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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2021/08] 건국훈장 대통령장│박승환(朴昇煥)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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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해산 반대하며 자결 

항일 의병 전국 확산 기폭제가 되다


글 | 편집부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 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 

(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

­- 선생의 유서 중에서


핵심공적

대한제국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재직 중 군대해산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 


주요약력

● 1869년 9월 7일   서울 반촌 출생

● 1887년   무과 급제

● 1897년   대한제국 시위대 배속

● 1907년   대한제국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재직

● 1907년 8월 1일   자결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젊은 나이에 무관 되고 

다시 근대적 군사교육 수료 


박승환 선생은 1869년 9월 7일 서울 반촌(성균관 인근)에서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때는 외세의 내정간섭과 경제적 침탈로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고 민생경제는 도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때다. 


선생은 양주 목사를 지낸 외숙 홍태윤으로부터 한학을 익히면서도 궁술과 총술 등 무술연마도 함께 했다. 그리하여 1887년 19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해 여러 무관직을 역임했다. 1895년 8월에 발생한 일본 낭인들에 의한 명성황후 살해 만행은 군사력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인식하는 기회가 돼 군사력 증강을 위한 군비의 확충과 근대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근대적 군사교육과 훈련을 습득해 조국과 민족을 지키고자 결심했다. 


당시 무관 양성기관으로 훈련대사관양성소가 있었는데 주한 일본공사 이노우에 카오루의 건의에 따라 만들어져 일본군 교관에 의해 조종되고 훈련되어 친일적 성향이 강한 곳이었다. 간부와 일부 병사들이 명성황후 살해 사건에 관련돼 훈련대사관양성소도 폐교됐다. 이후 새로운 장교 양성기관으로 일제의 영향이 배제된 무관학교가 설립됐는데 선생은 여기에 지원했다.


대한제국 황제 지키는 부대의 지휘자


박승환 선생이 무관학교에 입학한 때는 1896년 9월 28일이었다. 당시 무관학교 교장은 이학균 참령으로 1888년 개설된 사관양성소인 연무공원의 미국인 군사고문 다이 장군의 조교로 활동한 이래 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강렬한 반일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다.


박승환 선생은 약 6개월간 초급 장교로서 필요한 근대적인 군사교육을 수료한 뒤, 1897년 3월 21일 육군 보병 참위(현 소위)로 임관했다. 광무황제는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뒤 궁궐 내에 상주하는 경호부대인 숙위를 강화하기 위해 3월 16일 시위대로 재편했는데, 선생은 정예화된 황실 근위부대인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장교로 선발 배치됐다.


이후 1899년 11월 11일 육군 부위(현 중위)로 진급해 시위 제1연대 제2대대 소대장으로 보임됐다. 그리고 1900년 7월 23일에는 육군 정위(현 대위)로 승진해 친위 제1연대 제1대대 중대장으로 전임되었다가, 같은 해 8월 14일 다시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중대장으로 임명됐다. 1904년 2월 15일 선생은 육군 참령으로 진급해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의 중임을 맡게 됐다.


광무황제 퇴위로 시작된 반일 무장투쟁


이 시기 일제는 1904년 2월 23일에는 대한제국 정부를 강박하여 “대한제국 내에서 군사적으로 필요한 긴급조치와 군사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게 해 본격적인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감행했다.


같은 해 8월 22일에는 제1차 한일협약을 강제해 우리나라의 외교권과 재정권을 장악했고 마침내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함으로써 한국을 사실상 식민지화했다. 광무황제는 헤이그에 특사를 보내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려고 했으나,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광무황제를 퇴위시키게 된다.


광무황제는 1907년 7월 19일 “군국(軍國)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하게 한다”는 양위조칙을 발표하기로 한다. 대한제국 황실의 근위부대인 시위대 지휘관들은 7월 19일 새벽을 기하여 경운궁으로 진주하여 광무황제를 호위함으로써 일제의 퇴위 공작을 무산시키려 했지만, 친일 군부대신 이병무가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게 알리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날 오후 광무황제의 양위가 확정되자 시위대 장병들은 병영을 이탈하여 격렬하게 반대시위를 전개하던 일반 군중과 합세하여 종로의 순사파출소를 습격하고 일본군경을 공격하는 등 반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대한제국 군대해산 소식 듣고

권총으로 자결 순국


광무황제의 퇴위 문제로 발생한 대한제국 군대의 반일적 동향과 시위대 장병들의 무장투쟁에 큰 위협을 느낀 일제는 한국을 완전 식민지화하기 위해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기로 한다. 7월 24일 정미7조약을 체결하게 하면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기 위한 비밀각서를 교환했다.


8월 1일 아침 7시 군부대신 이병무는 각 연대장과 대대장 및 기병, 포병, 공병대장 등을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의 관저인 대관정으로 소집하라고 명령했다. 


박승환 선생은 병을 핑계로 중대장인 김재흡을 대리 참석시켰는데 부대로 돌아온 김재흡 중대장의 보고를 통해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사실을 알게 됐다.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대성통곡하고 ‘대한제국만세’를 외친 다음 차고 있던 권총으로 자결, 순국했다.


선생의 순국 사실을 들은 휘하의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일제히 대대장과 함께 죽을 것을 맹세하고 봉기하여 반일 무장투쟁을 개시했고 이에 호응한 다른 시위대의 병사들과 합세해 남대문 전투가 벌어졌다. 이후 상당수의 시위대 병사가 의병운동에 투신하게 된 직접적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병운동을 전국적인 국민운동으로 확산시킨 기폭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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