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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 Theme.1 독립운동자금의 역할과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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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에서 광복까지 이어진 군자금 모집


국내에서 한인사회로 확대

십시일반 모아 거액 송금 독립군 활동 생명줄 되다 


글 | 김형목(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삼한갑족 출신 독립운동가부터 반지를 내놓은 여염집 아낙까지, 한국인은 저마다 자금을 대고 무기를 사들이고 독립군을 양성했다. 1907년 2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삽시간에 국내는 물론 해외 한인사회로 파급되었고, 군자금 모집 성격으로 확대되었다. 애국부인회는 군자금 모금과 송달을 최대 임무로 여겨 활동한 지 불과 2개월 만에 약 6천 원이라는 거액의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로 보냈다. 황마리아는 1913년 미국 호놀룰루에서 대한인부인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자금 지원에 나섰다. 친일 부호를 처단하고 세금수송마차와 일본인 소유 광산을 습격하는 대범한 투쟁도 이어졌다. 군자금은 극한 상황에서도 독립군 활동을 지속시킨 생명줄이었으며,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의 승리를 이끈 숨은 주역이었다. 


19세기에 세계 정세가 요동치다


자본주의 체제는 힘에 의해 식민지배가 합법화되는 사회를 의미한다. 곧 양육강식으로 제국주의 열강이 활보하는 시대였다. 저들은 ‘만국공법’이라는 구실로 식민지 확보에 혈안이었다. 아프리카와 남미 등 ‘식민지쟁탈전’을 마무리한 탐학한 열강은 아시아로 눈길을 돌렸다. 이른바 서세동점(서양 제국주의 동아시아로 침략)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중국과 일본을 굴복시킨 후 한반도에도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 


후발 자본주의로 성장한 일본도 서구 열강의 무력적인 침략을 본받아 한반도에 관심을 기울였다. 일본은 불법적인 운양호사건을 빌미로 강화도조약(일명 병자수호조규)을 강제로 맺었다. 갑신정변·갑오농민전쟁과 삼국간섭으로 잠시 주춤하다가 경제적인 침략에 집중했다. 대한제국은 입헌군주제에 의한 국민국가 만들기의 시험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친미파·친러파·친일파 등으로 사분오열된 지배층은 사회적인 혼란을 전혀 수습하지 못했다.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제는 ‘시정개선’을 구실로 대한제국을 반신불수로 만들었다. 더욱이 화폐개혁은 금융공황을 초래하는 등 경제적인 예속화를 심화시켰다.


1907년 2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왜채(倭債)를 갚으려는 자립경제를 지향한 2천만 동포의 메아리였다. 참여 계층은 어린이를 비롯하여 사회적으로 가장 천대받던 백정·창기·기생·죄수·주모·노파·걸인·도둑 등 매우 다양했다. 20여 일 동안 한푼 두푼 동냥한 곡식과 돈을 의연한 원산항 걸인들의 미담 사례는 널리 회자되었다. ‘의연=국민적 의무’로 인식되는 가운데 삽시간에 국내는 물론 해외 한인사회로 파급되었다. 부인들은 참여를 통하여 사회적인 책무를 공감하는 현실인식 심화로 이어졌다. 여성들의 근대교육 확산을 위한 의연금 대열은 이러한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군자금이 독립운동자금으로 진전되다


단체나 모임을 운영하기 위하여 자금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근대사회가 도래한 이래 자본은 곧 국력을 상징하는 대명사였다.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유생들은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자산가들에게 군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의병전쟁이 진전되는 가운데 확산을 거듭했다. 신돌석과 같은 평민의병장이 출현할 수 있었던 배경은 이러한 변화와 무관하지 않았다. 


최초 여성의병인 윤희순(尹熙順)은 ‘안사람의병가’를 지어 여성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그녀는 의병들의 옷은 물론 무기를 공급함으로써 사기를 북돋우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호남의병 부부인 양방매((梁芳梅)도 의병진에게 적의 동태를 알려주는 등 승리에 결정적인 요인을 제공했다. 여사는 강무경 의병장이 심남일과 함께 전남 함평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1908년 영암으로 이동했다. 일본군과 교전한 강무경은 전투 후유증으로 신열에 시달렸다. 그곳에서 양덕관의 둘째 딸 양방매에게 치료받았다. 부부로서 동지로서 아름다운 인연을 맺었다. 남편은 “여자가 나설 데가 아니다”고 했지만, 아내는 자신의 굳건한 뜻을 전혀 굽히지 않는 당당함을 보였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며 의병진에 합류했다.


한편 을사늑약 이후 신민회와 일부 의병진은 압록강과 두만강 대안인 중국 동북지역과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이들은 중장기적인 계획에 따라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군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독립군 산실인 신흥무관학교(일명 신흥강습소) 운영은 독립전쟁사에 이끄는 산실이었다. 대부분 자금은 이회영·이상룡·이상설 일가에서 제공했다.


애국부인회 임시정부를 지원하다


3·1운동 열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1919년 3월 중순 오현주·오현관·이정숙 등은 독립지사에 대한 옥바라지를 목적으로 혈성단부인회를 조직하였다. 4월에는 최숙자·김희옥 등이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를 결성하는 등 여성단체가 독립운동 전면에 나섰다. 두 단체는 6월 임시정부에 대한 군자금 지원을 위해 통합하였다. 지방에 다수의 지부까지 두었으나 활약이 부진하자, 김마리아와 간부들은 발전적 해체를 통한 재조직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애국부인회는 군자금 모금과 송달을 최대 임무로 여겨 재무부장·재무주임이라는 직책을 두었다. 종래에 없던 적십자부장과 결사부장을 각 2명씩 두어 항일독립전쟁에 임했다. 임원진은 회장 김마리아, 부회장 이혜경, 총무 황에스터, 재무장 장선희, 적십자부장 이정숙·윤진수, 결사부장 백신영·이성완, 교제부장 오현주, 서기 신의경, 부서기 김영순 등이었다.


이 단체는 부인들을 각성시켜 국권과 인권의 회복을 목표로 했다. 활동한 지 불과 2개월 만에 약 6천 원이라는 거액의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로 보냈다. 대부분 회원은 교회지도급 여성과 여교사·간호원 등 신여성이 주축을 이루었다. 간호원이 가장 많았던 이유는 독립전쟁에서 백의천사로서 활약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활동이 활발하던 11월 말경 한 간부의 배신으로 일제히 체포되어 대구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다. 이들은 “한국인으로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 연호는 모르고 서력만 안다”라고 대답하는 등 철저한 항일투쟁 의지를 보였다.


미주지역 여성들도 동참하다


황마리아는 1905년 4월 장성한 딸과 아들을 동반한 가족이민 대열에 섰다. 딸인 강혜원(일명 SARA Kim)은 19세, 아들 강영승은 17세였다. 당시 가족이민은 매우 드문 경우였다. 이들은 가피올라니(Kapiolani)와 에와(Ewa)농장에 수용되었다. 황마리아는 묵묵히 적응하면서 자녀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국망 이후 대동단결로 국권회복을 위한 단체도 결성되었다. 황마리아는 1913년 4월 호놀룰루에서 대한인부인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취임했다. 1919년 3·1만세운동 소식은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황마리아는 하와이 여성 대표를 소집하여 공동대회를 열었다. 주요 활동은 독립운동자금 지원과 구제사업이었다.


어머니의 활동을 보면서 자란 딸 강혜원(SARA Kim)도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분망한 나날을 보냈다. 공식적으로 밝혀진 금액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1천 달러, 공복위로금으로 500달러, 독립신문사에 300달러, 구미위원부 군축 선전비로 500달러, 신한민보사 식자기 구입비 500달러, 간도 동포 기근구제금으로 67달러, 쑹메이링(宋美齡) 여사 군사위로금으로 370달러, 멕시코 동포 하바나로 이주해 갈 때 동정금 40달러, 쿠바 마탄사스 구제금 55달러, 수재민 구제금 368달러, 본국 수재민 172달러, 본국 소년갱생운동에 55달러, 황온순고아원에 58달러, 제2차 세계대전 미군적십자사에 570달러, 로스앤젤레스 출정 군인무도회에 194달러 등으로 총 출납 액수가 46,298달러에 달했다. 지복영·신순호 등 여성광복군 탄생은 이러한 지원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 정정화 6번이나 국경 넘어


상해 임시정부의 여성들 역시 군자금 모금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삯바느질이나 하숙을 치면서 군자금을 보태는가 하면, 때로 국내에 잠입해 군자금을 모집하는 역할도 감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체포되어 어려움을 겪는 일도 있었다.


항일운동으로 여러 번 투옥됐던 아들을 위해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며 사식을 넣고 생활비를 절약해 독립운동자금을 마련, 군사훈련 중인 청년들의 병영생활을 지원했던 김구의 모친 곽낙원의 사례는 널리 알려진 대표적 이야기다.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최고의 가치로 알던 임시정부의 ‘안살림꾼’ 정정화는 상해로 망명한 후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0여 년간 국경을 6번이나 넘나들었다. 삼엄한 경비에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는 용기를 내었다. 이러한 소중한 경험은 전통여인이 항일투쟁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길 수 있는 에너지원이었다. 

 

임시정부 초기에 공채를 발행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살림꾼’ 윤현진은 상하이로 망명한 후 초대 재무차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재정문제 해결에 힘썼다. 재무부장은 ‘러시아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이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사실상 재정문제 전반을 총괄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1921년 2월 22일 건강문제로 사임할 때까지 초기 임시정부 재정문제 해결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를 경제적으로 후원한 인물은 백산무역주식회사 안희제(安熙濟)와 ‘경주 최부자’로 널리 알려진 최준(崔浚) 등 영남 자산가와 일가였다. 이어 애국공채를 신속하게 발행하기 위한 애국공채발행조사위원회도 가동되었다. 공채 발행은 재정이 부족한 임시정부의 운영을 활발하게 만드는 ‘윤활유’와 같았다.


이 밖에 이수홍의거, 최봉설 등 15만원 탈취사건, 장진홍 의거 등 현금 수송을 탈취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수많은 선열들이 군자금 모집과 송달에 앞장섰고, 그로 인해 목숨을 잃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이들의 활약상은 역사의 뒤안길에 묻히고 말았다. 독립운동자금은 독립운동을 진전시키는 혈액과 같았다.   


필자 김형목

중앙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석사·문학박사(한국근대사 전공) 학위를 받았다. 한국민족운동사학회장,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적심사위원,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사)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육군본부 군사연구소 편집위원, 독립운동가인명사전편찬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와 공저로 '대한제국기 야학운동', '교육운동-한국독립운동의 역사 35', '안중근과 동양평화론(공저)', '나혜석, 한국근대사를 거닐다(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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