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전쟁과 의병장 [2021/07] 의병장 열전(7) │ 김하락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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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열전(7) │ 김하락 의병장 (1896년 7월 14일 순국, 건국훈장 대통령장)
계속되는 시련에도 굴하지 않았던 진정한 ‘대장부’
“살아서 왜적 놈들에게 욕 당하지 않겠다”
글 │ 최진홍(월간 순국 편집위원)
1895년 음력 8월 20일(음력) 명성황후가 참살되고 11월 15일 단발령이 강행되자 이 두 사건을 계기로 한반도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경기 중·서부지역의 의병이 활발하였는데, 그 중심에 있었던 의병장 김하락(金河洛 1846~1896)이 <월간 순국> 7월호에서 만나볼 인물이다.
이제 향을 사르는 마음으로 진중일기를 읽어가는 나는 내가 내는 숨소리조차 조심스럽기만 하다. 일기는 을미사변 뒤 1895년 11월 서울을 떠나 이천에서 의병을 조직하는 과정부터 시작된다.
김하락은 “을미(乙未)에 나라 운수가 큰 액을 만나 난신(亂臣)이 정권을 잡게 되자, 혁신(革新)이란 표어를 만들어 내어, 어진 선비를 배척하고 섬 오랑캐와 암통하기 시작하면서, 왜적이… 군사 10만 명이 바다로 육지로 한꺼번에 진출하여, 각 항구와 각 요새지에 기지를 만들고, 동래(東萊)로부터 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 3천 리에 뻗쳐 수십 개소에 진을 치고, 마침내 도성(都城)으로 돌진해 들어왔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한다.
한양에서 동래까지 천리 길, 한양에서 목포까지 천리 길, 한양에서 의주까지 천리 길을 합하여 우리는 우리 강토를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불러왔다. 이 아름다운 강산이 이제 왜적들에 의해 시련을 겪게 되자, 김하락은 자신의 이종 동생 ‘조성학(趙成學), 동지 구연영(具然英)·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 몇 사람과 더불어 단발령이 내려진 다음날인 11월 16일 이른 아침에 한강을 건넜다.
그리고 그 다음날 17일에 곧바로 이천군에서 화포군(火砲軍) 도영장(都領將) 방춘식(方春植)을 불러들여, 포군 명부를 가져다 놓고 포군 1백여 명을 징발하여, 여러 대로 나누어 우선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나서 안성에서 창의한 민승천 등과 합세하여 1896년 1월 이천 수창의소(守倡義所)라는 연합의진을 꾸렸다.
이천에서 포군 중심 의병 조직
강한 전투력 앞세워 적병 무찌르다

12월 4일. 이른 아침에 조성학은 적과 더불어 맞아들여 두어 시간 동안 격전을 하다가, 갑자기 쇠북을 울리며 퇴군하여 백현으로 향해 달아나니, 적병이 고함을 치며 뒤를 따라 쫓아와 백현 아래 당도하였다. 그때에 문득 대포 소리가 울리며, 구연영(具然英)은 전면을 가로막고, 김귀성·신용희는 산 중턱으로부터 쏜살같이 내려오고, 조성학은 적의 돌아갈 길을 횡단하여 사방에서 협격하니, 적은 포위망 속에 빠져서 진퇴의 길이 없었다. 나는 군사를 지휘하여 엄습해 무찔러, 적병은 죽은 자가 수십 명이었고,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상한 자가 없었다. 한참 동안 무찌르다 보니 날은 이미 저물어 초생달은 서쪽 하늘에 떠 있는데 서릿바람은 뼛속을 뚫는 듯하였다. 이윽고 달은 지고 저녁 10시경이 되자, 적은 한 가닥 길을 찾아서 암암리에 도망하므로, 좌우의 우리 군사는 밤새도록 뒤를 쫓아 광주(廣州) 장항(獐項) 장터에 도착하였는데, 바로 초닷샛날 새벽이었다. 샛별은 반짝이고 닭울음은 여기저기 들리는데, 위아래 행진(行陣)에서는 포성이 끊어지지 않았다.
다음날 동민의 말을 들으니 “그저께는 적의 군사가 1백 80명이었는데, 어제는 겨우 36명만이 패해 달아났고, 또 오늘 아침에 죽은 적을 제외하면 살아 돌아간 자는 응당 두어 명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12월 29일 새벽에 이천으로 공격해 오는 일본군 수비대 200여 명과 대접전 끝에 퇴각하게 되는 시련을 격게 된다. 김하락이 겪은 첫 시련의 기록을 읽어보자.
12월 28일. 척후병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병 2백여 명이 어제 발정하여 광주부에서 잤으니, 지금쯤 몰아올 것이다” 하므로 즉시 군중에 영을 내려 좌우로 복병하게 하고, 진용을 엄밀히 단속하여 대기하였다.
30일. 새벽녘에 적병이 또 와서 공격하므로…큰 싸움을 벌였는데… 서북풍이 크게 불어…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뜰 수 없게 하므로… 부득이 군사를 거두어 본진으로 돌아왔다. 적은 마침내 이현에 들어가 불을 놓아 한 동리가 고스란히 불타 버리고 닭·개까지도 다 없앴으니, 아! 참혹한 일이었다.
여러 장령과 군졸이 태반이나 흩어져 도주해 버리니, [안성 의병대장 민승천]은 자기 친위병을 거느리고 죽산 쪽으로 떠나가고, 구연영은 원주 쪽으로 떠나가고, 그 나머지 장졸도 사방으로 흩어져 한 사람도 없으므로, 나는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고 통곡하였으나 형세가 어찌할 수 없었다. 부득이 민가에 잠시 기숙하는데, 이날은 바로 섣달 그믐날이라 온갖 감회가 가슴속에 얽히여 촛불로 벗삼아 밤을 샜다.
김하락은 자신의 50세 나이의 마지막 날을 그렇게 보내고 있었다. 해가 바뀌었다. 1896년 새해에 김하락은 1월 2일 여주에서 거의한 심상희 의병장에게 이천에서 함께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잔여 의병들을 모으고 심상희의 이천의진과 함께 연합의진을 조직하였다. 의진을 재정비한 김하락은 1월 3일 광주의 남한산성으로 진을 옮겼는데 이때 병력은 2천여 명이나 되었다.
남한산성 함락 후 영남으로 이동
연합의진 모집해 청송에서 대승

19일. 나는 갑작스러운 병으로 인하여 산을 내려가 조리하고 있다가, 21일에 산성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기가 가슴에 차서 발을 구르며 호통하다가 부지중 땅에 쓰러지기에 이른다. 적병이 피해 달아난 뒤로 역당(逆黨)과 더불어 모의하기를, ‘의병의 진영이 심히 강하여 쉽게 사로잡을 수 없은즉, 의병장과 암통하여 이해로써 꼬이는 것이 상책이다’ 하고, 마침내 비밀리 박준영에게 기별하기를, ‘만약 귀화한다면 너에게는 당연히 광주유수(廣州留守)를 줄 것이고, 김귀성에게는 수원유수를 주겠다며 회유를 했다. 20일에 박준영이 소를 치고 술을 걸러 크게 포졸들을 먹여… 각문의 파수 장병이 모두 취해 넘어져 인사불성이 되자 새벽에 서·북문을 활짝 열어 놓았는데도 한 진영의 장졸들은 전혀 몰랐었다. 고함 소리가 크게 일어나므로, 취해 넘어졌던 군졸들이 놀라 일어나보니 온 성중이 모두 적병이었다. 2천여 장졸은 비로소 박적에게 속은 것을 깨닫고, 즉시로 박준영 3부자(三父子)를 끌어내어 한꺼번에 총살하고 급히 성 밖으로 나가니, 적병들이 도리어 호송해 주며, ‘빨리 달아나라. 일본 놈을 만나면 죽는다’ 하였다.
남한산성은 내주었지만 김하락은 굴하지 않고 고향인 영남으로 이동하여 의병항쟁을 계속하기로 하고, 제천·단양·풍기·영천·안동을 거쳐 의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3월에 의성에 도착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군수품을 확보하였다. 이어서 이천·의성·청송 등의 의진과 연합의진을 조직하였다. 연합의진은 4월 2일 청송에서 기습 공격을 가하여 대승을 거둔다.
하지만 전세가 불리해지자 경기도 출신 의병들이 먼저 귀향을 해버리면서 남겨진 의병이 고작 30명밖에 되지 않는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결국 세의 열세로 인해 전세가 불리해지자 김하락은 퇴각하여 황학산, 금학산, 황산, 영천 등지를 거쳐 5월 5일 경주에 도착하였다.
경주에서 유림세력과 연합
복수기 앞세워 대의 천명하다
김하락 의진은 경주에서 김병문(金炳文), 이시민(李時敏), 서두표(徐斗杓), 박승교(朴承敎) 등 유림 세력과 다시 연합하여 경주 연합의진을 결성한 후에 5월 7일 드디어 경주를 포위, 공격하였다. 이때 복수기(復讐旗)를 앞세워 대의를 천명하였다.

6월 1일. 한 늙은이가 와서 말하기를 “내일 아침 대장기가 땅에 떨어지면 네 목숨이 다 된 줄로 알라” 하기로, 인해 놀라 깨어 심신이 황홀하였다. 2일. 이른 아침에 조성학이 장막으로 들어오기로, 나는 꿈꾼 이야기를 말했더니, 조장군은 “이 꿈이 흉한 꿈이니 행군을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나는 말하기를 “내가 의병을 일으켜 이미 1년이 되었으나 오직 민생에게 노고만 끼쳤을 뿐이요, 성상의 잠 못 이루는 근심을 덜어드리지 못하였기로 노상 생각이 초조하여, 한 칼로 적의 배를 가르지 못해 한이거늘, 하물며 실상이 없는 꿈 때문에 적을 보고서 퇴진한단 말인가. 또 죽고 사는 것이 명에 있으니 무엇을 한탄하랴. 내가 비록 단명하더라도 그대는 이로써 의기를 상실하지 말고 대사를 스스로 책임지고 신민의 의무를 다하기 바란다” 하고, 드디어 군사를 재촉하여 길을 떠났다.
그런데 여기에서 일기는 끝이 나고 만다. 일기는 ‘절필(絶筆)’ 이렇게 적혀 있었다. 경건한 자세로 일기를 읽던 나의 숨은 여기서 멎어오고 말았다. 한참 동안 숨을 고른 후에야 당시 남은 자들이 일기 뒷부분에 덧붙인 기록을 마저 읽을 수 있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날 행군할 무렵에, 갑자기 거센 바람이 크게 불어 대장기 폭이 문득 땅에 떨어지니, 뭇 군사가 얼굴빛이 변하여 당황하였다. 조성학은 말 앞에 엎디어 울며 회군하기를 요청하니,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내 운명이 이미 다 되었다. 다만 원수인 적을 섬멸하지 못하고, 성은(聖恩)을 갚지 못했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 그러나 하늘이 도와주지 아니 하고 운명의 길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구구하게 목숨을 도피하랴” 하고, 또 말을 재촉하여 전진하므로, 장졸들이 눈물을 흘리며 따라가서 영덕읍에 이르러 진지를 정하였다.
이튿날, 적과 더불어 교전하여 종일토록 무찔러 죽인 수효가 매우 많으니, 적병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갔다. 그래서 전군이 모두 크게 기뻐하며 하는 말이 “사뭇 흉하면 도리어 길하다 하더니, 과연 그렇다” 고 하였다.
그 이튿날은 바로 6월 4일이었는데, 오후에 폭우가 갑자기 쏟아졌다. 이윽고 척후병이 급히 와 보고하기를, “병정 수백 명이 수륙(水陸)으로 밀려들어 기세가 비바람과 같다”고 하니, 여러 군사들이 서로 돌아보고 벌벌 떨며, 포 한 발도 쏘아 보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는데, 외쳐 만류해도 금할 수 없으므로, 공은 마침내 분연히 나서니 뒤를 따른 자가 불과 수십 명이었다. 포탄을 무릅쓰고 달려가 좌우로 충돌하다가 탄환 2발이 연달아 좌우 갈빗대에 명중하자, 큰 소리로 하늘을 부르짖으며 “우리 5백 년 예의 나라가 견양(犬羊)과 같은 섬 오랑캐에게 먹힌단 말이냐. 아! 우리 수천 만 민족이 과연 희생의 참혹을 면하지 못한단 말이냐. 나는 차라리 고기 뱃속에 장사할망정 살아서 왜적 놈들에게 욕을 당하지 않겠다” 하고, 곧 강에 몸을 던져 죽으니, 따라간 군졸들도 한때에 같이 물에 빠져 죽었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던
‘대장부’의 참모습

이러한 대장부는 뜻을 얻으면 백성들과 같이하고[得志與民由之], 만약에 뜻을 얻지 못한다면 혼자서도 그 도를 홀로 행하는 자[不得志獨行其道]이다. 아무리 부귀해도 결코 음란하지 않으며[富貴不能淫], 빈천해도 결코 절개를 변하지 않으며[貧賤不能移], 위세와 무력으로 협박해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 자[威武不能屈]를 맹자는 대장부라 칭했으니, 아마도 맹자는 지금까지 우리가 만나본 김하락의 삶을 2천여 년 전에 말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