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2021/07] 7월의 독립운동가 │ 손일봉·최철호·박철동·이정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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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전선 샛별이 된 호가장 전투의 영웅들
청춘의 생명 바쳐 장렬하게 최후를 맞다
글 │ 국가보훈처 제공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손일봉(1912~1941), 최철호(1915~
1941), 박철동(1915~1941), 이정순(1918~1941) 선생을 2021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중국 호북성 한구(漢口)에서 창설된 군사대오이다. 만리장성 이남의 ‘관내’ 지역에서 나타난 한국인 군사조직으로는 최초의 것이었다.
중국항전 도운 조선의용대의 활약상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중국 호북성 한구(漢口)에서 창설된 군사대오이다. 만리장성 이남의 ‘관내’ 지역에서 나타난 한국인 군사조직으로는 최초의 것이었다. 4년 후 1942년 가을에 한국광복군으로 통합되어 그 지휘체계 하의 제1지대로 재편되었는데, 그 절대다수 병력은 이미 화북의 조선의용군 성원이 되어있었다. 처음에 조선의용대는 중일전쟁 발발 1주년이 되던 때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의 건의와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의 정치적 구상이 맞아떨어지면서 본부와 2개 구대(區隊) 편제의 100여 명 인원으로 성립했다. 그 지위는 ‘중국항전을 지원’할 ‘국제종대의 1개 지대’로 규정지어졌고, 그래서 명칭도 ‘군’이 아닌 ‘대’로 붙여졌다. 부여받은 주 임무는 전투가 아니라 적군 와해 목적의 심리전 성격을 갖는 대적선전 공작이었다. 출발이 이러했음은 조선의용대 자체의 포부와 활동에 여러 제약을 가하고 한계를 낳았다. 그래서 그 극복·돌파의 방안과 진로를 의용대 내부에서 여러모로 고민하고 모색하였다. ‘북상항일(北上抗日)’ 구호 하의 화북진출과 화북지대 성립은 그 귀결이었다. 그 과정이 그리 간단치는 않고 우여곡절도 있었다. 조선의용대가 창설된 지 보름 만에 한구(漢口)를 포함한 무한(武漢) 3진이 일본군에 함락되고 만다. 무한에 있던 중국 군·정 최고지휘부와 주요 기관은 다들 남쪽 광서성의 계림(桂林)과 서쪽의 사천성 중경(重慶)으로 후퇴 철수했고, 의용대도 무한보위전의 막바지에 한구를 떠났다. 의용대 본부는 계림으로 옮겨가고, 제1구대는 호남성 북부 형산(衡山) 인근의 평강현 상탑시로 가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대원들은 중국 국민혁명군 제31집단군 예하 부대들에 분속되어 제9전구의 전선으로 나갔다. 구대 자체적으로 진지선전대와 유격선전대를 2개씩 구성해놓고, 중국군과의 합동작전에서 대치, 돌격, 유격 등의 상황에 맞는 대적선전을 수행하였다. 출동 시의 무장은 각자 소총 1정과 수류탄 2개가 전부였다. 제2구대는 제5전구로 행군해가서 호북성 북부의 양번지구로 들어갔고, 거기서 세 부분으로 갈라졌다. 골자만 얘기하면 수조전선의 선전공작 팀, 노하구(老河口)에 주둔하는 유격구 팀, 그리고 전구사령부 팀이었다. 1939년 10월말에 조선의용대는 3개 지대(支隊)와 2개 독립분대를 거느리는 것으로 증편되었다. 그러면서 제1지대는 총원 78명에 4·9전구, 제2지대는 총원 75명에 1·2·5전구, 제3지대는 총원 63명에 3·9전구로, 인원과 배치구역도 확대 조정되었다. 신편 제3지대는 12월에 강서성 북부 금하(錦河) 일대의 전장으로 나가서 제19집단군 예하 부대들에 배속된 후 4개 공작대로 나뉘어 선전공작을 벌여갔다. 그 과정에는 전투도 수반되었다. 그러다 1940년 4월에 총대부의 명령에 따라 금하전선을 떠나 중경으로 출발했다. ‘화북공작으로의 이행’을 위해서였다. 앞서 3월에는 제1지대원 31명이 계림을 출발하여 부대장(副隊長) 신악 인솔 하에 하남성 낙양(洛陽)으로 행군해갔다. 전년도 12월에 ‘북진분대’가 선발대로 북행했음에 이어서였다. 낙양에 당도한 북상그룹은 국민당군대의 편의대(便衣隊)와 함께 황하를 건너가 태항산·중조산 기슭과 하북성 평원지대에서 적후(敵後)공작을 시험적으로 벌였다. 이렇듯 조선의용대는 1939년 초부터 1940년 봄까지의 1년여간 화중·화남의 항일전선에서 대적선전 공작을 열심히 벌였고, 그 과정에 전투참가 경험도 적잖이 가졌다. 또한 이미 1940년 봄에 화북진출 방도를 모색하여 과감히 시도되고도 있었다. ‘북상항일’의 주장과 결정 기실 의용대원들은 화중·화남 전선에서의 활약 중에도 무언가 공허함을 느꼈다. 일본군에 맞서고는 있지만,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오늘의 이 싸움을 수행하며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자문해볼 때 그랬다. 안 그래도 의용대 내부에서는 중국항전에 참가하는 ‘국제지원군’으로부터 조국광복을 위한 ‘민족혁명군’으로의 성장이 자기의 진로로 초기부터 상정되고 있었다. 게다가 독립전쟁의 발동과 그 승리를 위해서는 동북지역 즉 만주로 어서 빨리 가야겠고 동포들을 많이 접하고 끌어들여 군대의 규모와 역량을 키워야 할 텐데, 화중·화남의 전지들에서는 그러기가 불가능했다. 일찍이 1939년 3월에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김성숙이 “적의 후방을 향하여 힘써 나아갈 것”을 주문하였다. 그해 가을에 의용대 본부는 ‘해오던 공작을 계속하기’와 더불어 ‘적후(敵後)를 향하여 발전하기’도 주요 공작 방향으로 규정하였다. 중국군의 적후유격전과 배합하여 의용대가 무장 대적선전을 수행하면서 조선민중을 쟁취하여 ‘무장 전투부대’로 거듭나기 위해서라 했다. 조선의용대 총대부의 신임 정치조장이 된 김학무도 1940년 초에 무장화와 윤함구(淪陷區, 일본군 점령지역) 공작이 ‘금후의 공작 방향’임을 천명했다. 머지않아 의용대가 전쟁대오로 발전함은 필연적일 뿐 아니라 가능하다는 생각도 같이 피력했다. ‘무장화’란 선전공작을 하더라도 무장대오가 되어서 해가는 것, 그러기 위해 ‘무장한 대적선전 공작대’를 건립함을 의미했다. 이것이 장래의 ‘전투적 무장대오’의 기초가 되어서 적후의 측면을 타격하는 ‘유격대식 소전투’를 벌일 수 있으며, 활동자금을 획득하고 대량의 조선동포를 쟁취할 수 있는 방안이라 했다. 그리고 ‘윤함구 공작’이란 적의 손에 넘어가 있는 화북의 북평(北平), 천진(天津), 석가장(石家莊), 신향(新鄕) 등지에 이민동포가 격증하여 10만 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을 쟁취하여 의용대의 병력을 확충하고 혁명적 연락기지와 활동근거지를 건립함이었다. 그래야 관내지역의 혁명운동을 고립에서 구해내고 동북처럼 국내운동과의 연계도 기할 수 있다고 했다. 요컨대, 지금까지는 중국군 지원부대로서의 대적선전대에 불과하나 앞으로는 적의 무기를 탈취함에 의한 자체 무장 전투부대가 되고 적후로 침투하여 동포를 쟁취하며 본거지를 구축함으로써 동북 및 국내와의 연계를 도모하고 마침내 ‘최후의 결전’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논지였다. 이것은 그 즈음의 의용대 내부에 팽배해있는 열망과 내심의 결의들을 그대로 반영시킨 것이었다. 그와 같이 의용대의 화북진출 포부는 진작부터 키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1940년 11월 중경 남안구에서 조선의용대 확대간부회의가 열렸다. 15일간 계속된 이 회의에서는 그때까지의 활동 경험을 돌이켜보고 자기비판도 가한 끝에, 조선동포 다수거주 지역으로의 진출, 과거의 분산·유동적 선전공작으로부터 근거지를 확보하고 전투공작으로의 중점 변경, 자체 무장화에 기하는 민족혁명군 건립이 향후 활동의 우선 방침으로 제기되었다. 그리고 그 방침의 첫 실천방법으로 ‘북상항일’을 정식으로 결의해냈다. 그렇다고 간부회의에서 의용대 진로의 ‘최종’ 목적지를 화북으로 못 박아 정한 것은 아니다. 화북은 의용대가 적지에서 이주동포를 획득하여 군중적 기초 및 동원무력으로 삼고서 만주로 진출하기 위해 필수적이며 불가피한 경로였을 뿐이다. 1938년 5월 조선민족혁명당 제5차 전당대표대회에서 제기되었던 ‘동북노선’의 실천 방안을 의용대 창설 후 1년이 경과한 시점인 1939년 말부터 실은 김원봉을 비롯해 지도부 자신이 수면 하에서 계속 모색해오던 중이었다. 1940년 10월부터는 김원봉이 “이제는 동북으로 가야 한다”고 거듭 공언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의용대의 화북진출은 중국공산당 비밀당원인 일부 대원들이 연안(延安)의 무정·최창익 등과 은밀히 연락하면서 벌인 이면공작의 결과였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중공계 책사인 시마루(司馬璐)의 김원봉에 대한 설득이 주효해서였던 것도 아니다. 그것은 ‘화북행 → 동북행 → 국내진공’이라는 의용대 본래부터의 숙원전략에 의해 추동된 것이다. 1941년 벽두 중경 출발 직전에 제3지대 정치위원 윤세주가 총대부 간부들 앞에서 공언한 것도 “금년에 화북 근거지를 건설하고, 명년에는 동북 근거지를 건립할 것이며, 내명년에는 조국으로 진입하겠노라”는 결의였다. 조선의용대 3개 지대의 태항산 입산 확대간부회의의 공식 결의를 근거 삼아 의용대 총대부는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에 북상이동을 건의하였다. 종착지는 동삼성정진군(東三省挺進軍) 사령부가 있는 수원성(綏遠省) 오원(五原)으로 제시하였다. 그러자 어렵지 않게 승인이 떨어졌다. 이에 총대부는 호북성의 2지대와 중경에서 대기 중인 3지대에 대하여 낙양행 명령을 내렸다. 김학무 인솔 하의 제2지대도 낙양에 도착하니 3개 지대 소속원 거의 전원이 4월부터 6월 사이에 순차적으로 황하를 건넜다. 도하 후에는 제24집단군 총사령 팡빙쭌(龐炳勳)의 부대가 있는 임현(林縣) 일대로 가서 일시 주둔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태항산의 팔로군(정식 명칭은 제18집단군) 전방총사령부로터 의용대의 행로를 인도해줄 밀사가 왔다. 의용대의 종착지가 수원성에서 태항산으로 갑자기 변경된 것은 낙양 체류 동안의 집단토론과 숙의 속에서 환남사변(晥南事變) 돌발과 동북항일연군의 현 상황 등 여러 문제를 감안해 결정된 바였다. 7월초의 어느 날, 의용대원 80여 명이 밀사의 길안내를 받으면서 국민당군대 구역을 벗어나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들어갔다. 처음 당도하여 열렬히 환영받은 곳은 하북성 서남단의 팔로군 129사(師) 385여(旅) 주둔지인 섭현(涉縣) 서달진(西達鎭)이었고, 거기서 서북쪽으로 50km 지점의 산서성 요현(遼縣) 동욕진(桐峪鎭)의 상무촌(上武村)으로 행군해가서 안착하였다. 화북지대 결성과 총대부와의 결별 태항산으로 들어간 조선의용대 병력은 입산 직후 1941년 7월 7일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재편성되었다. 대장 박효삼, 부대장 이익성, 정치지도원 김학무로 지휘부를 구성하고, 3개 (구)대에 예하 2개 분대씩의 6개 분대로 편제하였다. 그리고 8월까지 약 40일간의 대토론을 통하여 무장선전, 간부양성, 적구(敵區) 지하조직을 3대 활동방침으로 확정지었다. 그 토론에서는 ‘투쟁유일주의’가 비판되고 무장선전의 필요성과 의의가 강조되었다. 그래서 화북지대의 대적활동도 전처럼 선전공작으로 집중되어갔는데, 불시의 전투도 수행할 무장선전 공작을 일반선전과 병행키로 하였다. “적구 내로의 우리 조직·선전 공작의 심입과 적의 전면적 실패가 개시되기 전에 명실상부한 전투부대의 건립이란 불가능함을 확인”했기 때문이라 했다. 화북지대와 충칭 총대부와는 지휘명령 계선에 따른 통솔-복종 관계가 형식상 유지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공계 유력자인 무정의 영향력 아래 놓인 화북 조선청년연합회의 정치적 지도를 받는 행동대로 되어갔다. 공작 수행도 팔로군의 간접적 지도와 원조 하에 이루어졌다. ‘화북지대’로 명칭이 바뀜과 더불어 실질적인 지휘계통과 정치적 성격이 사뭇 달라져버린 것이다. 그렇게 화북지대는 총대부와의 관계가 점점 멀어지더니 이윽고 거의 따로 움직이는 것처럼 되어 갔다. 지리적 요인과 정치적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간 것이기도 했다. 그런 기미를 뒤늦게 느끼고 알게 된 김원봉은 본인의 화북행을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종래의 1·2·3 지대 명칭을 고수하거나 나중에는 그것들을 광복군 제1지대 예하의 1·2·3 구대로 호칭하는 것 말고 달리 뾰족한 수는 없었다. 화북지대의 무장선전 공작 1941년 9월부터 개시되는 무장선전 공작을 위하여 화북지대는 무장선전대(약칭 ‘무선대’)를 조직하고 3개 대로 나누어 편성하였다. 제1대(대장 이익성)는 하북성 남단의 자현(磁縣)과 하남성 북단의 안양(安陽)·무남(武南) 등지를, 제2대(대장 김세광)는 하북성 석가장 남쪽의 원씨현(元氏縣)·찬황(贊皇)·임성(臨城) 등지를, 제3대(대장 왕자인)는 하북성 남부의 사하(沙河)·형태(邢台)·무안(武安) 등지를 활동구역으로 삼기로 하였다. 모두 팔로군 태항군구(太行軍區)의 분구 구획에 따른 것이었는데, 아무튼 석가장에서 안양현까지 남북으로 700km의 적후지구가 화북지대 무선대의 활동장이 되었다. 무선대원들은 적구에 거주하는 동포들 대상의 선전과 설득공작을 끈질기게 진행하였다. 그런가하면 적군 주둔지로 침투하여 전단을 뿌리고 적군을 향해 구호를 외치며 투항권유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래서 조선의용대의 선전물을 보거나 구두선전을 접한 이주민이나 조선인 병사가 어렵게 탈주하여 찾아오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41년 12월에 무선대가 호가장(胡家莊)과 형태에서 일본군의 기습 또는 매복공격을 받아 치르게 된 단독전투가 두 번 있었다. 특히 전자는 격전 중에 대원 전사자가 4명이나 나와 조선의용대 항일전사의 불후의 전설로 남게도 되었으니, 이제 그것을 살펴볼 차례이다. 호가장 전투 1941년 12월 12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무장선전대 제2대 대원 19명(20여 명, 23명, 29명, 30명이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정확한 인원은 불명임. 여기서는 그때의 제2대 대원의 증언·회고에서 연원했다고 여겨지는 자료의 숫자를 따름)이 숙영지이던 호가장 마을을 포위 기습해온 일본군 및 괴뢰 황협군(皇協軍) 200명(이 숫자도 300여 명설, 500명설, 800명설이 병존함)과 맞싸운 것이 호가장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의용대는 손일봉 분대장 등 4명 전사라는 희생을 치르고, 김세광 대장 등 4명이 부상 당하고, 김학철 대원은 포로가 되는 손실도 입었다. 하지만 그 격전은 대단히 영웅적이었고 희생은 감동적이어서 크나큰 심리적·정치적 효과를 낳았다. 무선대 제2대의 김세광(원명 김세일) 대장과 휘하 대원들은 1941년 11월 중순에 근거지 상무촌을 떠나 200km 밖의 평원유격구인 원씨현으로 출동했다. ‘유격구’란 일본군 점령지와 팔로군 해방구와의 중간지대를 말함이었다. 거기서 하순까지 공작준비를 하고 12월 들어 현내 곳곳에서 연환회(演歡會), 좌담회, 군중집회 형식의 선전활동을 벌였다. 야간에는 일본군 진지 50m쯤 앞까지 접근해서 양철통 나발을 입에 대고 일본말로 반전구호를 외치거나 일제의 죄행 폭로 연설을 하고 돌아왔다. 이동 중에 간혹 적군과 마주치는 일이 있으므로 전원 무장해 있었고, 300명가량의 팔로군이 호위 임무를 띠고 멀찍이서 따라다녔다. 그러던 차 11일 정오에 선옹채에서 200여 명(혹은 100명)의 적과 조우하여 접전 끝에 물리쳤다. 12일에는 민중대회를 호가장 마을에서 연 다음 서남방의 찬황으로 이동해 갈 예정이었다. 호가장은 석가장 남서쪽 32km 지점의 태항산맥과 기중평원이 맞닿는 곳에 4,50호의 주민들이 사는 농촌마을이었다. 19명의 제2대 대원들은 3일간이나 눈을 붙여보지 못했던 데다 그날 낮의 전투로 피곤해진 몸을 휴식하기 위하여 호가장에서 하룻밤 숙영키로 하였다. 약 4리 떨어진 곳에서 팔로군 호위대가 야숙하며 경계를 맡아주기로 했음에 안심하고 대원들은 한 농가에 들어가 마룻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마을 밖 초소나 동초를 두지 않고 지붕에만 입초 한 명을 세워두었다. 그런데 호가장에는 황협군 가족 5세대가 살고 있었다. 그중의 한 명이 마을 구장이면서 ‘한간(漢奸)’이었는데, 그가 7리 밖의 자기편 군영으로 몰래 달려가 의용대의 동정을 밀고했다. 그리고는 팔로군의 야숙지점을 피해서 오게끔 안내해준 결과로, 일본군과 황협군 각 1개 중대 병력이 밤사이 호가장 외곽으로 침투하여 의용대원 숙영지를 3,4백m 밖에서 3면으로 둘러싸고 포위망을 압축하였다. 동틀 무렵인 새벽 네 시쯤, 일본군이 지붕의 보초를 향해 총을 쏘았다. 놀라서 뛰어내려온 보초가 적의 습격을 외쳐 알렸다. 그 순간, 박격포탄이 날아와 터지며 기와와 벽돌을 부수어 날려 보냈다. 이어서 적의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그 소리에 깨어 놀라며 일어난 대원들은 급히 군장을 갖추고 전투태세를 취하였다. 김세광이 1분여의 숙고로 상황판단 끝에 즉시응전 명령을 내리니, 아군의 소총과 경기관총도 불을 뿜었다. 사투 일곱 시간의 처절한 격전의 막이 그렇게 올랐다. 날이 밝았지만 안개가 짙었다. 적군은 안개를 뚫고 돌진할 엄두는 내지 못하였다. 그들은 아군보다 최소 10배 이상의 병력에다 박격포 2문과 30정 이상의 경기관총도 갖고 왔다. 아군은 절대불리의 형세 속에서 탄환도 아끼면서 싸워야만 했다. 호가장 전투 실황과 열사들의 최후 대원들은 고정지점에서의 방어를 아주 불리한 것으로 여기고, 농가를 빠져나가 인근 고지로의 혈로를 뚫기로 하였다. 우선은 김세광이 세 명 대원의 어깨를 딛고 지붕 위로 올라가서는 대문 밖의 적병들에게 수류탄을 연속으로 던져 물러서게끔 만들었다. 그 틈을 타 경기관총을 앞세우고 돌격하여 대문으로 나가려 하니, 적의 기관총 화력이 십자포화를 그리며 거기로 집중되었다. 그러다 포화가 갑자기 중단되는 가운데 일본군 지휘관이 고함치기를 “저항하지 말고 항복하라. 그러면 목숨은 살려 준다”고 했고, “조선인은 다 같은 황국신민이니 귀순하면 우대한다”고 구슬리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자 의용대원들은 “정 하고 싶거든 네가 항복해라” “우리는 일본군의 포로를 우대한다. 어떠냐? 의향이. 너희를 위해 충심으로 권유한다”고 응수했다. 그랬더니 “바가야로!”라는 외마디소리와 함께 다시 일제사격이 가해져왔다. 그러기를 몇 차례, 마지막 투탄이 끝나고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돌격!” 명령과 함께 일대일로 총검을 겨누며 맞붙어 싸웠다. 그러다 총검이 부러지면 총대를 거꾸로 들고 적병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초인적인 용맹이 대원들을 사자처럼 만들었다. 견디다 못한 적이 양쪽으로 갈라져 길이 열리자 대원들은 돌파구로 삼고 혈로를 열었다. 대원들은 농가 대문으로 빠져나가, 골짜기 건너편의 산줄기 세 개 중에서 가운데의 서쪽 산등성이로 올라가 포진하려 했다. 그러나 적의 포화가 재차 불을 뿜고 적병들이 추격해오니, 누군가가 후위를 엄호해야 했다. 김세광 대장이 2분대원 중 다섯 명이 후위를 맡아주도록 명했다. 그러자 손일봉 분대장이 제일 먼저 나섰고 이어서 최철호, 이정순, 박철동, 김학철 대원이 뒤따랐다. 다른 대원들이 포위망과 추격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때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탄약이 다 떨어지도록 싸워야 함이 그들의 임무였다. 시선을 교환하며 마지막 작별을 고한 다섯 명은 살기를 단념하니 오히려 맑고 가벼운 마음이 되어 임무를 시작했다. 각자 엄폐와 사격이 잘될 위치를 찾아 엎드린 상태에서 탄약을 재우고 대기하였다. 그리고는 올라오는 적병을 한 명 한 명 겨누어 사격했다. 그러자 적은 추격을 중지했다. 대신에 다섯 명의 후위대에 포화를 집중시켰다. 이 다섯 명의 용사가 분전하다 안타깝게도 스러져간 모습은 자료에 따라 조금씩 상이하게 그려져 있다. 어떤 자료는 사실 위주로 건조하게 요점만 적었고, 어떤 자료는 긴박했던 상황과 처절한 최후를 실감시켜주려는 듯이 정황까지 자세히 묘사하며 얼마간의 윤색이나 과장도 곁들인 듯했다. 그중의 어느 것만을 사실로 확정짓거나 임의로 취사선택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자료를 그대로 옮겨보는 것이 가장 좋겠다. 이 전투 1년 후에 총대부에서 작성한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혔다. “손일봉 동지는 처음 적과 보총으로 싸우다 다시 접근된 적에게 수류탄을 던져 많은 적을 죽였다. 수류탄을 다 쓰고 탄환도 다 되어버렸음에 손 동지를 사로잡으려는 적과의 육박전이 시작되었다. 이 육박격투를 목도하는 우리 대의 동지는 하는 수 없이 그를 향해 기총 소사하였다. 도저히 사로잡아갈 수 없겠다고 본 적은 마침내 각도(刻刀)로 손 동지의 왼편 가슴을 찔러 죽였다. 왕현순 동지는 대문을 나와 뒷담에 몸을 숨기고 사격을 계속하다 가진 탄환을 다 쓰고, 불행히도 적의 탄환이 대뇌에 명중하여 소뇌를 뚫고 나가면서 즉사하였다. 최철호 동지는 지붕에서 격전하다 뒷담을 뛰어넘어 가던 중에 국부를 명중 당해 신음하다 죽었다. 박철동 동지는 탄환을 다 쓰고 사로잡으려는 2적과 육박 격투하여 언덕에서 골창으로 굴러가며 악전고투했는데 적이 자도(刺刀)로 왼편 가슴을 찔러 죽였다. 사체를 발견했을 때 동지는 두 눈을 뜨고 이를 악물고 두 손으로 자기 옷가슴을 헤치고 꿇어앉은 채로 죽어있었다.” 훗날 소설 형식으로 나온 김학철의 현장증언은 이렇게 되어 있다. “먼저 이정순이 이마를 뚫리어 폭 앞으로 엎더졌다. 그 다음에 엄폐용 지물을 바꾸려던 최철호가 아랫배를 맞고 쓰러졌다. 흉부 관통을 당한 박철동은 끓어오르는 목구멍의 피를 내뿜으며 ‘조선독립…’을 소리높이 외쳤다. 손일봉 동지는 적의 선두를 맞아 단신 분전하며 총검으로 두 적병을 넘어뜨리고 세 명에게 포위되어 가슴에 날창을 받고 쓰러졌다.” 김학철 자신은 어느 순간 왼쪽 대퇴부에 적탄을 맞고 나가떨어진 채 사격을 계속하다 실신해 포로가 되었다. 특별히 손일봉과 박철동의 최후에 대해 동료 대원 장운은 이렇게 상세히 그려놓았다. “‘손 동지! 총알이 남았는가?’고 박 동지가 묻자 손 동지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마지막 남은 수류탄 하나를 손에 들어 박 동지에게 보여주었다. 이때 일본 파시스트 강도의 소대장 하나와 사병 일곱이 손 동지를 포위하였다. 손 동지는 적 소대장을 향해 몸을 날리더니 그의 멱살을 쥐고 ‘야! 이 왜적놈아!’라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손에 있던 수류탄을 돌멩이에 세게 부딪혔다. 순간 수류탄이 굉음을 내며 폭발하였고, 적 소대장과 사병 몇 명이 손 동지와 함께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손 동지가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할 당시 박 동지는 적군 두 명과 육박전을 벌이고 있었다. 박 동지는 나무 손잡이가 달린 수류탄으로 머리를 내려쳐 일본군 한 명을 제압했다. 그러나 이미 십 여 차례나 적의 칼에 찔린 탓에 박 동지는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도망을 치기 시작한 박 동지는 많은 출혈로 인해 정신이 혼미하여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였다. 결국 막다른 계곡에 이르게 된 박 동지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야말로 진퇴유곡의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발걸음을 멈추고 묵묵히 뒤돌아 선 박 동지는 ‘내 목숨을 원하거든, 아낌없이 주마!’ 하며 자신의 가슴을 풀어 헤치고 적에게 대들었다. 야만스러운 적이 휘두르는 칼에 맞은 박 동지는 어느 산골짜기에서 용감하게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상의 인용문들은 읽기 쉽게 현대어로 약간 윤문한 것임) 부상자도 4명이나 나왔다. 김세광 대장 외 조열광 제1분대장, 대원 장예신과 김흠이었다. 잡혀간 김학철을 포함하면 5명이었고, 대부분 중상이었다. 김대장은 지휘 중에 오른쪽 대퇴부를 총탄이 뚫고 갔다. 이어서 복부를 또 맞았다. 고장 난 기관총을 그 몸으로 고쳐내 메고 몇 발자국 옮겨놓았을 때 날아온 탄환이 이번에는 왼쪽 팔목을 날렸다. 남은 왼쪽 다리와 오른팔로 그는 풀뿌리를 움켜잡고 무릎으로 기어서 오후 2시에 산정에 이르렀다. 그런 상태에서도 그는 “조선사람은 조선민족의 절개를 지켜라!”고 외쳤다. 전투 후 후송된 그는 복부절개 수술을 받았고 내내 외팔이로 지내야 했다. 조열광은 김세광이 적탄을 맞아 놓쳐버린 기관총을 대신 잡고 사격하려 하던 중에 2발의 적탄을 무릎에 맞았다. 보행이 불가능해진 그가 최후의 결심을 하고 적이 나타기를 기다리는데, 김흠이 지나다 그 광경을 보고는 조열광을 등에 업고 안전지대로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자 조열광이 “기관총은 전대(全隊)의 생명이다, 나를 관심 말고 속히 기관총을 가지고 가라”고 소리쳤다. 김흠은 그래도 동지를 구하려 했는데, 조열광이 한사코 거절하므로 하는 수 없이 총을 메고 가려 했다. 그때 조관 동지가 지나가므로 기관총을 조관에게 맡기고 김흠 자신은 조열광을 등에 업고 꼬박 하루 동안 20여 리의 산길을 달려 안전지대에 당도했다. 숨을 돌리려고 잠깐 멈추었을 때에야 김흠은 자신의 두 다리도 부상을 입어 피와 살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임을 알았다. 신도 버선도 없이 산길을 달린 까닭에 발바닥 거죽이 다 벗겨져 나갔고 살도 째여서 하얀 뼈가 드러나 있었다. 그 후 3개월간 치료하고 처음 걷게 되었다. 후위대의 이러한 용맹분투와 자기희생 덕분에 본대는 건너편 산등성이로 다 올라갈 수 있었다. 그때 11시쯤에 팔로군 지원대가 도착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일본군 중대장 이하 100여 명의 적을 사살하고 무수한 전리품을 노획했다 한다. 1942년 7월 10일, 화북 조선청년연합회가 제2차 대표대회를 열고 ‘화북 조선독립동맹’으로 개칭·개편키로 결의하였다. 그와 동시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도 이제부터는 ‘화북 조선의용군’으로 개칭할 것임을 결의함과 동시에 자기의 위상을 ‘독립동맹의 행동부대’로 규정지었다. “전장은 혁명청년에게 구락부와 같은 곳” 일생 독립운동에 투신, 손일봉(孫一峰) 손일봉은 1912년 평안북도 의주군 위화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농민이었는데,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경찰의 발포로 부상을 입고 다리 불구가 되었다. 그러고도 불편한 몸을 일으켜 계속 농사에 종사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겨울이 되어 압록강이 얼면 독립군이 강을 건너와 일본경찰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의 활동을 폈고, 그 소식은 금세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아버지와 독립군의 영향으로 손일봉은 독립운동에 뛰어들 생각을 10대 초부터 품었다. 주경야독으로 의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손일봉은 목재공장에서 2년간 노동자로 일하였다. 그러다 1931년 초봄에 웅지를 품고 고향을 떠나 중국 청도(靑島)로 갔다. 거기서 2년 동안 자나깨나 반일운동의 방법을 연구하던 중 일본경찰의 주목을 받자 상하이로 갔다. 1933년에 그는 상하이 훙커우(虹口)의 삼림기차양행에 서무원으로 취직해 있으면서 가명을 쓰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총을 들고 일본경찰의 앞잡이와 친일 밀정을 처단하는 ‘제간공작’에 참여한 것이다. 그러던 중 1934년 3월 3일에 주중 일본대사와 상해 주둔 일본해군 육전대 사령관이 훙커우신사에서 전몰장병 초혼제를 거행할 것이라 함에, 그들을 폭살하려는 현장투탄 거사에 한국독립당원 강병학과 함께 참여하였다. 아쉽게도 폭탄 불발로 의거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4월에 상해를 떠난 손일봉은 낙양으로 가서 육군군관학교 분교에 입학해 다니고, 1935년 졸업 후 광주(廣州)로 가서 육군군관학교 제4분교에 다시 입학하였다. 1938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국민혁명군 포병 제53·56단에서 탄약대장, 간부훈련반 교관 등의 직을 수임하였다. 그 후 포병 제54단의 전차방어포대 연장(連長: 중대장)으로 발탁되어, 1939년 9월의 장사대회전(長沙大會戰)과 이듬해 6월의 신양(信陽) 회전 등 호남·호북성 일대의 대일전투에 10여 회 종군하였다. 신양 부근의 고량점(高梁店)에 주둔하고 있을 적에 손일봉은 낙양의 조선의용대원인 장중광(강병학의 가명)에게 편지를 보냈다. 거기에 “전장은 혁명청년에게는 구락부와 같은 곳이다. 혁명을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즐거움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에 조선의용대가 손일봉에게 “친애하는 혁명동지여! 우리는 동지가 우리의 공작에 동참하기를 바라오. 우리는 조만간 화북으로 이동하여 적 후방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동포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 답장을 받은 손일봉은 의연히 그 부름에 응하기로 결심하여, 1940년 8월 초에 낙양으로 가서 조선의용대 제1지대에 가담하였다. 그리고는 1941년 황하를 건너 태항산으로 들어가고는 화북지대 무선대 제2대의 제2분대장이 되어 무장선전공작을 전개하다 호가장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우고 장렬히 전사한 것이다. 늘 웃는 얼굴로 선전공작 맨앞에 선 최철호(崔鐵鎬) 최철호는 1915년 6월 19일, 충청남도 대전에서 이른바 ‘백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9년 대전 제2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형평운동에 참가하여 열심히 활동했다. 1935년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에서 민족혁명당에 가입하고 한청도(韓淸道) 또는 최명근(崔明根)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 1937년 12월 당의 부름에 응하여 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 한인특훈반에 들어가 6개월간 교육받았다. 1938년 5월에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구로 옮겨가 최창익·김학무가 이끄는 조선청년전지복무단에 참가하였다. 늘 웃음 띤 얼굴에 연극과 노래에 능하여 언제나 선전공작의 맨앞에 섰으며, 농부 역할과 비장한 노랫소리는 특히 관중의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 조선의용대 창설에 참가하여, 제2구대 소속으로 호북성 노하구 일대에서 활동하였고 서안통신처 주임으로도 일하였다. 1940년 10월에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에도 가입해 활동하다 1941년 초에 낙양으로 간 그는 화북진출 대오에 합류하였고, 화북지대원이 되어 열심히 활동하다 호가장 전투에서 순국한 것이다. 백절불굴의 강직한 성품 가진 ‘꼬리 없는 송아지’, 박철동(朴喆東) 박철동의 출생지는 아직 미상이지만, 1915년 충청북도 충주 태생인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 망명 전에 ‘충주학생운동’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고 하므로 그렇다. 집안사정이 몹시 어려웠던 그는 간신히 공립보통학교만 마칠 수 있었는데, 그가 학생이었을 무렵에 충주에서 있었던 학생운동이라면 1930년 2월 7일 충주군 이류면(현 충주시 대소원면)의 대소원공립보통학교 5·6학년생 30여 명이 벌인 만세시위를 짚어볼 수 있다. 그때 현장에서 붙잡혀간 10명 중에 박씨 성은 5학년생 박운양(朴雲陽)과 박기현(朴基鉉)이 있었으니, 그중 하나가 박철동의 본명일 것이다. 그 얼마 후 2월 하순에 박운양이 서울 모처의 격문사건으로 동대문경찰서에 검거된 바 있는데, 박철동은 “일본 파시스트 경찰의 끄나풀에게 그간의 행적이 탄로나자 하는 수 없이 1931년 12월 중국 심양(瀋陽)으로 도망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박운양과 박철동이 동일인이 아니었을까도 한다. 박철동은 작은 키에 감정이 풍부하면서도 백절불굴의 강직한 성품을 타고나서 어떠한 어려움이나 위험도 아랑곳하지 않는 대담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선양으로 간 그는 조그만 가게의 점원으로 취직하여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익히고 야간학교에도 들어갔다. 1932년 그는 야간학교에서 재(在)남경 조선혁명당의 동북특파원과 접촉하게 되어 그의 소개로 10월에 남경으로 출발하였다. 도중에 상해 부두에서 일본영사관 경찰에 붙들려간 그는 채찍질과 고문이며 온갖 감언이설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바보 행세를 하면서 단식투쟁을 벌이며 굴하지 않았다. 결국 풀려났으나 훙커우의 일본인 여관에 강제 유치된 그는 일본경찰 끄나풀의 엄한 감시와 제지를 뚫고 마침내 탈출에 성공하였고, 한동안 상해에 머물러 있으면서 아나키스트 항일조직인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담하였다. 1934년 1월에 박철동은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2기생으로 들어가 ‘장걸(張傑)’이라는 가명으로 수학,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 신한독립당에 가입했던 그는 1935년 7월에 통일대당으로 탄생한 민족혁명당에 자동 가입되었다. 그해 당의 지령을 받고 공작차 화남으로 가던 그는 복건성 천주(泉州)의 나루터에서 일본경찰 형사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때도 그는 불굴의 정신으로 채찍과 고문에 맞섰지만, 일본 큐슈(九州)로 압송되어 재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다. 1938년 가을에 출옥한 박철동은 고향에 들렀다가 중일전쟁이 발발했고 중국항전이 진행되고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그때 그는 중국항전이 모든 동방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위한 신성한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그는 왜경의 감시망을 뚫고 은밀히 고향을 떠나 그해 겨울 중국 산서성의 운성(運城)으로 들어갔다. 운성에서 박철동은 현지 조선청년들을 규합하여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한편, 매일 저녁 몰래 전단을 살포하고 표어를 붙이는 등 반일공작을 진행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벽보를 붙이다 한간에게 발각되니 운성을 떠나 낙양으로 피신하였고 그곳에서 1939년에 조선의용대 제1지대로 들어갔다. 싸움 잘하고 일 잘하고 순박하기 그지없다 하여 동지들은 그를 ‘꼬리 없는 송아지’라는 별명으로도 불렀다. 중조산 등지에서의 대적공작에 참여하던 그도 1941년 5월에 황하를 건너 태항산으로 들어갔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일원으로서 대적선전공작에 참여하다 호가장 전투를 맞게 된 것이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그의 최후는 참으로 장렬하였다. 투철한 책임감으로 의열단 비밀공작 수행 이정순(李正淳) 이정순은 1918년 평안북도 벽동군 송서면에서 태어났다. 1932년에 향리의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의열단 간부인 맏형 이영준(李英駿)을 찾아 중국 남경(南京)으로 갔다. 거기서 의열단이 설립하여 운영 중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제2기로 입학하여 1933년 9월부터 6개월간 정치·군사 교육을 받고 1934년 4월 졸업하였다. 지독한 책벌레이고 생활태도가 반듯하며 책임감이 투철한 인재였다고 한다. 졸업 후 남경에서 왕현순(王賢淳) 또는 한대성(韓大成)이라는 가명을 쓰면서 의열단의 비밀공작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능력 부족이라는 자각이 들어 1935년 4월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제3기로 다시 들어가 동년 9월 졸업하였다. 이어서 신생 민족혁명당의 당원이 되어 검사국 요원으로 남경에서 공작하다 1936년 8월에 광동(廣東)으로 가서 국립중산대학 부속중학교를 다녔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조선민족혁명당의 소집에 응하여 남경으로 돌아왔고, 그해 12월 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의 한인특훈반에 들어갔다. 1938년 5월 군관학교를 졸업하여 한구로 이동하고 그해 10월의 조선의용대 창설에 참가했다. 제1구대원이 되어 호남성과 강서성 방면에서의 선전공작에 종사하던 그는 1939년 남악(南岳) 유격간부훈련반에서 3개월간 훈련받고 낙양으로 옮겨가 조선의용대 제1지대에 합류하였다. 거기서 계속 활동하다 1941년 조선의용대가 화북으로 진출할 때 동행하였다. 그리고 화북지대의 무선대원으로 활약하다 호가장 전투에서 순국한 것이다. 1920년대부터 한결같이 독립운동의 길을 걸어갔던 형 이영준도 1940년대 초에 중경에서 병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4열사의 추모와 되새기는 정신 순국 4열사의 시신은 호가장 마을사람들이 우선 수습하여 가매장했고, 3일 후 12월 15일에 화북지대원들이 와서 찬황현의 황북평촌(黃北坪村)으로 운구해 장례를 치르고 합동묘역을 조성하였다. 황북평촌은 팔로군 태항군구 제1분구 사령부의 소재지여서 일본군의 접근과 파묘를 막을 수 있는 안전지대였다. 1942년 9월 20일에는 화북 조선독립동맹 섬감녕구 분회가 연안의 청년구락부에서 조선열사 추도회를 거행하였다. 호가장 전투의 4열사를 비롯하여 그해 5월의 태항산 반소탕전에서 희생된 윤세주·진광화 등 11명의 조선열사를 기리기 위해서였다. 팔로군 총사령 주더(朱德)는 추도사에서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희생을 ‘영광과 불멸의 죽음’으로 칭송하였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의 9월 20일자도 ‘중국혁명을 위해 희생된 조선의용군 동지 추도 특간호’로 제작되어, 열사들을 일일이 소개하고 아이칭(艾靑)의 추도시, 주더와 전방총사령부 참모장 예젠잉(葉劍英), 동지 장중광과 장운, 그리고 중국인 항일전사 샤오산(蕭三)의 추도사를 차례로 실어 내보냈다. 특히 장운의 추도사는 손일봉과 박철동의 생애를 절절한 어조로 상세히 밝혀 회고하였다. 아울러 하북·하남·산서·산동성의 중공당 조직에서 이들의 영용한 사적을 각급학교 교과서에 실어 널리 알리게끔 하였다. 4열사의 1주기를 목전에 두고 있던 1942년 11월말에 조선민족혁명당은 소식지 『우리통신』의 제15호를 ‘추도호’로 발간하고, 「제문」과 김원봉의 추념사, 한지성이 작성한 「4동지의 장렬한 순국경과」 및 각인의 약력을 실었다. 「제문」에서는 “이 세상에 무엇보다도 원통스러운 것은 자기의 이상과 포부를 실현하기 전에 청춘의 생명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며, 또 이 세상에 무엇보다도 광영한 것은 국가·민족의 자유·독립과 인류사회의 진리와 행복을 위하여 용감히 싸우다가 장렬히 희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통한 것은 상대적이요, 광영한 것은 절대적이다”라고 하여 그들의 희생을 기렸다. 그 얼마 후 1942년 12월 12일, 중경 남안 대불단의 한국광복군 제1지대 본부에서 ‘형태전역 손일봉 등 순난 4열사 1주년 기념대회’가 성대히 거행되었다. 26일 아닌 12일에 열렸으니, 이제 날짜 인식이 바로잡힌 것이다. 그렇지만 호가장 전투는 여전히 ‘형태전투’로 호칭되었고, 그로써 1년 전 12월 26일의 형태전투 자체는 실체를 잃어버리는 모양새가 빚어졌다. 이것은 충칭의 조선의용대 머리와 화북의 그 몸통 부분이 어느새 둘로 갈리어 얼마나 멀리 떨어져 버렸으며 그만큼 또 ‘소통’도 안 되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씁쓸한 장면이었다. 그래도 기념식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 내무부장 조완구, 한국광복군 총사령 이청천, 부사령 김약산 등 100여 명이 참석하여 김구가 치사, 김약산이 순국경과 보고, 조완구·윤기섭·이두산·유자명 등이 추모연설을 해주었다. 마침내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우리 민족이 광복을 맞았을 때 귀국을 위해 1945년 9월 연안과 태항산에서 출발해 봉천(奉天)으로 행군 집결해 가던 조선의용군 대오는 황북평촌의 4열사 묘역에 일부러 들러 참배하고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들이 호가장 전투와 그 순국 4열사에 대해 갖고 있던 자부심과 경의가 얼마나 컸는지를 미루어 알 수 있게끔 해주는 일화이다. 1993년에 우리 정부는 네 열사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전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사에서 호가장 전투의 의의 돌이켜보면 호가장 전투는 조선의용대가 화북으로 가서 치른 최초의 대적전투였다. 그리고 가장 치열하게 싸운 혈전이었다. 적군과의 병력 대비가 엄청나게 차이나는 중에도 대원들은 장시간 고군분투하였고, 기습을 당했으면서도 지혜롭게 대응하여 희생을 최소화하였다. 그것은 후일의 항일광복전선에서도 귀감이 되기에 충분할 선례였다. 전투현장의 무선대원 전원이(단, 일찍 빠져 도망친 배역자 유빈[본명 신용순]만 제외하고) 감투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포위망을 돌파해갔고, 후위대의 다섯 용사는 죽음을 각오하고도 두려움 없이 마지막까지 응전하였다. 부상자들까지 포함하여 그들의 영웅적 행동 하나하나와 희생정신은 누가 들어도 가슴 뛰는 감동을 주리만큼 울림이 컸다. 그렇기 때문에도 두고두고 잊히지 않으면서 추념될 전투였다. 그러니만큼 호가장 전투는 팔로군과 중국인도 감격시켜 그 항일 의기를 더욱 고양시켰고, 조선의용대를 믿을 수 있는 우군으로 여기게끔 했다. 그래서 화북지역의 각급학교 교과서에도 실어서 그 기백과 무용을 절찬하고 본받게끔 한 것이다. 게다가 그 전투는 정규군 전투요원이 아닌 유격대식 선전공작대의 활동 중에 벌어진 것인데도 의용대는 적을 물리쳐, 일본군의 사기를 한껏 꺾어놓았다. 반면에 조선의용대로서는 부쩍 커진 자기역량의 재인식으로 더 큰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호가장 전투는 조선의용군과 한국광복군이 독립전선에서 마침내 거두게 될 최종적 승리를 예고해줌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호가장 전투는 태평양전쟁 발발 나흘 뒤에, 임시정부가 대일선전포고를 한 지는 이틀 만에, 연합국의 일원이 된 한국민족이 일본군과 맨처음 벌인 격전이었다. 그것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감당해낸 것이다. 그 전투에서 불행히도 포로가 되어 일본 큐슈(九州) 나가사키(長崎)로 끌려간 김학철은 총상 입은 한쪽 다리를 잘라낸 채 10년형의 옥고를 겪던 중에 해방을 맞아 개선 귀국하였다. 그리고 1946년에 신문연재로 발표한 실록 「호가장 전투」를 그는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호가장 전투의 생존자의 이름으로 묻고저 한다. 이래도 일본제국주의의 묘혈을 판 것은 우리가 아니라고 머리를 내저으려느냐고?…이래도 조선민족의 해방은 남의 손으로만 되어진 것이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