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순국선열 [2021/06] 건국훈장 독립장│윤세주(尹世冑)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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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들 구하기 위해
일본군 유인하다 순국
조선의용대 지휘자
글 | 편집부
일본군은 3만여 명의 병력으로 태항산을 완전히 포위해 전차와 폭격기를 동원해 폭격을 가했다. 윤세주 열사는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일본군을 유인하다가 총탄에 맞고 쓰려졌다. 중상을 입은 열사는 결국 6월 3일 숨을 거두었다. “단결해서 적을 사살하기 바란다”는 말이 동지들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조선의열단 창설에 참가하고 조선의용대를 이끌며 항일 무장 투쟁에 앞장섰다. 주요약력 ● 1901년 6월 24일 경상남도 밀양 출생 ● 1919년 조선의열단 조직 ● 1938년 조선의용대 창립 ● 1942년 중국 태행산에서 일본군과 대격전 ● 1942년 6월 3일 태항산 전투에서 전사, 순국 ●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 비밀결사단체 연무단 조직 윤세주 열사는 1901년 6월 24일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성품은 겸손했으나 일본 식민지통치에 대해서는 평생을 저주할 만큼 애국심이 깊었다. 열사가 고작 10살밖에 안 됐던 1910년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하기도 하고 초등학교 때 일왕 출생 기념일에 받은 일장기를 변소에 버렸다고 했으니 일제에 대한 증오와 반감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열사는 밀양의 사립 동화중학에 입학하면서 항일 인사였던 김홍표 교장의 애국사상에 감화되어 학교 내에 비밀결사인 연무단을 조직했다. 연무단은 당시 금지됐던 개천절 기념행사를 하고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동화중학은 폐쇄됐으나 열사의 애국심은 식지 않았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한 그는 만세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 사람들을 모았다. 13일 오후 1시쯤 수천 명이 모인 장터에서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동료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경찰은 만세운동을 주도한 열사를 잡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열사는 만주로 망명했고 일본은 그해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피고가 없는 궐석재판으로 진행됐다. 그 일에 관련된 사람 중에서 열사가 가장 높은 형인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중국 길림에서 김원봉 등과 의열단 창립 만주로 망명한 윤세주 열사는 요녕성 유하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갔다. 신흥무관학교는 당시 국내의 독립항쟁 비밀단체인 신민회의 결의에 따라 세운 독립군 양성 무관학교로 선생은 이곳에서 정식으로 군사훈련을 받았다. 구체적인 항일 방법을 찾던 열사는 친구 김원봉과 동료 13명과 함께 1919년 11월, 길림에서 조선의열단을 결성했다. 의열단은 조선총독부 등 일제 침략기관 파괴와 원흉들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고 실행을 할 인물을 물색했다. 열사 본인이 직접 나서 신철휴, 윤치형 등과 함께 국내에 들어와 활동을 시작했다. 파괴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 자금과 정보를 모으던 중 정보가 누설되어 국내의 동지 50여 명과 함께 잡혀 수감됐고 5년 4개월의 감옥 생활을 하고 1927년 출옥했다. 그 후 중외일보 기자, 경남주식회사 사장 등으로 지내며 독립항쟁에서 손을 뗀 것처럼 조용히 지내다가 1932년 여름 일제의 눈을 피해 중국 남경으로 갔다. 그 후 열사의 독립항쟁 방법도 바뀌었다. 열사가 “과거에는 열정과 용기만을 갖고 싸웠으나 앞으로는 혁명적 인생관과 과학적 혁명이론으로 재무장, 정확한 혁명운동을 하겠다”는 말에서 알 수 있다. 한국대일전선 통일연맹 결성 열사는 이 단체에서 송병조, 김두봉, 김규식, 윤기섭, 최동오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됐다. 이 단체는 1933년 7월 5일 독립항쟁가들이 소망하던 단일정당인 민족혁명당을 탄생시키는 모체가 됐으며 열사는 이 단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독립군의 통합만으로는 일제와 싸우기가 힘들어 독립군은 중국의 무장단체와 협력한다. 1938년 10월 10일 무한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된다. 열사는 이곳에서 핵심부서인 편찬위원회의 주편에 임명돼 기관지 「전고」를 발행해 선전공작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독립항쟁의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고 전세는 일본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갔다. 독립항쟁을 적극적으로 협력해주던 중국 국민당 정부도 1938년 10월 25일 무한이 일본군에 함락되면서 자신들 앞가림만으로 급한 처지가 됐고 조선의용대는 계림으로 이동했다. 일본군 유인하다 장렬히 전사하다 열사가 태항산에 도착하자 팔로군은 홍복사를 조선의용대 본부 건물로 제공했다. 도착한 다음달에 이곳에 조선의용대 간부훈련반, 화북조선청년학교를 개설했다. 팔로군과 함께 항일 무장활동에 열중한 열사는 모든 대원에게 존경받고 중국인들도 신뢰하는 지휘자가 된다. 1942년 5월 24일 화북지방에 있던 일본군은 주력군 3만여 명을 이끌고 팔로군을 일시에 제거하겠다는 계획으로 태항산을 공격했다. 전차와 폭격기의 공격이 가해지는 가운데 윤세주 열사는 대원들과 함께 산으로 올라가 일본군을 비무장 대원들을 엄호하며 포위 돌파를 시도해 작전개시 5시간 만에 탈출로를 확보했다. 3일 뒤 산속을 지나던 조선의용대는 일본군과 맞닥트리게 된다. 열사는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진광화 최채와 함께 일본군을 유인하다가 총탄을 맞고 쓰려졌다. 중상을 입은 열사는 결국 6월 3일 숨을 거두었다. “단결해서 적을 사살하기 바란다”는 말이 동지들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윤세주 열사는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