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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 Theme.4 21세기 한국적 보훈의 지향과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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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공동체에 기여할 ‘K-보훈’을 생각하다


다양한 가치 관통하는

따뜻한 보훈 개발하고 국민 공감대 넓혀가야 


글 | 이찬수(보훈교육연구원장) 


보훈은 대한민국의 ‘독립’, ‘호국’, ‘민주’를 위한 희생과 공헌에 대한 보답이다. 이들 세 가치에 대해 국민이 공감하고 이들을 화학적으로 결합시킬 때 ‘국민의 나라사랑정신 함양’, ‘국민통합’이라는 소기의 목적도 달성될 수 있다. 그러나 이론과 달리 현실은 다른 길로 나아갈 때도 있다. 독립, 호국, 민주의 정신은 한국 안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한국적 가치이지만, 이 정신을 실제로 적용하는 과정은 간단하지 않을뿐더러, 이들의 관계도 복잡하다. 통합은 국민의 다양한 입장을 가능한 대로 존중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보훈이 국민통합을 목적으로 한다면, 다양한 가치들을 관통하는 따뜻한 보훈의 논리를 개발하고 공감대를 넓혀가야 한다. 


보훈, 한국적인 가치


‘보훈’은 낱말이 아니다. ‘공훈에 보답한다’는 의미의 문장이다. 그것도 한국에서 만들어진 한국적 문장이다. 공훈에 보답한다는 문장이 어떤 점에서 한국적이라는 말일까. 그것은 기본적으로 공훈의 내용에 담겨있다. 


한국 보훈 정책의 법적 기초는 「국가보훈기본법」(2005)에 갈무리되어있다. 특히 이 법의 제1·2·3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보훈은 국가를 위한 ‘희생’과 ‘공헌’, 특히, 일제로부터의 자주독립, 국가의 수호와 안전보장,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의 발전,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 과정에 벌어진 희생과 공헌에 대한 보답이자, 이를 통해 국민의 ‘나라사랑정신’을 함양하고 ‘국민통합’과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과정이다. 


더 요약하면, 보훈은 대한민국의 ‘독립’, ‘호국’, ‘민주’를 위한 희생과 공헌에 대한 보답이다. 그렇다면 이들 세 가치에 대해 국민이 공감하고 이들을 화학적으로 결합시킬 때 ‘국민의 나라사랑정신 함양’, ‘국민통합’이라는 소기의 목적도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몇 가지 문제점


그러나 이런 이론과 달리 현실은 다른 길로 나아갈 때도 있다. 독립, 호국, 민주의 정신은 한국 안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한국적 가치이지만, 이 정신을 실제로 적용하는 과정은 간단하지 않을뿐더러, 이들의 관계도 복잡하다. 이들 세 가치를 화학적으로 결합시키기는 대단히 어렵다. 때로는 이들 가치가 통합이 아닌 갈등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가령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국가유공자로 예우하는 행위의 이면에는 ‘친일’ 세력은 청산되어야 한다는 요청도 들어있지만, 친일이 불가피한 현실이라 생각하며 살아온 이들과의 갈등도 만만치 않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를 구성하는 과정에 친일 청산을 둘러싸고 혼란의 소용돌이가 일기도 했고, 친일 문제는 청산되지 않은 채 여전히 사회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항일은 물론 친일도 한국 역사의 일부가 되어버린 셈이다. 


한국인의 ‘호국’ 이념에는 북한 및 공산주의를 적대하며 전쟁까지 했던 경험이 녹아있어서, 호국주의자들의 눈에 북한을 포용해 평화로 나아가려는 자세는 위험스러운 이적행위처럼 여겨진다. 북한을 포용하려는 행위도 더 큰 한국을 만들기 위한 ‘호국적’ 행위일 수 있지만, 호국을 대북 적대적 행위에 가두는 이들의 입장과는 서로 충돌할 수도 있다. 호국을 넓고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벌어질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민주’도 보수와 진보에 따라 이해가 다르기도 하고, ‘공화주의’와 ‘자유주의’가 부딪히기도 한다. 가령 헌법에 등장하는 ‘민주공화국’은 국민이 주권자가 되어 대표자를 선출하고 선출된 자와 국민 모두 같은 법적 통제를 받으며 국민이 스스로를 지배하는 정치형태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고 자유와 평등을 해치면 안 된다는 원칙이 들어있다. 그러다 보니 공화주의는 국민의 자유의사와 선택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의 형태로 나타나면서, ‘자유민주주의’라는 복합어도 등장했다.


자유민주주의라지만 개인의 자유를 무한히 허용한다는 뜻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도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적 가치에 의해 제한되는 민주주의이다. 그런 점에서 공화주의와 자유주의는 충돌하기는커녕 사실상 동일한 개념이다. 이러한 사실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민주의 이름으로 민주를 해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예들은 독립, 호국, 민주를 기본 가치로 국민통합에 기여한다는 보훈의 목적이 사실상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 잘 보여준다. 이런 과제를 어떻게 해결해가야 할까. 


넓게 생각하기


무엇보다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범위를 가능한 넓게 생각해야 한다. 호국을 좁게 생각하면 북한과의 적대성에 머문다. 북한은 북한대로 대남 적대적 호국주의에 머물면서 서로 간의 대립은 지속된다. 그러면 상호 대립은 다시 한국의 호국적 태도에 위협을 가하면서 호국이라는 이름의 불안이 가중된다. 


비록 북한이 전쟁의 상대자였기도 하고 여전한 정치적 이질 세력이기도 하지만, 오늘에는 한반도에서 같이 평화를 만들어가야 할 상대자이기도 하다. 북한과 평화를 도모하려면 반복적 대립과 갈등은 가능한 줄일수록 좋다. 좁은 의미의 호국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 나아가 글로벌 시대를 상상하는 넓은 의미의 호국을 그려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보훈의 목적인 국민통합과 국가발전에 기여한다. 


독립도 좁게만 생각하면 여전히 반일에만 머물고 소모적인 갈등으로 이어진다. 한국의 보훈 정책은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한 반대, 저항, 희생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오늘의 국제주의적 차원에서 보면 여전한 반일 정서는 새로운 문제로 이어진다. 무엇보다 오늘의 일본은 북한이나 중국과는 달리 한국과 동일한 정치 체제를 한 지정학적 이웃이자 대규모 무역 상대국이고 자유 교류국이다. 과거의 ‘대일본제국’과 현재의 ‘일본국’을 구분하면서, 과거에 대한 기억을 현재적 지평에 어울리게, 그리고 좀 더 미래를 내다보며 나아갈 필요가 있다. 일본 보수 정치인의 발언 자체에 집착하기보다는 과거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일본 시민사회와의 공감대를 확산시키기 위한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종합하면,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억하고 정신을 계승하되 오늘의 관점에서 단순한 ‘반일’을 넘어 ‘지일’로 나아가야 한다. 대립의 산물인 국민국가 중심의 ‘호국’적 태도를 글로벌 초연결의 시대에 어울리도록 조율 및 확장하고, 이것을 보수와 진보의 공존 과정으로서의 ‘민주’와 연결시키며, 대북 적대성을 줄이고 교류를 확대해야 한다. 국가의 의미를 지구화 시대의 통일국가 차원에서 확대 상상하면서 그에 어울리는 국민통합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 

국민통합도 모든 국민이 동일한 의견을 지니고 획일적으로 행동한다는 뜻이 아니다. 통합은 국민의 다양한 입장을 가능한 대로 존중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보훈이 국민통합을 목적으로 한다면, 다양한 가치들을 관통하는 따뜻한 보훈의 논리를 개발하고 공감대를 넓혀가야 한다. 국민통합은 보훈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정성을 보여줄 때, 그렇게 보훈이 공정 사회를 이루는 기초라는 생각이 더욱 확보될 때, 국민이 보훈의 이념과 목적에 대해 생각하며 자발적으로 심정적으로 동의할 때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K보훈’의 가능성


한국 보훈의 특징은 독립, 호국, 민주를 모두 기본 가치로 여긴다는 데 있다. 해외의 보훈 정책이 대부분 제대군인과 경찰 중심적인 데 비해, 한국의 보훈에는 민주유공자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한국사 안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제도이자 가치이지만, 국내외적으로 더욱 알리고 발전시켜가야 할 아이디어라고도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현실적 적용에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지만, 전 세계를 놓고 보면 민주주의는 여러 국가들의 여전한 대안이다. 민주유공자는 국민적 성숙과 세계의 민주주의 발전에 유용한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 한국식 민주유공자 개념을 민주주의 지향의 저개발 국가에 알림으로써 민주지향적 시민들 간 국제적 연대의 계기를 제공하고, 한국적 보훈의 세계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 한국식 보훈이 국내적으로는 물론 인류공동체의 형성에도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을 상상하며 ‘K보훈’이라는 용어가 익숙해지는 때를 기대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필자 이찬수

강남대 교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 연구교수를 지내고 보훈교육연구원장으 로 취임한 이래 평화국가의 확립에 기여 하는 보훈이 되도록 일하고 있다. 『평화 와 평화들: 평화다원주의와 평화인문학』, 『사회는 왜 아픈가: 자발적 노예들의 시 대』, 『보훈의 여러 가지 얼굴』(공저) 외 여 러 권의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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