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순국선열 [2021/07] 건국훈장 독립장│박장호(朴長浩) 선생
페이지 정보
본문
대한독립단 창설
항일망명지사 통합해 독립항쟁 진두지휘
글 | 편집부
공전절후한 대한독립항쟁이여! 주력이 그때를 얻고 동기가 그 세를 승한지라. 각국이 합체하여 만방에 정을 표하여 국기와 특사가 파리평화회의 공인을 얻음은 전 지구가 우레같이 귀를 기울이는데 아주 한 모퉁이에 홀연히 고립하여 국교와 여론을 불고하며 정의와 인도를 무시하는 저 야만 왜놈의 존립이 몇 날이나 갈까?
- 대한독립단 선언문 중
국권 침탈에 대항해 강원도 홍천에서 관동의병을 일으켰으며 한일강제합병 이후 만주로 건너가 활동하다가 대한독립단을 창설하고 도총재에 취임해 많은 항일 투쟁을 지휘했다. 주요약력 ● 1859년 황해도 장연 출생 ● 1906년 관동의병 의병장 ● 1919년 대한독립단 창설, 도총재 취임 ● 1921년 7월 유하현 서구 대화사에서 피살,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자란 위정척사 사상의 유학자 1875년 운양호 사건으로 일본에 의해 강제로 개항되고, 1876년에는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다. 이때 선생은 위정척사파인 유인석, 홍재학 등의 유생들과 함께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린다. 그러나 선생과 유생들의 잇따른 상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침략은 하나씩 대한제국의 목을 졸라갔고 결국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국권이 침탈된다.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선생은 강원도 홍천에서 1906년 관동의병을 일으킨다. 선생은 끊임없이 일본군을 괴롭혔고 1907년에는 이강년과 연합해 강원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일본군과 결전을 벌인다. 하지만 결국 1910년 한일강제합병으로 국권이 상실됐고 일본은 국내에 남아있던 의병들을 제거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이전과 달리 물질적 정신적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자 상당수 의병은 만주로 떠나는데 선생도 마찬가지로 만주에서 의병투쟁을 계속한다. 항일망명지사의 통합 독립단체 ‘대한독립단’ 창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탄압을 피해서 혹은 일제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 만주로 망명해온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수십만 명의 청년이 일본과 맞서 싸우기를 원하자 그해 4월 13일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의병장과 유림 그리고 독립단체 대표들이 유하현 삼원포 대화사에 모인다. 박장호 선생은 그 자리에서 “지금까지의 개별적인 행동보다는 하나의 단체로 모여 적극적인 독립투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생의 말에 동감한 대표들은 항일망명지사들과 함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창설하고 박장호 선생은 도총재에 취임한다. 동시에 젊은 청년들을 모아 독립군을 편성한다. 1919년 9월 단원 20명이 함경북도 갑산 동인면 금정의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파괴하였다. 하지만 선생은 단순히 투쟁활동만 벌인 것이 아니라 국내외 각 지역 100여 개소에 대한독립단 지단을 설치하고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보민회, 강립단 등 친일단체 박멸과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제거하는 데 노력했고 만주지역에서는 거류 한인마을에 100가구를 하나의 구로 묶어 그것마다 구관을 두고 자치행정을 실시할 수 있게 지원했다. 대한독립단의 활동과 분열 8월에는 최고 1천 500명의 병력을 유지하면서 하얼빈, 노령, 시베리아 등지에서 군사훈련을 받게 하면서 무기 구입에 주력했다. 12월 본부 밑에 4개 중대를 편성해 남만주 제1사단이라 하고, 무송현에 사단본부를 설치했다. 1919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통제 실시에 따라 조병준이 평안북도 독판(督辦)이 되어 독립자금 공채를 모집하기도 했다. 이렇게 외부적으로는 독립항쟁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며 성과를 올렸지만, 내부적으로는 점차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의병활동을 한 유생 출신의 중장년들과 3·1운동 이후 참가한 청년들의 이념문제였다. 생각 차이를 바로 보여주는 일이 연호 문제였다. 의병출신들은 대한제국 융희 연호 사용을 주장한 반면, 청년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호 사용을 주장한다. 결국 장년 중심의 기원독립단과 청년 중심의 민국독립단으로 분리되고 만다. 이념문제 뛰어넘어 친일세력 처단 독립단은 분리됐지만, 박장호 선생은 조국광복의 길에는 이념이나 노선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 것을 실천했다. 선생의 지휘로 1920년에는 결사대를 조직해 평안도 신의주·의주 등에서 친일세력을 처단하였다. 3월에는 평안북도 벽동군의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4월에는 영유군(永柔郡)에서 우편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한다. 5∼7월에는 평안북도 철산·삭주·강계·벽동 등지의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9월에는 의주·운산·영변 등지에서 일본 경찰대와 교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남겼다. 특히 독립군 파견대장 이명서는 은율군의 친일파 군수를 사살하고 주재소를 습격했다. 항상 성과만 올린 것이 아니라 일본군의 반격으로 대원이 전사하거나 폭파 계획이 들켜 실패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생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단원들의 공격으로 일제는 참기 어려운 곤란을 겪게 된다. 일제는 독립단의 활동을 막기 위해 정보를 입수한 끝에 독립단을 지휘하는 박장호 선생을 제거하기로 마음먹는다. 선생에게 쉽게 접근하기 위해 조선인인 김헌을 파견한다. 1921년 7월 봉천성 무성현에서 선생은 일제의 앞잡이 김헌이 쏜 총에 맞아 순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