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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전쟁과 의병장 [2021/05] 의병장 열전(5) │ 이진룡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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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출귀몰했던 광복회 만주사령부 초대 사령관  


“왜적 토멸하여 나라 구함이 업(業)”


글 │ 최진홍(월간 순국 편집위원)


광복회는 만주에도 사령부를 설치하여 초대 사령관으로 이진룡을 임명했다. 이진룡은 유인석, 우병렬 등과 국토회복을 위한 다각적인 방책을 강구하는 한편, 그해 9월에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자금을 조달하였다. 신출귀몰하는 이진룡을 체포하기 위하여 일제는 임곡(林谷)을 매수하였고 결국 1917년 5월 피체되어 이듬해 5월 1일 평양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구금 중에 직업을 묻는 일본 경찰의 물음에 이진룡은 거침없이 “왜적을 토멸하여 나라를 구함이 업(業)”이라며 의연한 기개를 보였다. 선생의 순국 소식을 전해들은 부인 우씨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부군의 뒤를 따랐다.


  오늘 나는 일제 강점기에 일어났던 사건 하나를 주목한다. 1916년 10월 5일 평안도 영변에서 운산금광으로 가던 현금 수송마차가 습격을 당한 사건이다. 이 습격으로 일본인 순경 등 7명이 살상을 당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 일은 바로 대한광복회가 독립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벌인 작전이었다.


대한광복회는 1915년 7월 대구에서 결성되었다. 1915년 1월에 윤상태 이시영 서상일 등 계몽주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결성한 조선국권회복단과 경북 영주 풍기의 광복단의 인사들이 통합하여 대한광복회가 창립되었다. 광복회는 창립을 주도한 박상진이 총사령, 우재룡이 지휘장, 채기중이 경상도 지부장을 맡았고, 각 도마다 지부를 두었다. 특히 만주에도 사령부를 설치하여 초대 사령관으로 이진룡을 임명했다. 1917년 5월 이진룡이 일제에 피체된 뒤에 2대 사령관을 맡았던 인물은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이다.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을 4대 강령으로 표방하는 광복회는 군사전쟁을 지향했다.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하는 시점에 맞추어 일제히 봉기함으로써 독립을 쟁취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금이 절실했다. 광복회는 1915년 11월 24일, 대구로 향하는 일제의 세금마차를 공격하여 8,700원을 빼앗아 군자금으로 사용하였다. 


다른 한편 광복회는 전국의 부호들을 상대로 군자금을 걷었다. 특히 친일 부호들에게 집중적으로 군자금을 할당했고,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가차없이 처단했다. 구한말 경상도 관찰사를 비롯해 요직을 두루 거친 장승원은 연간 7만 5천 석을 수확할 정도로 일제 치하 제일가는 부호 중의 한명이었다. 그런데 장승원은 1907년 허위가 의병을 일으켰을 때 제공하기로 했던 군자금 조달을 거부하고, 군자금 요구 사실을 일경에 밀고하는 등 친일행각을 서슴지 않았다.


장승원을 처단하기 위한 5번의 시도 끝에 1917년 11월 10일 밤 장승원의 집을 급습하여 그를 처단하였다. 다음해인 1918년 1월에는 충남 아산군 도고면 면장 박용하를 처단하였다. 그러나 박용하 처단 과정에서 광복회 조직이 일제에 드러났고, 박상진은 1918년 2월 1일 피체되었다. 그는 대구형무소에 갇혀 있던 중 1921년 8월 11일 사형 집행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운산금광은 1896년 외국에 헐값에 팔린 금광으로 대한광복회원들은 광산의 이익금을 환수하는 것은 빼앗긴 재산을 되찾는 정당한 행동이라 여겼다. 소수의 인원을 이끌고 대담하게 압록강을 넘어 일본경찰과 총격전을 벌인 인물은 바로 대한광복회의 만주사령관 이진룡이었다. 1918년 5월 1일 순국한 이진룡 의병장을 이제 월간 『순국』에서 만나본다.


유림가문에서 태어나 평산의병대 총지휘


1879년 황해도 평산군의 유림가문에서 태어난 이진룡은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의 문인인 우병렬(禹炳烈)의 사위가 되어 유학에 정진하였으며, 의암의 제자로서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을 바탕으로 한 항일 민족의식을 굳혀 갔다.


1905년 26세에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진룡은 고향인 황해도 평산에서 장인 우병렬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이 평산의병부대는 전 판관 우병렬이 중군장이 되어 실질적으로 부대를 총지휘하는 가운데 돌격장·유격장 그리고 7개 중대장들이 각기 소부대를 편성하여 운영하였다.


유학자들의 지휘하에 농민·포수 그리고 다수의 강화(江華)진위대의 해산군인들까지 참가한 수천 명의 의병이 황해도 각지에 분산 파병되어 일본군을 처단 공격하는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평산의병대 등이 황해지역을 장악하자 일제는 1907년 말(11월 4~13일) 탄압부대를 특별히 편성하였다. 탄압부대가 의병 압살에 나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고, 의병 측의 피해가 속출하였다. 1907년 말 유격부대장 유달수가 전사 순국하자, 평산의병부대는 이진룡을 유격부대장으로 추대했다.


평산의병부대는 각 중대장이 각기 2개의 소대·분대로 나눈 비교적 적은 병력으로 일본 침략군과 친일 무리를 응징하고 그 기관을 파괴하여 의병 항전의 고조기를 보게 되었다. 효과적인 대응책으로 40~50명의 적은 병력으로 산간에 의거하여 유격전을 벌임으로써 항전을 지속하여 갔다. 각처의 의병이 다 꺾이고 오직 황해도의 이진룡 평산의병부대만이 홀로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는 현상금까지 걸고 이진룡의 체포에 전력을 다하였다.


이후에 국내 항전의 여건이 악화되고 스승 유인석이 새로운 항전기지를 찾아 노령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으로 망명을 하자, 이진룡은 우병렬 중군장과 박기섭(정빈) 전 평산의병부대장 등과 함께 연해주로 건너가 무기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1908년 당시의 연해주에서는 이범윤, 안중근, 엄인섭 등이 지휘하는 의병부대가 국내진공작전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에 크게 고무된 이진룡은 새로운 항일의병작전계획을 수립하고 또 군자금과 신무기를 구하여 귀국한다.


이후 이진룡은 전보다 강화된 무장의병부대를 편성하여 일제 침략군과 맞서 싸워 일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1909년 5월 연기우, 김수민, 하상태, 한정만, 이인순, 정용대 등과 더불어 동으로 철원·평강에서, 서쪽으로는 평산·백천 등 3도를 왕래하면서 활동하던 이진룡은 1909년 8월 재차 연해주에 건너갔다.


이진룡은 그곳에서 활약하던 유인석, 우병렬 등과 국토회복을 위한 다각적인 방책을 강구하는 한편, 그해 9월에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자금을 조달하였다. 1909년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계획은 안 의사 혼자서 한 일이 아니었다. 안 의사의 의거와 관련된 내용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의병연구가인 이태룡 박사가 새롭게 발굴한 자료 <의암유선생약사(毅菴柳先生略史)>에 의하면, 안의사가 하얼빈 의거를 할 때, 유인석 도총제로부터 격려를 받았고, 거사에 사용했던 권총은 이진룡 의병장의 것이었다. <의암유선생약사(毅菴柳先生略史)> 의암의 아들 유해동이 부친과 함께 생활했던 바를 기록한 글이다.


1909년 즈음, 일제의 간계로 연해주 동포사회의 지도자 사이에 반목이 심화되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1909년 6월 연해주 의병 연합체 13도의군이 유인석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그리고 유인석은 이범윤, 이남기, 이상설, 정재관 등의 추대로 13도의군도총재에 올랐다. ‘13도의군’은 연해주지역 의병연합체이고, ‘도총재’는 ‘으뜸 총재’라는 뜻이다.


안중근은 거사 후 이진룡(일명 이석대) 의병장이 권총과 여비 130~140원을 마련해 준 일에 대해서, 평안도에서 온 이석산이란 자에게 권총으로 위협하여 빌린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는 당시에 무기구입을 위해 연해주에 왔던 이석대 대신에 이석산이란 가명으로 말한 것이라고 이태룡 박사는 설명한다. 

주지하듯이 안중근은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그런데 이는 안중근이 의거 뒤에 일본관헌에 조사를 받으면서 13도의군을 숨기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대한의군’이라 했다는 것이다. 


신무기를 확보하여 연해주에서 1909년 11월경 귀국한 이진룡의 평산의병부대는 더욱 강성하게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열차운송 저지 항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10년에 경의선의 계정과 잠성(岑城) 사이의 철로를 파괴하고, 평산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이 전투에서 10명의 부하가 체포되었다. 이후 개성과 해주, 서흥(瑞興) 등지에서 5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군 보병 7중대 및 기병과 접전하였고, 이때 100여 명의 의병이 체포되었다. 

이러한 이진룡 등 황해 평산의병부대의 항일 의병무장투쟁에 불안하고 초조해진 일제는 1911년 9월 하순부터 11월 초순에 이르는 약 한 달 간에 걸친 ‘탄압’을 자행하여 250여 의병이 희생을 당하게 되었다.


나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대동(大同) 정신 구현


사실 이진룡이 참여했던 13도의군은 연해주뿐만 아니라 국내에까지 그 조직을 확대하여 항일의병을 하나의 조직체계로 편성하고 일시에 대규모의 항일전을 준비하려는 구상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이 13도의군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그 규모의 방대함만이 아니다. 종래 의병항쟁과 노선을 달리했던 애국계몽계열의 구국운동과도 공동전선을 기획했다는 점을 우리 역사가 놓치면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역사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이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며 삐걱거려 왔다. 이승만과 김구를 두고 벌여온 논쟁을 보면서 분열과 갈등은 어쩌면 우리 민족이 가진 슬픈 속성은 아닌지 자조적(自嘲的)인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이진룡 등의 삶을 보면 우리의 생각을 달라질 수 있다. 앞에서 본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은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을 현장에서 경험한 인물이다. 신해혁명을 이끌었던 손문을 직접 찾아가서 대한의 독립을 위한 도움을 청하기도 하면서 전제군주제가 타도되고 공화정이 들어서는 것을 목격했다. 

반면 이진룡의 스승 유인석은 복벽주의(復辟主義)를 주장했다. 복벽주의는 나라를 되찾고 군주정을 회복하려는 사상을 말한다. 하지만 박상진과 이진룡은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대동(大同)의 정신을 구현해 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13도의군은 편성되어 미처 활동을 개시하기도 전에 1910년 8월 29일 국망을 당하면서 해체되고 만다. 이제 이진룡은 독자적으로 대일항전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이진룡은 1911년 10월에 부대의 지휘권을 중대장 한정만에게 위임하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 서간도로 망명하여 장백현(長白縣) 무송(撫松)에서 후에 만주 독립군의 모태가 된 포수단을 조직하고, 교포 이주민들에게 광복사상을 고취하였다. 


이진룡이 다시 계몽운동과 의병세력의 만남을 꾀한 것이다. 포수단을 조직함으로 의병의 투쟁을 이어나갔고, 이주민들에게 광복사상을 고취함으로 계몽사상을 이어간 것이다. 이러한 이진룡의 계몽운동과 의병세력이 만나 일제를 쫓아내고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투쟁했던 실천적 독립투쟁은 독립군과 광복군을 거쳐 대한민국 국군으로 연결되었다.


옥중에서도 기개 넘쳤던 항일투사


이제 이 글의 서두에서 소개한 운산금광 현금수송마차 습격 사건을 다시 서술한다. 1916년 10월 5일 이진룡은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조맹선·황봉운(黃鳳雲)·황봉신(黃鳳信)·김원섭(金元燮)·김 일(金鎰)·김효선(金孝善)·한치현(韓致賢) 등과 함께 완전무장을 하고 압록강을 건너 영변군 팔원면 용성동(龍城洞)의 밀림 가운데 잠복 대기하고 있었다. 


상례대로 송금마차가 2번에 서고 경비차가 그 전후에 따를 것으로 예상하고 2번 마차를 기습 공격하였는데, 일제의 마차 배치순서를 바꾸는 위장술로 말미암아 자금 확보는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일제의 추적을 따돌리고 전원 무사히 만주기지로 돌아옴으로써 애국투사의 의기를 만천하에 과시하였다.

신출귀몰하는 이진룡을 체포하기 위하여 일제는 임곡(林谷)을 매수하였다. 임곡은 의사 노릇을 가장하고, 중국 경내 압록강 일대를 3년간이나 조사하여 이진룡의 거처를 탐지하였고 결국 이진룡은 1917년 5월 피체되고 말았다.


피체 소식을 들은 황봉신·황봉운 등 10여 동지들이 요동 여순으로 압송되는 이진룡을 구출하고자 호송대를 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황봉신과 황봉운까지 피체되고 만다. 그후 창성(昌城)헌병대를 거쳐 평양감옥에 갇혔다가 1917년 12월 1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이듬해 5월 1일 평양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구금 중에 직업을 묻는 일본 경찰의 물음에 이진룡은 거침없이 “왜적을 토멸하여 나라를 구함이 업(業)”이라며 의연한 기개를 보였다. 아울러 부하 황봉운 등을 석방시키기 위해 “나는 자발적으로 거사를 도모하였으되 여타인은 강제로 끌려 왔다”고 하며 그들의 처형의 부당성을 역설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함께 순국하였다.


1918년 5월 순국 직전 교회(敎誨)를 하는 전옥에게 유연한 웃음을 지으며 말하기를 “그런 말은 귀가 닳도록 들었은즉 얼른 사형이나 집행하라”고 하며 태연하였다.

전옥이 유언을 묻자, “유언이라고 지금 새삼스러운 말은 하기 싫으나 장남에 대하여 나 죽은 뒤에 나에게 큰 은혜 있는 선생[유인석]의 사당에 참례하여 아비 죽은 것을 고(告)하라고 전하여 달라”고 말하고는 웃으며 교수대(絞首臺)에 올라 죽음을 맞으니, 향년 40세였다. 유해는 고향인 평산군 신암면 장동리에 안장되었다.

선생의 순국 소식을 전해들은 부인 우씨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부군의 뒤를 따랐다. 우 부인은 옥중의 부군(夫君)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 몸도 곧 목숨이 다할 것이온즉 그때에 낭군의 묘 곁에서 뵈오리다”하며 그러한 뜻을 피력한 바 있었다.


 1919년 3월 관전현 청산구 이웃 중국인 주민들이 의(義)를 숭상하고 절(節)을 지키는 이진룡과 우 부인의 충성과 절개에 감복하여 의열비(義烈碑)를 세웠으니 그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朝鮮義士 李公鎭龍  

조선 의사 이진룡과 

烈婦禹氏 倂同取熊  

열부 우씨 두 분 모두 겨레 위해 순국하니  

夫爲國死 文山之忠  

나라 위해 죽은 남편 문산(文山)의 충성이며

婦爲夫殉 洪室之風  

남편 따라 순절 부인 홍실(洪室)의 가풍일세

日沈月開 鳳翔凰翔  

지는 해 뜨는 달에 봉황새가 날아가니

忠烈相資 吾道之光 

충성 절개 함께가는 우리 도는 영원하리 

(번역은 필자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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