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순국선열 [2021/08] 건국훈장 독립장│박상진(朴尙鎭)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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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복 벗고 의열투쟁 전개
대한광복회 이끈 초대 총사령관
글 | 편집부
“오인(吾人)은 대한독립광복(大韓獨立光復)을 위하여 오인의 생명을 희생에 공(供)함은 물론, 오인이 일생의 목적을 달성치 못할 시는 자자(子子)손손(孫孫)이 계승하여 수적(讐敵) 일본을 완전 구축하고 국권을 회복할 때까지 절대 불변하고 결심 육력(戮力)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서고(誓告)함”
- 1915년 선생이 주도한 대한광복회의 결의문에서
핵심공적
혁명적 독립항쟁단체인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의열 투쟁을 전개했다.
주요약력
● 1884년 12월 7일
경상남도 울산 출생
● 1912년 대구에서 상덕태상회를 설립해
독립항쟁의 거점 마련
●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 참여, 대한광복회 총사령
● 1917년 친일 부호 처단 및 군자금 모집 활동 등
의열투쟁 전개
● 1921년 8월 13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 순국
●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허위 문하에 들어가 민족의식 키워
일제 식민지 되자 판사직 거절
하지만 선생은 봉건지배질서를 고수하려는 사상에 빠져있지는 않았다. 평리원 판사와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봉건의식에서 벗어난 것도 그 이유였는데, 생활 태도는 유림의 방식을 따랐지만, 사고방식에서는 근대적 신학문을 거부하지 않았다.
1907년 양정의숙 전문부 법과에 입학해 법률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등으로 우리나라가 일제의 준식민지 상황이 되자 선생의 스승인 허위가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전국 의병부대의 연합체인 13도창의군을 지휘하면서 서울진공전을 수행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지만, 1908년 6월 일제에 잡혀 같은 해 10월 순국했다.
박상진 선생은 스승 허위의 시신을 수습해 고향인 경상북도 선산군으로 모셔 장사 지낸 후, 1년간 상을 지냈다. 1910년 판사 시험에 합격해 평양법원에 발령받았으나 경술국치로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판사직을 거절한다.
중국 신해혁명 보며 혁명의 필요성 절감
더 강력한 독립항쟁단체 구상

이후 중국혁명을 배워야 우리나라에서도 혁명을 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신해혁명기에 선생은 중국을 여행하면서 그동안 배웠던 신학문과 이때의 경험이 합해져 군주제와 신분제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떨쳐낼 수 있었고 대한광복회 조직으로 이어지게 된다.
1912년 귀국한 선생은 독립항쟁의 재정 지원과 정보 연락을 위해 대구에 상덕태상회란 이름의 곡물상회를 세운다. 당시 상덕태상회는 국내의 연락뿐 아니라 만주 안동의 삼달양행이나 장춘의 상원양행 등 곡물상과 연락망을 구축하며 독립항쟁의 거점이 됐다.
그러던 중 선생은 1915년 1월 15일 대구 안일암에서 계몽운동과 독립항쟁을 벌이는 단체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에 참여했다. 한편으로 선생과 정운일, 김재열 등 이 단체의 의병 계열 인사들은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려 지역단위의 독립항쟁만으로는 어렵다고 생각하고 더욱 강력한 혁명적 독립항쟁단체의 조직을 구상했다.
1915년 7월 15일
대구에서 대한광복회를 조직하다

박상진 선생은 반민족적 지주들을 응징하여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는 한편 무력적 방법으로 군자금을 모으고, 그것으로 독립군 기지를 개척한 후 여기에서 독립군을 양성해 민족독립을 달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혁명적 독립항쟁단체의 결성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선생을 비롯한 조선국권회복단의 의병 계열 인사들은 1915년 7월 15일 풍기광복단과 제휴해 대구에서 대한광복회를 조직했다. 조직원들의 성향과 투쟁 방향이 비슷한 두 단체였기에 대한광복회의 탄생이 가능했다.
대한광복회는 우선 군자금을 조달해 만주에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여기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외 요지에 독립항쟁거점을 확보하여 정보 연락망을 구성한 뒤 무력으로 민족독립을 쟁취하려고 했다. 또한 일제타도의 계획을 추진하는 행동강령으로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의 4개 항목을 추구했다.
박상진 선생은 대한광복회 초대 총사령에 추대됐다. 대한광복회는 창립 이후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선생이 설립한 대구의 상덕태상회를 본거지로 하여 전국 각지와 국외에 곡물상점을 경영하면서 군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정보 연락망으로 활용했다.
반민족적 친일 부호 처단하고
군자금 모집 등 의열투쟁 전개
하지만 대한광복회의 군자금은 주로 자산가들의 의연금으로 충당하고 있었는데 부호들의 비협조와 친일 부호들의 밀고로 모집이 더욱 어려워졌다. 이 같은 상황이 전개되자 선생은 군자금 강제 모집 방법을 시작하는 한편 이를 위해 만주에서 무기를 구입해 들여오기로 한다.
1916년 만주에서 구입한 권총을 들여오다가 서울에서 일본 경찰에게 발각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출옥 후 군자금 강제모집을 계속하면서 1917년 11월 전 경북관찰사며 친일부호 장승원 처단에 이어 1918년 1월 충남 온양 악덕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했다.
하지만 이 활동으로 일본 경찰은 대한광복회 색출에 총력을 기울였고 조직이 탄로나 선생은 일본 경찰에게 체포당했다. 이때 박상진 선생은 포박을 거부하고 기르던 백마를 타고 갔다고 한다. 이후 대구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4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13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