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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Theme.3 수난의 역사에서 미래의 길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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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정체성 확립 도모한 대종교 지도자들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神人의 후손’ 긍지 심고 조국광복 용기 북돋워   


글 | 이태룡(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장) 


1894년 6월 21일 새벽 4시, 갑오왜란이 일어나 본격적인 일제 침략이 시작되었다. 이듬해에는 조선 왕비 참살이라는 천인공노할 만행이 자행되었다. 1908년 접어들자 전국에서 격렬한 의병투쟁이 전개되었다. 일제의 무자비한 의병학살로 30만여 명의 의병 중 15만여 명이 살상·투옥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1910년 나라를 잃게 되었다. 단군교 초대 도사교였던 홍암 나철은 경술국치 후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고 간도 연길현 삼도구 청파향에 이주하여 각지에 대종교 학교를 설립, 민족교육에 노력하였다. 홍암이 일제의 식민정책에 반대하고, 민족 정체성 회복을 위해 민족의 제단에 몸을 던지자, 제자 박은식은 추도사에서 그를 ‘영원한 지도자’란 뜻으로 “萬世의 宗師”라 추앙하였다. 홍암의 정신을 이은 대종교 지도자들은 일제강점기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배달겨레에게 ‘신인(神人)의 후손’이라는 긍지와 함께 조국광복을 위한 큰 용기를 주었다.  


본격적인 일제 침략, 거족적인 의병투쟁


갑오왜란(1894) 직후 일제의 궁궐 침범에 반발하는 의병이 일어났다. 그 효시는 1894년 7월(음력)에 일어난 안동의병이다. 을미왜란(1895) 이후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國讐報復]’는 상소와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 방(榜)이 각지에 나붙기 시작하면서 충남 유성에서 문석봉(文錫鳳)이 의병을 일으켰고, 이어 평북 강계에서 김이언(金利彦)·김창수(金昌洙: 김구의 본명)의 의병투쟁이 이어졌으며, 그해 12월 30일(음력 11월 15일) 일제 앞잡이 내각에서 단발령을 내리자 배달겨레는 분연히 일어섰다.


을사늑약 전후에 ‘국권회복(國權恢復)’의 기치로 일어났던 주요 의병으로는 주천·단양의병, 홍주의병, 영해의병, 용천의병 등이 있고, 헤이그 특사 이준(李儁)의 순국과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에 이어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자결한 박승환(朴昇煥)의 순국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난 의병은 규모나 조직 면에서 체계적인 투쟁을 벌였다.


특히 이인영(李麟榮)이 중심이 된 전국 연합의병은 ‘서울진공작전’을 벌여 통감부를 쳐부수고 국권회복을 도모하려 했으나 대규모 일본 군경들이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을 차단하는 바람에 각지에서 모여든 의병들이 서울에서 꽤 먼 곳에 진을 칠 수밖에 없었고, 서울진공 과정에서 총 13차에 걸쳐 의병투쟁을 벌였으나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1908년 접어들자 전국에서 격렬한 의병투쟁이 전개되었는데, 일제는 보병 8개 사단에서 선발한 8개 연대를 비롯한 포병, 공병, 기마대까지 동원하여 의병학살에 나서는 바람에 30만여 명의 의병 중 15만여 명이 살상·투옥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1910년 나라를 잃게 되었다.


박은식 “萬世의 宗師”로 추앙


“조선 땅에 몸을 묻을 곳이 없으니 화장하여 총본사가 있는 간도 땅에 묻어라.” 1916년 9월 12일(음력 8월 15일) 황해도 구월산에서 대종교(大倧敎) 도사교(都司敎) 나철(羅喆, 1863~1916) 선생이 일제 침략에 반대하여 조식법(調息法)으로 목숨을 끊으면서 남긴 말이다.


나철은 전남 낙안군(현 보성군) 출신으로 대종교의 초대 도사교이자 민족지도자이다. 본명은 두영(斗永), 개명은 인영(寅永)이고, 호는 홍암(鴻巖)이다. 신묘년(1891) 식년시 병과에 급제하여 벼슬길로 나아가 일제 침략이 극심해지자 우국지사들과 국권회복을 도모하였다.


그는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직전 오기호(吳基鎬), 홍필주(洪弼周) 등과 일본으로 건너가서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대한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써 부조하라!’는 의견서를 일본 정계에 전달하고, 일본 궁성 앞에서 사흘간 단식농성을 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동지들과 을사오적을 처단하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유형 10년이 선고되어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1909년 2월 5일(음력 1월 15일) 서울에서 단군교의 중광식(重光式)을 거행하고 초대 도사교가 되었다. 이듬해 경술국치를 당하자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었고, 간도 연길현 삼도구 청파향에 이주하여 각지에 대종교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노력하였다. 


홍암이 일제의 식민정책에 반대하고, 민족 정체성 회복을 위해 민족의 제단에 몸을 던지자, 제자 박은식(朴殷植)은 추도사에서 그를 ‘영원한 지도자’란 뜻으로 “만세(萬世)의 종사(宗師)”라 추앙하였으며, 식민지 백성으로 움츠리고 살던 배달겨레에 큰 용기와 함께 깨우침을 주었다. 


반일무장투쟁의 중심에 서다


1916년 9월 대종교 2대 도사교에 취임한 이가 김교헌(金敎獻 1868~1923)이다. 본관은 경주, 호는 무원(茂園)이다. 수원에서 출생, 서울에서 성장하였는데, 18세 되던 1885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 병조·예조참의, 대사성, 중추원의관, 비서원승 등을 역임하였고, 1906년 동래감리 겸 부산항재판소 판사와 동래부윤으로 재직할 때, 통감부의 비호 아래 자행되던 일제의 경제 침략을 막으려다 한직으로 밀려나기도 하였다. 그 뒤 신민회(新民會) 회원과 교유하면서 민족의 기원과 민족사의 연구에 뜻을 두었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영조 때 하사받은 340칸 대저택을 비롯하여 전 재산을 처분하여 홍암과 동행해 온 그는 2대 도사교가 되자 교육에 더욱 힘쓰는 한편, 반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동포 지도자들을 규합해 나갔다. 무원은 1918년 11월(음력)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 선포에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과 함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당시 간도와 연해주에서 활동 중인 민족지도자 39명의 이름으로 이를 발표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대종교 지도자들이었다. 


대종교 지도자들은 민족혼을 계승하고 동포들에게 올바른 민족사를 교육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무장단체를 조직하고 반일무장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서일(徐一), 이상룡 등 많은 대종교 지도자들이 군정서(軍政署: 통칭 서로군정서),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통칭 북로군정서), 흥업단(興業團), 신민단(新民團) 등의 무장단체를 구성하여 일본군과 무장투쟁을 벌였다. 


무원은 반일투쟁의 중심 지도자였고, 건국 시조인 단군을 우리 민족사와 연결시켜 배달겨레의 정통성을 체계적으로 세워 종래의 사대주의 사상을 불식하고 민족주의 사관을 세운 위대한 민족사학의 선구자였다. 


살신성인으로 민족의 미래 개척하다


서일(1881~1921)의 본관은 이천(利川)으로 함북 경원 출신이다. 본명은 기학(夔學), 호는 백포(白圃)이다. 1898년까지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함북 경성의 함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향리에서 계몽활동을 하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북간도 왕청현 덕원리로 가서 중광단(重匡團)을 조직하였다. 그는 청년들에게 무력투쟁보다는 정신교육부터 먼저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명동중학교를 설립하였다.


백포는 1912년 대종교에 입교하여 교리연구와 포교활동에 주력하고, 1916년 총본사 전강(典講)이 되었으며, 교통(敎統)을 이어받을 계승자로 물망에 올라 사교(司敎)를 거쳐 교통 전수의 천궁영선식(天宮靈選式)을 행하였다.


1919년 대종교 2대 도사교인 무원이 백포에게 교통을 전수하려고 하였으나 독립군 양성과 일제에 대한 무장투쟁에 힘을 기울이기 위해 교통의 인수를 5년 뒤로 미루었다. 그해 8월 군정부(軍政府)를 만들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두 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다 하여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개편하면서 총재에 취임하였다. 


1920년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군단들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령 밀산(密山)으로 이동하였는데, 백포는 대한군정서, 대한독립단 등 10여 개 무장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고 군무총재로 추대되었다.


대한독립군단은 이듬해 정월 우수리강을 건너 시베리아로 이동했다. 그러나 ‘러시아 영토 안에서 일본에 대적하는 독립군을 육성하면 양국 간 우호관계에 큰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는 일본공사의 위협에 러시아 측에서는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강요하는 바람에 이른바 ‘흑하사변(黑河事變, 자유시사변)’이 발발하여 수많은 동포와 청년 독립군들이 희생을 당했다. 


“조국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1921년 9월 28일(음력 8월 27일), 백포는 마을 뒷산 산림 속에서 조식법으로 자결하고 말았으니,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는 백포의 자결 순국이 게재되었다. 


백포에 이어 1923년 무원이 서거하자 3대 도사교에 오른 이가 윤세복(1881~1960)이다. 경남 밀양 출신으로 본명은 세린(世麟), 도호(道號)는 단애(檀崖), 본관은 무송(茂松)이다. 


단애는 경술국치를 당한 직후 홍암을 방문하고 조국광복은 대종교의 민족정신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여겨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단애는 형 윤세용(尹世茸)과 상의하여 부유했던 모든 가산을 처분하고, 1911년 2월 간도로 망명하여 환인현에 동창학교, 무송현에 백산학교를 설립하여 동포를 모아 민족교육에 주력하였다. 1918년에는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이듬해 흥업단(興業團)을 조직하여 총무로서 활동하였고, 1921년 10월에는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의 의사부장으로서 활약하였다.


1924년 단애는 백포에게 “종사철형(宗師哲兄)”이라 추숭(追崇)한 다음, 동포사회를 더욱 대종교 중심으로 단결하게 하자 1926년 일본의 압력을 받은 만주 길림성장 장작상(張作相)에 의하여 「대종교포교금지령」이 공포되어 동도·서도·북도 3개의 본사가 해체되기에 이르렀고, 서울의 남도본사마저 폐쇄되었다. 1934년 총본사를 영안현 동경성(東京城)으로 옮기고, 1937년부터는 발해 고궁 터에 천진전(天眞殿:檀君殿)의 건립을 추진하는 한편, 대종학원(大倧學園)을 설립하여 초·중등부를 운영하는 등 교세 확장과 민족교육에 큰 진전을 보였다. 대종교서적간행회를 발족하여 대종교 서적을 간행하던 1942년 11월, 대종교 간부 20여 명과 함께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한 단체 구성’이라는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피체되어 모진 고문 끝에 무기징역이 선고되어 고초를 겪었다. 권상익(權相益)·이정(李楨)·안희제(安熙濟)·나정련(羅正練)·김서종(金書鍾)·강철구(姜銕求)·오근태(吳根泰)·나정문(羅正紋)·이창언(李昌彦)·이재유(李在囿)는 고문으로 인하여 옥사하였으니, 나정련과 나정문은 홍암의 장·차남이었다. 대종교에서는 이를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고 부르며, 숨진 10명의 간부를 임오십현(壬午十賢)으로 숭상하고 있다. 


1945년 8월 광복을 맞게 되자 총본사가 부활되었고, 1946년 2월 환국하여 서울에 설치되었다. 미군정 때 대종교는 유교, 불교, 천도교, 기독교 등과 함께 5대 종단으로 등록되었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의 노력으로 천주교를 포함한 6대 종교 가운데 제1호 종단으로 등록되었으며, 개천절을 국경일로 제정하게 되었다.


홍암의 구국활동과 계몽활동은 대종교를 통해 구현되고 확산되었다. 오늘날 국민적 존경을 받는 박은식과 신채호 등의 사학자, 신규식·서일·이동녕·이범석·이상룡·이상설·이시영·홍범도 등의 독립운동가,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 가람 이병기, 그리고 김두봉·이극로·주시경·최현배 등의 한글학자, 영화 ‘아리랑’의 나운규, 손기정 선수 등도 대종교를 신봉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자 사학자였던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나라는 멸망할 수 있으나 그 역사는 결코 없어질 수 없다고 했다. 이는 나라가 겉모양이라면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나라의 모양은 허물어지고 말았지만 정신은 살아남아야 할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집필한다.”


이 말은 곧 홍암의 신념이기도 했다. 그리고 홍암은 그 정신을 배달겨레의 시조인 단군에게서 찾으려고 했다.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이화세계(理化世界), 또한 신시(神市)로 표상되는 배달겨레 태고의 문명사회가 바로 그곳이었다. 단군은 일제의 압제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종교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절체절명의 순간에 유일하게 붙들고 매달릴 수 있는 질긴 동아줄 같은 존재였던 것이었다.


홍암이 ‘독립운동의 아버지’, ‘민족지도자’ 등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당시 의정원 의원 29명 중에서 대종교 지도자가 21명이었고, 의장에 선출된 이동녕과 주요 직책(장관급)에 임명된 13명 중에서 11명이 대종교 지도자였으니, 대종교는 임시정부의 산파(産婆)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산모(産母) 그 자체였기 때문이리라.


이처럼 홍암의 정신을 이은 대종교 지도자들은 일제강점기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배달겨레에게 ‘신인(神人)의 후손’이라는 긍지와 함께 조국광복을 위한 큰 용기를 준 것이었다.  


필자 이태룡 

1986년부터 의병연구를 시작한 뒤 경상대학교 대학원에서 국내 처음으로 의병문학인 ‘의병가사’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특히 저서 『한국근대사와 의병투쟁』(1~4권)과 『한국 의병사』(상·하권)는 의병연구의 역작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지금까지 총 38권의 책을 펴냈다. 그는 국내보다는 오히려 외국에 더 많이 알려져서 2011년 영국 국제인명센터(IBC)로부터 ‘올해의 국제 교육자’, 미국 인명정보기관(ABI)이 ‘21세기 위대한 지성’으로 선정하였고, 2012년에는 IBC로부터 ‘세계 TOP 교육자 100인’에 이어 ABI로부터 ‘세계 훌륭한 지도자 500인’에 선정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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