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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 Theme.4 민족의 염원, 통일을 위한 몇 가지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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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에게 배우는 ‘씨알’과 평화사상 


통일 이후 우애로운 연대와 

미래발전적 공동체 위해 ‘차이의 인정’ 선행되어야


글 | 김성민(건국대 철학과 교수, 통일인문학연구단장) 


함석헌 선생은 어린 나이에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고, 35년이라는 세월 동안 일제의 핍박과 학살을 몸소 경험하였다. 드디어 민족의 오랜 염원이었던 해방이 찾아왔지만 동족 간에 총화(銃火)를 나누는 참혹한 전쟁을 겪어야 했으며, 죽을 때까지 군부독재의 공포와 억압의 정치를 견뎌야 했다. 더 이상 갈 곳 없는 막다른 골목처럼 극단으로 치달았던 ‘폭력의 시대’에서 씨알 사상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함석헌 선생이 보기에 폭력의 시대가 아무리 인간성의 상실을 강제한다고 해서 생명의 본래적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씨알에서 폭력의 시대를 넘어설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한다. ‘평화’야말로 생명력이 약동하고 인간성이 발휘되도록 하는 토대라고 선생은 말한다. 


“씨알은 본질적인 평화이다. 씨알의 바탕이 평화요, 평화의 열매가 씨알이다.” 함석헌 선생의 말이다. 씨알과 평화의 사상은 그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을 극복하려는 고민의 산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01년에 출생하여 1989년에 소천한 그는 그야말로 폭력의 한 세기를 살았다. 함석헌 선생은 어린 나이에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고, 35년이라는 세월 동안 일제의 핍박과 학살을 몸소 경험하였다. 드디어 민족의 오랜 염원이었던 해방이 찾아왔지만 그가 목도한 것은 남북의 분단과 대립 그리고 정적(政敵)을 이단화하고 삭제하려는 폭력이 난무한 피의 한반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동족 간에 총화(銃火)를 나누는 참혹한 전쟁을 겪어야 했으며, 죽을 때까지 군부독재의 공포와 억압의 정치를 견뎌야 했다. 더 이상 갈 곳 없는 막다른 골목처럼 극단으로 치달았던 ‘폭력의 시대’에서 씨알 사상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함석헌 선생이 보기에 이러한 폭력 시대가 낳은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가만히 있어야만 한다는 무기력함을 강제한다는 것이었다. 무기력함을 강제당한 인간, 심지어 국가에 사로잡혀 자기를 소외시키는 사람들은 인간 본래의 인간성마저 상실하게 된다.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마지막 인간’만이 남는 것이다. 사람들은 폭력의 자장 안에서 생명의 본래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타자에 대한 ‘사랑’ 또는 ‘인(仁)’, ‘자비’를 실천할 수 없는, 곧 생명이 결핍된 인간으로 전락하였다. 

‘평화’는 인간성이 발휘되도록 하는 토대

이러한 인간상은 분단체제 안에서 잘 확인된다. 분단의 논리는 이데올로기적인 이분법적으로 우리와 타자를 적(敵)과 아(我)로 구분하는 세계관을 강요하였다. 그에 따라 차이를 지닌 타자는 제거되어야 하는 불순물이며, 박멸되어야 하는 세균 정도로 간단히 취급된다. 만연한 공포와 불안 속에서는 자신의 안전이 우선시되고 상처 입은 타자의 고통에는 무감각해져 심장이 뛰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는 타자의 고통쯤이야 치러야 하는 비용 정도로 생각하게 한다. 타자를 비인간화할 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인간성을 상실한 비인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함석헌 선생이 보기에 폭력의 시대가 아무리 인간성의 상실을 강제한다고 해서 생명의 본래적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씨알에서 폭력의 시대를 넘어설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한다. 들판에 자라는 풀이 아무리 밟혀도 다시 자라나는 것처럼 씨알은 폭력의 시대에서도 그것이 지닌 무한한 생명력만큼은 잃지 않는다. 다만, 총과 칼로 씨알의 싹을 자라게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싹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온화한 햇빛과 기름진 토양이 필요하다. 함석헌 선생은 그러한 햇빛과 토양이 바로 ‘평화’라고 말한다. 즉, ‘평화’는 생명력이 약동하고 인간성이 발휘되도록 하는 토대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통일과 연관하여 평화의 의미를 다시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남북이 통일되고 전쟁이 없는 상태가 되면 그것이 곧 평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통일 이후에도 여전히 그 전과 동일하게 하나의 잣대를 내세우고, 그 잣대에 맞지 않는 누군가를 선별·배제하며 서열화하고 어떤 이미지를 덧씌워 혐오한다면, 그러한 상황은 함석헌 선생이 말하는 ‘평화’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가 지닌 욕망과 이상을 실현할 수 없으며 각자의 생명력이 힘을 제대로 발휘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전혀 근거 없는 짐작이 아니다. 진작부터 어떤 사람들은 북쪽의 토지와 값싼 노동력을 통일이 가져다줄 이익으로 계산한다. 의도했든 아니든 이러한 생각에는 북쪽을 이미 열등한 존재로 전제하고 경제적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겠다는 의도가 녹아 있다. 특히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통일되었을 경우 상대와의 차이를 열등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게 작동한다면 흡수된 쪽의 주민들은 ‘2등 국민’이 되어 지배되어야 할 대상으로 취급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전쟁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나 통일된 한반도에서 구조적 폭력과 문화적(혹은 상징적) 폭력이 여전하다면, 그래서 생명력이 원활하게 흐르지 못하고 타자와의 우애로운 연대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그러한 통일을 평화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남북은 70여 년의 세월 동안 떨어져 살았다는 점에서 통일 이후 불협화음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그래서 누군가는 통일 이후 남북의 불협화음을 줄이기 위해 민족 동질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민족 동질성 회복은 동일성의 논리를 따른다는 점에서 해법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동일성의 논리는 자신과 같은 것만을 인정(A=A)하며 자신과 다른 것을 배제(A≠-A)하는 폭력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일성의 논리는 남북이 체제경쟁을 하면서 각자 자신이 민족의 적자임을 내세우고 자신과 다른 상대방을 민족의 순수성을 파괴한 배신자로 규정해왔던 분단의 논리와 다르지 않다. 

‘사랑’은 미래기획적인 생성으로 바꾸는 힘

통일 이후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폭력을 방지하고 진정 평화의 상태가 되려면 오히려 필요한 것은 상호 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자세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때 차이의 인정은 함석헌 선생이 말한 ‘사랑’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사랑을 위한 둘의 만남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둘이 둘로 셈해지는 것이라는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말을 상기하면 이 점은 잘 이해가 된다. 둘이 둘로 셈해진다는 것은 이 ‘둘’이 결코 동일할 수 없다는 의미다. 실제로 그것은 불가능하다. 세상 어디에도 똑같은 생각과 성향을 가진 둘이란 존재할 수 없다.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욕망과 가치지향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둘의 만남은 서로가 차이를 지니고 있는 존재라는 점을 확인하는 하나의 사건이 된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사랑의 선언은 그러한 차이로 인해 불협화음이 발생하더라도 관계를 충실히 유지하고 차이에서 비롯된 세계의 경험을 수용하겠다는 약속에 다름 아니다.

이렇듯 차이의 인정에서 출발하는 사랑은 둘의 차이로 인해 원래 위험하고 아픈 것이며 그래서 절뚝거림의 노고를 감내하는 것이다. 사랑에는 온전한 걸음이 있을 수 없다. 안전하고 순탄한 사랑을 바란다면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더욱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중심성을 강요한다면, 이때의 사랑은 폭력을 감추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차이를 지닌 남과 북이 만나 사랑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둘이 갈등이 없는 온화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남북이 탈-중심화의 관계를 맺으면서 차이로 인한 삐걱거림을 인내하는 둘의 윤리를 제시하는 것이다. 

사랑의 만남은 둘의 어떤 새로운 세계를 공통으로 창출하는 효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평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생성의 힘은 차이 나는 것들 간의 만남 속에서 나온다. 같은 것 사이에서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없다. 예컨대, 오랜 분단의 시간 동안 남북은 각기 다른 형태로 전통문화를 변용하거나 각자의 정치·경제 시스템에 맞춰 새로운 문화들을 발전시켜 왔다. 이때 누군가의 문화가 더 정통이며 더 우월한 것이라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상호 간의 문화를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둘의 만남을 만들어간다면 더 발전되고 새로운 어떤 공통의 문화들을 만들어 갈 가능성이 생길 것이다. 요컨대, 사랑은 차이를 배제와 폭력의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기획적인 생성으로 바꾸는 힘이 된다. 

새 정부가 들어서는 2022년, 다시 얼어붙은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그것은 남북만이 아니라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이해 당사자국들과의 얽히고설킨 복잡한 문제이다. 그럼에도 ‘차이의 인정’은 남북 간의 원활한 소통과 지속적인 만남을 위해서, 또 통일 이후 남북의 우애로운 연대와 미래발전적인 공동체 건설을 위해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 김성민 
 건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면서 통일인문학연구단을 이끌고 있다. ‘소통·치유·통합의 통일인문학’이라는 패러다임으로 남북의 사회문화적 통합과 ‘사람의 통일’를 지향하며 연구와 실천을 하고 있다. 한국철학회장과 국제고려학회 서울지회장직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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