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 People

의병전쟁과 의병장 [2021/06] 의병장 열전(6) │ 이은찬 의병장

페이지 정보

본문

경기북부 연합의병 결성해 대규모 연합작전 펼쳐  


“나의 거의(擧義)는 동양 평화를 위함이니”


글 │ 최진홍(월간 순국 편집위원)


이은찬은 국내 의병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만주 간도지방으로 항일운동의 거점을 옮겨 군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이때 밀정이 과거 동지였던 조수연을 보내어 유인해 내도록 하였다. 함정에 걸려든 이은찬은 그만 체포되고 말았다. 이은찬은 재판정에서도 늠름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내가 너희와 싸우기를 대소 40여 차례 하였으며, 너희 병정 470여 명을 참살하였으니 빨리 죽여라. … 나의 거의(擧義)는 홀로 한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양 평화를 위함이니, 오늘에 이르러 어찌 자신의 영욕(榮辱)을 생각하랴.” 결국 1909년 5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했다.   


  지난 세기 초반, 기울어가는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강탈 당한 주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다각적으로 외교적 노력을 경주한 바 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한국정부도 평화회의 주창자인 러시아 황제 리콜라이 2세로부터 비밀리에 초청장을 받았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 당한 상황이었기에 본회의에는 참석할 수 없었지만, 각국에 한국의 사정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고종은 일제의 폭력적 침략을 호소하고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기 위해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과 전 평리원검사 이준, 그리고 전 주러대한제국공사관서기관 이위종을 특사로 임명하여 네덜란드에 파견하였다. 일제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1907년 6월 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 일행은 만국평화회의 참석할 자격을 얻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미국·영국·이탈리아·프랑스·독일·러시아 등 각국 위원들에게 면회를 요청하였으나 모두 만날 수 없었다. 결국 이들은 본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각국 기자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일제의 만행과 한국에 대한 불법적인 침략상황을 폭로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일제에 보고되자 통감 이토는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불러 힐책하며 사건의 책임을 고종이 져야 할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 대신들은 연일 고종이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협박하며 강요하였다. 고종은 결국 1907년 7월 20일 순종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순종 즉위 4일 뒤인 7월 24일 밤에 이토와 이완용은 7개 조항의 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1905년 11월에 외교권을 강탈 당한 데 이어서 내정권도 빼앗기고 말았다. 이 조약은 ‘비밀각서’ 하나를 별도로 체결했는데, 그 내용은 군대해산, 각부 차관의 일본인 임용, 통감부의 사법부와 경찰권 장악 등이었다.


순종은 7월 24일, 법률 제1호 <신문지법(新聞紙法)>을 반포한다. <신문지법>은 신문 발행 허가제, 신문 사전 검열제. 벌칙으로 발행 정지권과 시설 몰수권 등을 규정했다. 27일에는 집회와 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保安法)>을 반포하였다. 이어서 7월 31일에 순종은 조령(詔令)를 내려 군대를 해산하였다. 근대 해산에 대한 순종의 변은 다음과 같다.


“짐(朕)이 생각건대 국사가 다난한 때를 만났으므로 쓸데없는 비용을 극히 절약해서 이용후생의 일에 응용함이 오늘의 급선무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현재 우리 군대는 용병(傭兵)으로 조직되었으므로 상하가 일치하여 나라의 완전한 방위를 하기에는 부족하다. … 군대를 해산할 때 인심이 동요되지 않도록 예방하고 혹시 칙령을 어기고 폭동을 일으킨 자는 진압할 것을 통감(統監)에게 의뢰하라”


순종은 등극한 뒤에 가장 먼저 군대해산에 따라 예상되는 국민의 반발에 대처하는 악법을 공포한 뒤 8월 1일 먼저 시위연대 5개 대대를 해산시키고 이어서 지방의 진위대 8개 대대를 해산시켰다. 해산되기에 앞서 그 내막을 눈치 챈 군인들은 무기를 가지고 항일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군대 해산은 의병 진영의 군사적 조직화에 박차를 가했고 의병의 국민적 봉기의 계기가 되었다.


대한제국 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은 강제 해산 소식을 듣고 “군인은 국가를 위하여 경비함이거늘 이제 외국이 침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홀연히 군대를 해산하니 이는 황제의 뜻이 아니오 일제가 황명을 위조함이니 내 죽을지언정 명을 받을 수 없다”며 권총으로 자살한다.


박승환의 자결을 계기로 해산군인들이 서울, 원주, 강화 진위대 등지에서 무장봉기하여 각지의 의병부대에 합류한다. 정미의병의 본격적인 확산은 8월 2일, 원주진위대의 봉기로 시작된다. 8월 2일 원주진위대 군인들이 일제히 무기고를 점령한 뒤 그곳 민병과 합세하여 원주시를 장악하였다.


다음으로 강화분견대 군인들이 8월 10일 대일항전에 나서 한때 강화성을 장악했지만 일본군의 맹공을 받고 와해되었다. 홍주분견대는 집단탈영을 시도하여 의병대에 합류를 시도하였고, 진주진위대도 봉기계획을 추진하였다. 이처럼 각처에서 봉기한 해산군인들은 이후 각자 의병에 가담하여 의병항일운동의 주축이 되었다.


이와 같이 의병항전이 격렬해지면서 각 의병진영에서는 서울 진격을 모색하게 되었다. 마침내 1907년 11월, 각 도의 의병부대는 경기도 양주로 집결하여 전국 의병 연합체인 13도 창의군을 편성해 서울 진공 계획을 수립했다. 연합 의병체로서 ‘13도 창의대’가 형성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월간 <순국> 6월호에서 만나 볼 이은찬 의병장이다.


 박은식의 『한국 독립운동 지혈사』에 따르면, 이때 의진을 편성하고 각 군의 장령(將領) 임명은 모두 이은찬이 한 것이다.(이태룡, 찾아가는 경기·인천의병) 이은찬은 강원도 원주군 부흥사면(현 원주시 판부면)에서  1877년에 태어났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19세에 이미 경상도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관군의 공격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산했다.


 10년이 지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다시 의병을 일으켰던 이은찬은 1907년 9월에 이구재(李九載·求采)와 더불어 기병하여 강원도 원주 일대에서 활약했다. 이들은 일부 해산병을 중심으로 의병 500명을 모집한 후 경북 문경으로 이인영을 찾아갔다.


   경기도 여주 출신인 이인영은 높은 학문으로 이름이 원근에 알려진 유학자로 많은 문인이 추앙하던 인물이었다. 27세인 1895년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여주에서 5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춘천과 양구 사이에서 일본군과 30여  차례 격전을 벌였고, 유인석이 이끄는 호좌의진과 호응하여 의병투쟁을 벌였으나 국왕의 의병해산 선유에 따라 의병을 해산한 바 있었다. 


 이은찬은 이구채와 함께 이인영을 지휘자로 모시기 위해 권유하였지만 이인영은 부친의 병이 깊은 때여서 선뜻 허락하지 못했다. 그러자 이은찬은 4일간이나 머물면서 간청하였다. “천붕지복(天崩地覆)의 오늘의 화를 당하여 국가의 일이 급하고 부자(父子)의 은혜가 경한데 어찌 사사로운 일로 공사를 뒤에 하리오.” 이은찬의 권유에 이인영이 이를 수락하자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니, 호응하는 의병이 몰려들었고, 마침내 관동창의소 의진을 형성하였다.


이인영 등은 곳곳에 격문을 보내 일제는 인류의 적이므로 분쇄하여 조국의 국권을 찾자고 호소하는 한편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도 통문을 보냈다. 특히 ‘고재상항동포(告在桑港同胞)’라는 격문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 전명훈 의사가 친일 미국인 스티븐슨을 저격케 하는 데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국내외에 배포된 격문은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구국의 의지를 고조시켜 수많은 우국지사가 이 격문에 감동하여 의병에 참가하였다. 하지만 지방에서 아무리 일제와 싸운다 해도 일군이 서울을 장악하고 있는 한 국권회복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전국의 산발적인 의병진을 대규모 연합의병부대로 편성하여 통일된 지휘 아래 서울로 진격, 일거에 일군을 패퇴시키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1907년 11월 각 의병대장에게 경기도 양주로 집결할 것을 촉구하였고 이어 ‘13도 창의대진소 원수부’를 설치하고 의병장들의 만장일치로 이인영이 총대장이 되었다. 1908년 1월 이인영은 먼저 각국 공관에 의병부대를 국제공법상의 전쟁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격문을 보내는 한편, 군사장 허위가 이끄는 300명의 선발대가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하여 일본군과 혈전을 벌였으나 후속부대의 지원이 없어 퇴각하고 말았다.


 이때 창의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자 “잃어버린 나라는 3년 뒤에도 찾을 수 있지만 부친의 3년 상은 미룰 수 없다”며 귀향하고, 의병부대 상호간의 유기적인 협조가 이뤄지지 않아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서울진공에 실패하고 총대장이 없는 연합의병대는 다시 전국으로 흩어진다. 이은찬은 의병부대를 임진강 유역으로 옮겼다. 1908년 2월 이은찬은 임진강 유역에서 허위를 중심으로 여러 의병부대를 규합하여 ‘임진강 연합의병’을 재결성했다. 


 임진강 연합의병은 1908년 4월 전국에 의병봉기를 호소하는 통문을 발송했고, 5월에는 통감부 폐지, 외교권 반환 등 30개 요구조건을 제시하면서 재차 서울진격작전을 추진했다. 이에 일제는 일본군 수비대, 헌병대, 경찰대 등을 동원해 공세를 개시했고, 안타깝게도 허위가 그해 6월 11일 체포되고 만다. 게다가 이은찬의 의병부대에서도 임운명(林雲明) 등 120명의 의병이 일본군 수비대에 투항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이에 임진강 연합의병부대는 각지로 흩어져서 각기 소부대 단위의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은찬 또한 의진을 정비한 뒤 경기북부 연합의병의 결성을 추진했다. 그 결과 이은찬은 그해 10월 김귀손을 선봉장, 윤인순을 우군장, 정용대를 좌군장, 이계복을 군량장으로 하는 경기북부 연합의병 원수부를 편성할 수 있었다. 이후 경기북부 연합의병은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유격전을 전개했다. 각 부대는 제각기 독립부대로 활동하다가 때때로 대규모 연합작전을 펼쳤다.


 당시 이은찬은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지방민에게 환심을 사는 일에 정성을 기울였다. 양민들의 호응이 없이는 국권을 회복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이러한 중요한 사실을 자각하고 있던 이은찬은 군량(軍糧)과 군자금(軍資金) 등을 마련할 때에는 직접 가난한 세궁민(細窮民)들로부터 강제로 거두지 않고 각 면장·동장에게 통고하여 거두도록 하였다. 그리고 구입품에 대한 대금 지불은 기일을 어기지 않고 이행하였다.


 또한 필요한 때에는 군표(軍票)를 발행하여 물자를 받고 후에 반드시 화폐로 바꾸어 주었다. 따라서 지방민들은 의병을 믿었을 뿐 아니라, 의병을 위하여 보초도 서주고 관헌의 동정을 살펴서 알려주는 등 그들의 활동을 지지, 옹호하게 되었다.


 이은찬은 항상 정의를 표방하여 민심을 얻은 것이다. 그리하여 부하 의병은 물론 지방의 인민도 그 덕을 감사하고, 그 행동을 후원하였던 것이다. 


 1909년 1월 4일 이은찬 의병장은 200여 명의 의진을 이끌고 포천지역의 전신주를 쓰러뜨려 전화선을 절단한 후 포천헌병분견소와 수비대를 기습하고, 양주로 이동하였다. 1월 7일에도 양주헌병분견소를 기습하면서 다른 의진으로 하여금 동두천헌병분견소를 공격하게 하는 양동작전을 구사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1월 15일 밤 300여 명의 의병으로 포천군 내촌면 내리와 가산면을 기습하고 양주로 나아가서 김봉수(金鳳洙) 의병장과 그동안 소모된 군자금 및 군량미를 보충하면서 10일간의 전투준비를 하였다. 1월 25일에는 170여 명의 의진을 지휘하여 양주군 광적면에서 일본군 정찰대 및 경찰대와 교전함으로써 전투를 재개하였다. 그리고 1월 26일, 28일에도 의진을 두 부대로 나누어 연천군 적성면과 양주군 광적면에서 다시 일본 헌병대와 경찰대를 공격하였다.


 이처럼 경기북부 연합의병은 1908년 12월부터 약 3개월간 포천, 가평, 양주 등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줄기찬 의병투쟁을 벌여 큰 성과를 거뒀으나 1909년 2월 상순에 이르러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연일 계속된 전투로 탄약이 결핍되고, 사상자가 속출하여 전투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은찬은 국내에서의 의병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만주 간도지방으로 항일운동의 거점을 옮겨 군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이때 밀정 박노천, 신좌균 등이 이러한 이은찬의 계획을 탐지하고, 과거 동지였던 조수연을 보내어 유인해 내도록 하였다. “간도로 들어가서 군사를 훈련시키려면 군자금과 군량 등 그 비용이 적지 않게 필요할 것이요. 그 비용은 얼마가 들든 내가 부담할 터이니 서울로 잠입해 들어와 의논합시다.”


사실 의병활동에는 비용이 적지 아니 들었으니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은찬은 “대장(이인영)이 여주에서 패전하고 지금 황간(黃澗)에 은신하고 계시니 가서 뵙고 의논하는 것이 도리이다” 하였으나, 조수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박노천과 신좌균을 용산역에서 만나보는 것이 매우 좋을 듯하다”고 강권하므로 3월 31일 용산역으로 갔다.


이 함정에 걸려든 이은찬은 그만 체포되고 말았다. 이은찬은 심문하던 검사가 거병한 이유를 묻자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나라를 빼앗겼으므로 보복하고자 거병하였으니 모반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너희는 우리가 예전에 청나라를 섬겼으니 오늘날 일본을 섬기기로 안될 것이 무엇이냐고 하는데, 그러나 청나라는 우리의 국권을 침탈한 적이 없지만 너희는 우리를 식민지로 만들었지 않았느냐?”


재판정에서도 그는 늠름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내가 너희와 싸우기를 대소 40여 차례 하였으며, 너희 병정 470여 명을 참살하였으니 빨리 죽여라. … 나의 거의(擧義)는 홀로 한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양 평화를 위함이니, 오늘에 이르러 어찌 자신의 영욕(榮辱)을 생각하랴.”


  이은찬은 그 후 1909년 5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 채 6월 16일에 순국하니 그 뜨거웠던 삶에 옷깃 여민다.


一枝李樹作爲船  

오얏나무 한가지로 배를 만들어

欲濟蒼生泊海邊  

창생을 구하고자 바닷가에 띄웠거늘

寸功未就身先溺  

작은 공적 하나 없이 내몸 먼저 빠졌으니

誰算東洋樂萬年  

누가 있어 동양평화 기약한단 말인가  

최신글

  • 글이 없습니다.

순국Inside

순국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