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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2021/05] 건국훈장 대통령장│연기우(延基羽)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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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북부 의병전쟁 진두지휘 


용병술이 신과 같고 충국애민 놀라워


글 | 편집부


“우리가 연기우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렇게 참패하였노라 연기우는 3일 천기를 보는 사람이라 적을 맞아 패함이 없고 용병술이 신과 같아서 충국애민하는 지성이 참으로 놀라운데 우리 대한에 연기우 같은 사람 셋만 있으면 나라를 찾을 수 있다”

- 강기동 의병장의 연기우에 대한 평


핵심공적

대한제국군 강화진위대 부교로 복무하던 중 군대해산에 격분해 의병을 일으켜 이인영 등과 13도연합의진의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했고 경기북부 지방에서 의병으로 활동했다.



주요약력

● 일자 미상   경기도 연천 출생

● 일자 미상   강화진위대 부교(현 중사) 근무

● 1907년   무장 봉기

● 순국 일자 미상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강화진위대에서 근무하던 평민 출신 부교


  연기우 선생의 성장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진 바 없다. 경기도 삭령(지금의 연천)에서 태어나 대한제국군에서 강화진위대 부교(현 중사)로 근무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이 시기는 외세의 침략이 강해지고 일제의 식민지화가 진행되던 때였다.


강화도는 서울을 방비하는 최전선으로 배로 서울로 진입하려면 반드시 강화도를 지나게 마련이라 전략상 가장 중요한 곳이다. 실제로 이곳에서는 외세와의 전투가 여러 번 일어나기도 해 이곳에 배치된 연기우 선생은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일제는 1904년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토록 하더니 1905년에는 을사늑약을 체결케 한다. 광무황제는 헤이그에 특사를 보내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했으나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광무황제를 퇴위시킨다.


1907년 광무황제의 양위가 확정되자 서울에서는 대한제국군의 격렬한 반대시위가 일어났고 일제는 시위를 막는 동시에 한국을 완전히 식민지화하기 위해 대한제국군을 해산하기로 하고 정미7조약의 부속 각서에 대한제국군 해산에 관한 비밀각서를 교환한다.


대한제국군 해산으로

의병의 깃발을 세우다


  연기우 의병대장이 강화도에서 근무하던 당시에 서울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결국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군이 해산당하자 서울에서는 일본군과 시위대에 의한 교전이 일어났고 그 소식을 듣고 각지의 수비대들은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강화진위대의 연기우 선생도 이 소식을 듣고는 부하를 이끌고 일본군을 공격했다.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면서 강화도를 빠져나온 선생은 임진강 유역과 연천 보개산을 근거지로 삼아 의병 활동을 펼쳤다. 이 인근은 선생의 고향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리를 잘 알고 있으며 산악이 펼쳐져 있어 전략적으로도 유리한 위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의병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장기간의 의병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 기사에는 “연기우 대장은 지용을 겸비해 헌병과 교전하여도 패하는 바가 없어 헌병들이 감히 범접지 못하고 민간에 폐를 끼치는 일이 없어 인민들의 동요가 없었다”고 적고 있다.


서울진공작전 실패 후 

경기 북부 의병전쟁을 주도하다


  1907년 8월 군대 강제해산 이후 대한제국군 출신이 대거 의병에 참가하면서 의병의 전투력이 크게 올랐다. 당시 경기 지방 의병의 구심점은 허위와 이인영이었다. 연기우 선생은 허위 부대와 연합해 더욱 성과를 올렸다.


1908년 1월, 13도창의군이 서울진공작전을 펼칠 때 연기우 선생은 허위부대의 선봉으로 서울로 진격했다. 하지만 지원부대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해 전투 중 부상을 입고 후퇴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의병진영의 상징적 구심인 이인영이 부친상을 이유로 고향으로 내려가고 허위는 항쟁을 계속하다 1908년 6월에 일제에게 잡혀 교수형을 당하고 만다. 경기도 지방의 의병은 연기우 선생과 이은찬에 의해 재편되었는데 몇 달 후 이은찬이 일본군에게 잡히면서 중부 지방의 실질적인 의병활동은 연기우 선생에 의해 주도 된다.


일제는 연기우 선생의 뛰어난 전략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징세 수입에도 타격을 받고 있어 특히 주목하고 있었다. 일제의 수배지에 따르면 연기우 선생은 신장은 5척 4촌(약 162cm) 정도로 얼굴 왼쪽 관자놀이와 왼쪽 팔에 화상을 입었다고 한다. 평범한 조선식 복장에 붉은색 모자를 쓰고 권총과 검을 찼다는 증언도 있다.


일제의 경기 북부 총공세 

이후 행적 묘연


1909년 경기 북부의 의병전쟁은 몇 년간 일제와 격전을 벌인 연기우 선생과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하다 의병에 투신한 강기동에 의해 주도된다. 두 사람은 군인 경력을 살려 소규모 부대로 유격작전을 벌이거나 연합하여 대규모 작전을 수행하면서 일본군을 공격한다.


1910년 2월에 들어서자 일제는 한일 병합을 추진하고 이에 걸림돌이 되는 경기 북부 의병을 전멸시키기 위해 총공세를 펼친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의병장들은 만주나 러시아로 이동해 독립군으로 활동하기로 한다.


이때 강기동 의병장은 이동 중 원산에서 잡히고 만다. 강기동은 법정에서 임종 직전에 “우리가 연기우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렇게 참패하였노라, 연기우는 3일 천기(天氣)는 보는 사람이라 적을 맞아 패함이 없고 용병술이 신과 같아서 충국애민하는 지성이 참으로 놀라운데 우리 대한에 연기우 같은 사람 셋만 있으면 나라를 찾을 수 있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그 후 연기우 대장은 어디로 갔는지 어떤 활동을 했는지 기록이 없다. 1914년 6월 강원도 인제에서 아버지와 함께 체포되었다는 매일신보 기사가 있는데 재판기록이나 처형기록이 없어 오보일 가능성이 크다. 일제의 기록에서도 그가 블라디보스토크나 미국으로 망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만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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