 독자들의 모금이 시작되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혹여나 목표액에 이르지 못하면 교단생활을 정리한 퇴직금으로 다녀오자 굳게 마음도 먹었다. “첫 모금은 해당 기사 8회분 제 원고료 144,000원이었습니다. 그리고 모금 시작 2주 만에 총 952분의 3,745만 원의 성금이 모였고 권 선생의 왕복 항공권까지 받았어요.” 성공적인 모금이었다. 정확한 고증으로 독자와 만나는 작가이자 기자 김구 암살 배우 현지 조사팀이 조직되어 조사에 착수했고 이 여정은 또 다른 시작이 되어주기도 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의 숱한 자료 중 수천 장의 ‘Korean War’ 사진이 있었던 것. B-29기의 융단폭격 장면, 치열했던 시가지 전투, 전쟁고아들의 모습, 인민군 포로, 해방 직후 조선총독부 광장에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게양되는 장면, 첫 3·8선 등, 애써 복사해 온 사진들은 『지울 수 없는 이미지』라는 한국전쟁 사진집으로 발간되었고 이 책을 시작으로 『사진으로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지울 수 없는 이미지 2』,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등을 잇달아 발간했다. 특히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은 한국전쟁 사진 100컷에 문단의 원로 김원일, 문순태, 이호철, 전상국 선생 등 네 분의 한국전쟁 체험담을 수록한 책으로 꾸준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다. “새로이 장만한 스캐너 덕도 있었지만 나날이 늘어난 내 스캔 솜씨도 한몫 했다”고 웃으며 책을 쓰다듬는 박도 작가의 손길이 애틋하다. 『영웅 안중근』의 이면에는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60일간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뒤쫓은 노고가 담겨 있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 저격 꼭 100년이 지난 2009년 10월 26일 서울에서 출발해 속초에서 러시아 자루비토 행 동춘호에 탑승했다. 청년 안중근은 원산에서 배를 타고 출국했지만 북한 원산은 갈 수 없는 곳이기에 한 선택이었다. 연추하리 어귀 단지동맹비를 답사한 후 블라디보스토크로가 주변 안중근 유적지를 샅샅이 둘러본 뒤 하얼빈 행 열차에 올랐다. 꼬박 이틀간의 열차 여행은 상상과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화장실 사용료를 내야 하는데 루블화가 없어 환전을 위해 급한 볼일을 꼭 참고 뛰어다니고, 식당 칸이 없어 간식으로 준비했던 비스킷과 생수로 이틀을 연명했다. 말도 통하지 않으니 벙어리로 지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차를 탄 지 40시간 45분 만에 도착한 하얼빈에서 마중 나온 조선족 사학자 헤이룽장성 공산당사연구소 김우종 소장을 만났다. 그는 “평생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 답사자들을 숱하게 만났지만 블라디보스토크부터 곧이곧대로 열차를 타고 온 이는 처음 본다”면서 박도 작가의 열정에 감동해 꼭 마중을 나오고 싶었다고 했다. 하얼빈 역 의거 장소 답사를 시작으로 하얼빈 일본총영사관 지하실부터 일제감정기의 유적지, 뤼순 일대 항일유적지,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던 뤼순감옥, 러일전쟁 최대 격전지였던 이령산 203고지까지 답사한 후에야 안중근 의사 마지막 행장 답사기인 『영웅 안중근』이 나온 것이다. 박도 글방의 아름다운 책장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장편 소설 『약속』이 박도 작가가 평생 꼭 쓰고 싶었던 작품이었다면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독립운동가, 청년 안중근』, 『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 등의 어린이도서는 작가로서의 보람을 주는 책들로 존재한다. 1971년부터 2004년까지 33년간의 교단생활을 정리하면서 강원도 원주 치악산 자락에 터를 잡았다. 어릴 적 한학자로 천문지리에 조예가 깊었던 조부의 영향으로 늘 꿈꾸었던 작가의 꿈이 오롯이 서는 순간이었다. 어느새 치악산 자락 ‘박도 글방’의 책장에는 박도 작가의 책들이 빼곡하게 차 있다. 책 자체의 글들도 좋지만 그 책들 하나하나마다 담겨 있는 이야기들은 또 어찌나 재미있는지. 아직 더 채워가야 할 이야기들이 많다니 독자로서 기대가 된다. “독립운동가 1세대들은 조국이 통일되기 전에는 돌아오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안타까운 역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요. 그 이야기들도 풀고 싶고 최근에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를 준비하고 있는데 그런 따스한 이야기들도 담고 싶습니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여전히 말갛고 선명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올곧은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손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