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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2021/06] 건국훈장 대통령장│채상덕(蔡相悳)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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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 위해 인재양성에 몰두  


항일 독립투사의 정신적 아버지


글 | 편집부 


고구려의 수도가 위치한 길림성은 독립군이 활발하게 활동한 지역이다. 이곳에서 채상덕 선생은 후사를 기르며 독립을 준비했다. 1895년 의병에 참가한 선생은 1920년대가 되자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일선에서 물러나 이수흥, 최석순 등의 독립투사를 양성했다.


핵심공적

만주지역 독립단체 통합 조직인 대한통군부 총장, 대한통의부 부총장으로 활동하며 독립항쟁을 주도하고 독립투사를 양성했다.


주요약력

● 출생 미상

● 1895년   을미의병 참여

● 1922년   대한통군부 초대 총장, 

  대한통의부 초대 부총장

● 1925년   일본경찰의 기습으로 자결, 순국

●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을미의병에서부터 시작된 항일 의지


  채상덕 선생은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났다는 것 이외에 성장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유학을 공부하던 그는 1895년 명성황후 살해와 이후 내려진 단발령으로 충북 제천에서 시작해 전국적으로 항쟁을 시작했던 을미의병 때 의병으로 참여했다.


을미의병은 고종이 내린 해산령으로 상당수가 해체됐는데 채상덕 선생도 그때 고향으로 돌아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기록에만 없을 뿐이지 계속 항일항쟁을 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는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자 남만주로 건너가 독립항쟁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그 후 채상덕 선생은 본격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1905년부터 철도 시설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군벌과 연합해 만주에서의 세력을 산해관 안쪽인 요동까지 진출해 본격적인 만주 지배를 시작했다.


선생은 일본군의 만주 출병을 보고는 분산된 독립군을 통합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독립군은 만주 각지에 흩어져 활동했으며 일본과 대항한다는 것 이외에는 사상도 이념도 체계도 전혀 다른 각자의 조직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래서는 독립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만주 각지 분산된 독립군 통합 위해 노력


1922년 남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대한독립단, 벽창의용대, 광복군총영, 광한단, 보합단 등 각 군단의 대표들이 압록강 인근인 관전현(寬甸縣, 단둥시 인근)에 모여 남만통일회의를 개최했다.


회의를 거듭하여 1922년 2월에 대한통군부가 조직되고 채상덕 선생은 최고 책임자인 총장에 취임했다. 하지만 대한통군부에 참여하지 못한 독립항쟁단체들이 많아 그해 여름에 다시 통합운동이 전개된다. 


1922년 8월에 남만한족통일회가 개최됐다. 이 회의에서 6개 항목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통군부는 정부조직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며 대한통의부로 이름을 바꿨다. 선생은 여기서 부총장으로 활동한다. 하지만 통의부는 간부 간의 순조로운 발전을 보이지 못하고 시작 초기부터 분열의 조짐을 보였다. 


분열의 발단은 국내에서 온 양기탁, 전덕원과의 인사와 조직 등의 문제에 따른 의견 대립으로 생긴 불화에서 비롯됐다. 


복벽주의 단체인 

의군부에 참여


  이 일은 단순히 두 사람 간의 개인적인 문제나 인선, 조직 등의 표면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1920년 이래로 계속되어 온 공화적 민주주의 계열과 복벽적 민족주의 계열의 이념투쟁이 밑바탕에 깔려있었다.


공화제를 주창해 민주정부를 수립하려는 신파와 조선왕조를 복구해 대한제국을 부활시키려는 구파의 대립이었던 것이다. 연호를 뭘 쓰느냐 하는 문제로 대립했다는 기록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전덕원은 참모부 감독에 선임되었으나 공화주의적 정치노선에 반대하여 취임을 거부했다. 그런 가운데 제5중대장 김명봉과 부대장 조태빈이 통의부를 불신한다는 혐의로 피살되고 제5중대의 무기가 타중대에 의하여 강제로 압수되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덕원은 1923년 2월 왕조 재건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항일군단인 의군부를 조직해 대한통의부에서 분리를 선언한다. 채상덕 선생은 의군부 총장으로 활동했는데 유학자로 1895년 을미의병에 참여했던 만큼 그가 조선왕조의 복원을 원하는 복벽주의자였던 것은 당연할 것이다. 


후대의 독립항쟁 위해 

젊은 독립투사를 키우다


의군부는 융희 연호를 사용하고, 통의부를 적대시하며 통의부에서 관할하던 각 지방을 점령하고 항일활동을 전개했다. 채상덕 선생은 의군부 총재로 취임했으나 금방 은퇴했다.


이후 선생은 참의부 활동에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참의부는 대한통의부의 분열 상황에서 만들어진 임시정부 산하의 직할 부대다. 당시 선생은 “나는 늙고 기력이 쇠퇴하여 활동할 수 없으니 장래가 있는 청년들에게 독립을 위해 일해 달라”며 후대 양성에 힘을 기울였고, 참의부 간부 중에 선생의 제자와 부하들이 많았다.


참의부는 무장독립항쟁단체로 일제에 대한 파괴 활동과 함께 5월 19일에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이 국경지방 치안상태를 시찰하기 위해 경비정으로 압록강 하류로 내려올 때 이를 기습 공격하기도 했다. 1925년 3월 16일에 만주 집안현(輯安縣) 고마령에서 간부 회의를 하던 중에 밀고자에 의해 위치가 발각되어 일본 경찰대에게 습격을 받아 간부 29명이 전사하는 막대한 희생을 당했다.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이수흥으로부터 소식을 들은 선생은 분통을 감추지 못하고 “내 부하가 다 죽었으니 나 혼자 살아 있으면 면목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며 이수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결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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