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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2021/07] 건국훈장 대통령장│전해산(全海山)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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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와 명분 중시하는  

호남 의병의 든든한 정신적 지주


글 | 편집부


서생이 무슨 일로 갑옷을 입었나 / 본래 세운 뜻이 이처럼 틀려지니 한숨만 나오고 / 조정에서 날뛰는 꼴 통곡하겠네 / 바다건너 들어온 적 차마 말도 못하겠소

대낮에 소리 삼키고 강물이 멀어지고 / 푸른 하늘도 오열하며 실버들에 비 뿌리고 / 이제는 영산강으로 다시 못 가리니 / 두견새 되어 피눈물 흘리며 돌아갈거나

- 전해산 선생이 옥중에서 쓴 시


핵심공적

호남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군경과 70여 차례 교전하고 호남지역 의병들의 정신적 지주로 활동했다.


주요약력

● 1879년 10월 18일(음)   전라북도 임실 출생

● 1908년 대동창의단 조직 의병장으로 활동

● 1910년 7월 18일(음)   대구감옥소에서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어린 시절 시가와 문장에 영특함 보여 


  전해산 선생은 1879년 전라북도 임실군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해산(海山)은 그의 호이고 본명은 수용이다. 선생의 가문은 양반이었으나 계유정난으로 전라도 진안에 내려와 정착했고 그 이후 수 대에 걸쳐 벼슬길이 막혀 향반으로 남아 빈한한 가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전해산 선생은 불의를 보면 의기가 북받쳐 분개하는 마음이 남달리 강하였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밭을 일구며 당천 이한용의 밑에서 학문을 틈틈이 연마해 시가와 문장에 영특함을 보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이한용은 영남의 대유학자인 곽종석의 제자로 그 부근 고을에 널리 알려진 학자다.


유학 경전 중에서도 선생이 특히 심취했던 책은 의리와 명분을 양대 지주로 하는 『춘추좌씨전』이었으며 『월남망국사』와 같은 외국 역사와 관련된 책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름 높던 선비들인 송병선, 기우만과 면암 최익현 등이 인근 마을인 익산군의 낙영당에서 강회를 열 때 동향인 이석용과 함께 참가하여 우국충정어린 강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전해산 선생은 견문과 학식을 바탕으로 하여 실천 유학자로 자라났다.


창의동맹단에서 본격적인 의병 활동 시작


당시 을사늑약 체결에 대한 반발로 최익현이 창의토전소를 올려 의병을 일으킬 뜻을 밝히고 호남 유림지사와 문하생들을 규합해 1906년 6월 태인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전해산 선생도 이석용과 함께 최익현을 만났으나 전력과 전술면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나 빈약해 실망하고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백성으로부터 추앙받던 최익현의 항일운동 활동은 그를 감화시켜 의병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1907년 9월 기삼연, 김용구 등이 전라남도 장성의 수연산에서 호남창의회맹소를 조직하자 전해산 선생도 여기에 참가한다. 이후 김용구 의병부대의 패전으로 회맹소가 없어지자 선생은 전라북도 임실 등지에서 이석용이 조직한 창의동맹단에 합류해 본격적인 의병 활동을 시작한다. 선생은 진안과 임실을 중심으로 경찰서, 헌병분파소 등의 건물을 습격하고 일군 토벌대와도 여러 차례 격전을 벌이는 맹활약을 했다. 하지만 그해 3월과 4월 일본군과의 여러 차례 전투에서 패해 의병활동이 크게 위축되고 동료들이 하나둘 잡히거나 순국했다. 남은 의병을 모아 재기를 준비할 때 시위대 참위 출신인 정원집이 해산당한 군인을 이끌고 선생을 찾아왔다. 


대동창의단 일으켜 

일군경과 70여 차례 교전하다


  그동안 의병을 지도해 달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낮은 위치에서 활동하기를 원했으나 정원집이 이끄는 해산 군인까지 합세하자 결국 요청을 받아들여 1908년 7월 25일(음)에 대동창의단을 조직했다. 그러나 의병 구성원의 정체가 발각되면 마을 전체가 보복대상이 될 수 있고 훈련부족으로 일본군과 정면 대결은 힘들어 소규모의 병력으로 공격하는 게릴라식 전법을 사용했다.


또 밀정에 의해 의병진의 위치가 파악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의병들이 있는 곳에서는 마을 어귀에 파수를 세우고 종사원들에게 줄을 세워 계속 말을 전달하게 하는 연환식 전달제도를 운용했다. 훈련이 부족한 의병, 빈약한 무기와 군수에도 불구하고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 유격전을 수행하면서 호남 중서부 지방을 장악할 수 있었다.


대동창의단의 활동이 활발해질 무렵인 1908년 겨울, 호남의병장들이 여러 차례 상의한 끝에 호남동의단을 조직하고 선생을 의병대장으로 선출했다. 이 호남동의단의 의병장들이 활동했던 지역은 전라도 전역이었고 선생은 호남의병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활동했다. 


전해산 선생은 호남지역에서 의진을 규합하여 일군과 투쟁을 벌이는 한편 포악한 관리, 일진회원, 헌병보조원 등의 횡포를 징계하고 가짜의병을 처단했다. 


동료에 밀고 당해 

교수형으로 순국


전해산 선생의 활동을 막기 위해 일제는 몇 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의병을 ‘토벌’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의병들의 활동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영광 오동과 덕흥 전투에서의 연패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겨우 탈출했으나 의병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져 전투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에 선생은 최후의 방편으로 만주로 떠나자고 했으나 부하들 중에 동의하는 자가 없었다. 게다가 순종황제의 의병 해산령이 내려오자 영광 오동촌에서 부대의 지휘권을 박영근에게 넘겨주고 의병부대를 떠났다.


그 후 전해산 선생은 남원 고래산에서 서당을 열었다. 하지만 같이 의병으로 활동하던 조두환이 일제가 내건 현상금에 눈이 멀어 선생을 밀고했다. 수십 명의 일본 경찰에게 둘러싸인 선생은 가족을 만나고 싶다 요청하고 가족들에게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며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1910년 6월 3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 받은 후 대구 감옥소에 이감되어 대구공소원과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고 말았다. 7월 18일(음) 교수형으로 순국한 선생을 따라 부인이 자결했고 쌍상여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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