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나는 삶 이야기 [2021/08] 독도지킴이, 독도최종덕기념사업회 최은채 사무국장
페이지 정보
본문
무인도였던 독도를 삶의 공간으로 가꾼
아버지 걸음걸음 세상에 알리고파
글 | 편집부
사진 | 편집부, 최은채 제공
“아버지랑 갈매기 알을 주우러 갈 때마다 빼먹지 않고 ‘여기다’ 했던 곳이 있었어요. 우리 집 뒤로 동도도 보이고, 일본으로부터 독도도 지킬 수 있고, 러시아에서 배가 오면 그것도 훤히 볼 수 있는 곳이 당신 묻힐 자리라고 말씀하셨어요.” 2016년 독도 서도 옛 문어건조장 터에 ‘영원한 독도인’ 최종덕(1925~1987) 어른의 업적을 기리는 작은 기념석이 세워졌다. ‘죽어서도 독도에 뼈를 묻고 싶을 만큼 독도를 사랑했던 아버지의 마음에 위안이 되기를’. ‘독도의 딸’은 그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한다. 천연기념물 제336호인 독도는 자연환경 훼손을 우려해 일반 시설물 설치가 허가되지 않기에 이례적인 결정이었으며 동시에 당연한 결과물이었다. 국가의 지원, 여론의 관심 하나 없던 시절에 독도에 들어가 산사태로 무너지고 파도에 휩쓸려가는 것이 일상이던 무인도에 터를 잡고 계단을 쌓고 물길을 만들었으며 집을 만들고 방파제를 지었다. 독도의 실질적인 영유권을 대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건 최종덕 어른의 삶이 고스란히 독도에 녹아있기 때문이었다.
독도 주민의 국가적 가치를 알고 계셨다

1964년 첫 입도 후 90여 일간 머물었던 최종덕 어른은 독도 물골이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충분한 수량을 갖고 있다고 판단하였고 주거의 가능성을 본 후 독도 이주를 결심했다. 독도에서의 생활을 위해 1965년 울릉군 수협 도동어촌계로부터 독도 공동어장 채취권을 획득하자마자 곧바로 독도에 둥지를 틀었다. 독도 입도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물골의 샘물 정비였다. 물골을 식수로서 안정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노력은 곧 독도를 삶의 공간으로 정착시키고자 한 의지의 시작이었다. 물골을 정비하며 움막을 지어 생활했지만 여의치 않아 동도와 서도 여러 곳을 답사했다. 화산에 의해 생성된 섬인 독도는 돌이 쉽게 떨어져서 집을 지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각고의 노력 끝에 찾은 곳은 덕골. 1966년 현재 어민숙소 자리에 토담을 쌓고 슬레이트 몇 장을 얹은 집을 지었다. 물골과는 반대방향이어서 물을 운반하기는 힘들었지만 남향으로 추위와 파도, 바람의 영향을 적게 받는데다 태풍이 와도 끄떡없는 장소였고 더군다나 배를 올릴 수 있는 곳이었다. 울릉도에서의 생활경험을 토대로 지은 함석집은 몸만 뉘일 수 있는 보잘 곳 없는 집이었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지어진 집이었고 거주의 시발점이었다. 그 후 독도에 적합한 생활공간을 차츰 늘려가며 온돌방, 건조장, 창고 등 주거 공간을 다듬었으며 어선을 올릴 수 있는 선착장을 마련할 정도로 발전시켰다. 더 나아가 파도가 심한 독도에서 배를 뭍으로 매달아 올리는 장치를 고안해 당시 보유하고 있던 배 ‘덕진호’를 오르내리기도 했다.
해녀, 사공들을 고용해 독도의 생업을 위해 전부터 관심이 있던 전복 양식을 시작했다. 독도에 큰 전복이 없는 것이 전복의 천적인 불가사리와 문어의 존재 때문임을 알게 되면서 전복을 키우려면 문어를 잡아야했고 독도의 명물이었던 문어건조장은 그렇게 탄생했다. “파도가 치더라도 바람이 좋아 건조가 잘 되는 곳이기에 문어건조장 자체가 큰 유산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었어요.”
사람의 거주와 거주시설의 유무는 영토분쟁에 있어서 절대적인 실효적 지배의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도 최종덕 어른의 독도에서의 삶은 큰 의미를 갖는다.
물길 계단, 선착장, 방파제 등 손 닿지 않은 곳 없어
덕골은 주거공간으로서는 최적지였지만 유일한 식수가 있는 물골과 정반대였다. 배를 타고 물길을 다닐 수도 있었지만 파도와 바람이 언제 변할지 모르는 것이 독도의 생활이었다. 배를 띄울 수 없는 날이면 깎아지른 절벽을 밧줄 하나에 매달아 몸을 의지하고 물을 길어왔다. 불편하지만 견딜만한 생활이었던 이곳에 계단을 놓아야겠다고 결심했던 데에는 갑작스러운 돌풍으로 뗏목을 이용해 물골에 갔던 독도경비대원들의 사망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처음 계단 공사는 건설사에 의뢰했지만 일주일 만에 두 손을 들고 독도를 떠났다. 결국 고순자, 문영심 해녀님들과 울릉도 인부들의 도움을 받아 최종덕 어른이 가파른 절벽에 한 계단 한 계단 몸소 시멘트를 등에 져 올려 998개의 계단을 완성했다. 3년에 걸쳐 진행된 공사였다. 1년에 두 달밖에 작업을 할 수 없는 환경 때문이었다. “풀이 나면 미끄러워서 못하고요, 갈매기 산란철이면 어찌나 돌들을 던져대는지 못하고요.”

계단뿐이랴. 1981년 동도 동키바위 선착장 공사와 독도 방파제 공사, 1982년 동도 헬기장 공사 등 독도에서 이루어진 크고 작은 공사에는 최종덕 어른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곳이 없다.
그 외에도 보다 나은 독도 생활을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했다. 독도에서 잡은 문어나 해삼 등이 생물인 관계로 판로 개척이 어려워 염장을 했고, 미역도 염장미역으로 만들었다. 그 덕에 독도의 해삼은 굵은 홍해삼으로 중국에 수출을 하기도 했다. 물골과 주거지인 덕골 사이에 간이상수도를 연결하기도 했다. 정착 생활이 안정되기 시작하면서 보다 전문화된 어업활동을 위해 냉동 창고, 수중 창고, 문어건조장 등을 만들고 특수어망을 개발해 자연산 전복을 양식하는 등 개인이 하기에는 놀라운 일들을 해냈다.
“강인하고 부지런한 분이었어요.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일들을 찾아내서 하셨어요. 전문가들도 손 떼는 일들조차 결국은 해내는 분이었지요.” 자상한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분명 자랑스러운 아버지였다. 깊은 속정 또한 나이가 찬 후에는 알 수 있었다.
탈출하고 싶던 섬에서 돌아가고 싶은 섬으로
최은채 사무국장이 독도에서 아버지 최종덕 어른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한 것은 1979년, 18세 때였다. “제주에서 온 해녀들과 선원들, 문어 잡는 사람들까지 8명에서 많게는 30명 가까이 생활했어요.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벙커씨유나 폐유 같은 기름을 넣은 버너로 밥을 했어요. 거스름이 생기니 콧구멍이 매일 시커먼 색이었죠."
지금이야 웃으며 추억하지만 당시 최은채 사무국장의 나이를 생각하면 진저리칠 만도 했다. 밖으로 나돌며 온갖 말썽을 부리던 딸이 철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달만 가 있자고 했던 아버지의 손길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한 달이 13년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도망치고 싶은 순간들도 많았지만 힘들기만 한 건 아니었다. 당시엔 흔했던 괭이갈매기 알을 샴푸로 사용하던 특별한 경험들, 그나마 또래였던 독도경비대원들과 바다수영 시합, 최종덕 어른이 제주에서 모셔온 고순자 해녀님 등과의 일상,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림같이 펼쳐지는 독도의 아름다운 풍경들….
“부산에서 오가던 큰 새우잡이 배 스크류에 그물이 감겨서 견인선을 불러와야 할 상황이 있었어요. 아버지랑 해녀 아주머니들이 직접 끊어주고 사례하겠다는 걸 극구 사양하고 남은 기름이나 한 드럼 달라고 하셨대요. 기름 한 드럼을 얼마나 기분 좋게 가지고 오시던지. 아직도 생생해요. 독도새우를 잡으러 오는 배들의 기계가 고장 날 때도 뗏목 타고 나가 울릉도 갈 만큼 고쳐주곤 하셨어요. 돈 한 번 받지 않고 올 때 술이나 한 짝 사오라면서 보내셨죠. 그렇게 도움을 받았던 배들은 다시 올 때 이것저것 많이 챙겨다 주셨어요. 지금껏 아버지 욕하는 분을 정말 단 한 번도 못 봤어요. ‘독도 하면 최종덕이지’하고 치켜세워 주세요. 최종덕기념사업회를 하면서도 울릉도에서 아버지 이름 덕을 얼마나 많이 보는지 몰라요. 우리 아버지 참 잘 사셨구나, 생각합니다.”
울릉도에서, 독도에서 문득문득 마주하는 아버지의 흔적은 어느덧 아버지 나이를 바라볼 만큼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뭉클하다.
지키고 싶고 알리고 싶은 진실
사실 독도에 주민등록을 옮기는 일도 쉽지는 않았다. 1977년도부터 1년에 8~9개월을 살고 있는 주거지임을 증명하며 옮겨달라고 계속해서 주장했다. 결국 1981년 10월 14일에 최초로 독도에 주민등록을 등록할 수 있었다. 자다가도 읊을 수 있는 주소, 도동산 67번지다.
죽어서도 독도에 묻히고 싶어 했던 아버지였기에 비석이라도 세워주고 싶었지만 독도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자연을 훼손하는 비석을 세울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23년을 독도에서 독도를 위해 살았는데 작은 비석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제야 부랴부랴 알아본 현실은 참담했다. “아버지가 한 일은 독도에 주민등록 옮긴 것 밖에 없다고 하더라고요.”
독도에서 살면서 본 것들을 말해도 믿어주지 않았다. 생업을 접었다. 어린 시절 독도에서 함께 했던 인연들에게 연락을 하고 악착같이 자료를 모았다. 2004년도 독도최종덕기념사업회를 만들고 해양수산부 비영리단체로 등록했다. 독도에서 살았던 산 증인으로서 직접 발로 뛰면서 자료를 모으고 사실을 밝혀야 했기에 대표가 아닌 사무국장 직함을 선택했다. 서울역 독도 관련 전시에 모은 사진 78점을 내보이면서 활동을 시작했고 당시 최은채 사무국장이 가지고 있던 자료를 보면서 도움을 주는 분들도 생겼다. “결국 진실은 밝혀집니다. 이런 자료는 어디에도 없어요.”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밀어주고 격려해주는 이들이 생겼다.
최종덕 어른의 삶이 곧 독도의 역사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일은 만만하지 않았다. 잘못된 정보로 만들어진 독도 연구서를 역사의 증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의 모든 자료를 가지고 있기에 담담하게 법정싸움을 진행 중이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독도 주민 1호로서 살다간 아버지의 흔적들을 알리기 위한 활동들과 보이지 않는 물밑싸움은 여전히 치열하게 진행 중이다.

어느새 기념사업회를 이끌어온 지도 11년여. 순간의 이슈에 흔들리지 않고 정확한 독도의 근현대사를 밝히고자 쉼 없이 뛰어왔다. 언론과 독도박물관의 잘못된 자료에 근거를 가지고 정정을 요청했고 언론은 정정 보도를, 독도박물관은 자료조사 후 새로운 책을 발간했다. 독도재단의 자료 역시 6개월간의 싸움 끝에 모두 정정했다.
“그저 진실을 알리고 싶다”고 최은채 사무국장은 말한다.
최근에는 독도 어장관리인으로 임명되었다. 1개월 중 10일에서 15일간 독도에 머물며 하루 2회 이상 어장 순찰과 입수자 관리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냥 지키고 앉아만 있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아버지가 어떤 노력을 하며 살았는지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어요. 제대로 어장을 관리하면 해산물을 채집해 울릉도에 오고가며 팔 수 있고 관광업도 할 수 있어요.”
최은채 사무국장은 이어서 “아버지가 살기 위해 어떤 연구를 했는지, 어떻게 마을을 만들려고 했는지 알고 독도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 생각하는 사람이 주민이 되어야 한다”고 전하면서 “독도를 알고 싶으면 겨울철 독도에서 두 달만 생활해 볼 것”을 추천하는 얼굴에 자신만만한 웃음이 만연하다.
아버지가 피땀 흘려 집 지었던 터에 독도 어로인 숙소를 세우면서 정작 최종덕 어른의 이름은 배제시킨 것도, 아버지가 한 계단 한 계단 손수 올린 계단 이름이 최종덕 계단이 아니라 998계단인 것도 최은채 사무국장에게는 숙제와도 같다. 다시 독도 주민이 되어 하고 싶은 일이 많다. 그 옛날 최종덕 어른이 몰던 배 ‘덕진호’의 이름을 그대로 딴 ‘독도의 딸’ 최은채의 ‘덕진호’가 독도 선착장에서 찬란히 빛나는 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