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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 Theme.2 군자금 확보와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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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로 보낸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자금


임시정부 체계 마련하고

이봉창·윤봉길 거사 지원 중남미까지 순방해 모금 


글 | 김도형(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올해는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 90주년이다. 두 의거의 배후인 백범 김구는 거사 비용을 비밀리에 모집하였고, 하와이 동포들에게 1천 달러의 자금을 받았다. 만일 군자금이 없었다면, 두 의사의 의거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1919년 3월 9일 3·1운동 소식을 전해 들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도산 안창호는 각 지방회에 연락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하고 기틀을 다져 나갔다. 구미위원부 화교위원 홍언은 1년 넘게 중남미 지역을 순방하며 화교들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다. 미주의 여성들은 남성보다도 더 열성적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데 온 정열을 쏟았다. 먹을 것을 절약하여 애국금을 냈고, 고추장·간장·된장·묵·떡을 만들어 판 자금을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보냈다.  


백범 김구,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결행하다


올해는 우리 독립운동의 물줄기를 크게 바꾼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역사적 의거가 일어난 지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두 의거의 배후에는 백범 김구가 있었다. 백범은 두 의사가 의거를 일으킬 수 있는 거사 비용을 비밀리에 모집하였다. 만일 백범이 의거를 결행시킬 자금이 없었다면, 두 의사의 의거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백범은 어떻게 거사 비용을 마련할 수가 있을까. '백범일지'에 따르면,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이 “우리 민족에 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돈을 주선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백범은 “무슨 사업을 하겠다고 말할 필요는 없으나 간절히 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 조용히 자금을 모았다가 보내달라”고 통지하였다. 1931년 9월 백범은 거사 계획을 세우고 하와이 동포들에게 특무공작에 필요한 자금을 요청하였고, 그해 11월 15일 1천 달러의 자금을 받았다. 하와이 동포들이 보내준 돈을 받은 김구는, 거지 복색인 전대 속에 몰래 감추어 두고 예전 그대로 걸식생활을 계속하였다. 이 돈의 출처에 대해서는 김구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였고, 그는 그 자금을 깊숙이 숨겨두었다가 이봉창과 윤봉길의 거사 자금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봉창 의사의 도쿄의거나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공원의거가 결행될 수 있었던 것은, 백범이 미주 동포들로부터 제공받은 독립운동자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미주의 동포들은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독립자금을 계속 보내주었다. 김구는 미주 동포들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백범일지' 하권을 집필한 후, 그의 작은 소망은 미주·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가 비행기 위에서 죽는 것이라고 하였다.


도산 안창호, 임시정부의 기틀을 마련하다


1919년 3월 9일 오전 11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도산 안창호 앞으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독립선언의 소식이 전해진 이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첫째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문제, 둘째 3·1운동에 대한 미국민과 미국정부에 대한 외교활동, 셋째 독립운동 후원을 위한 재정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중앙총회장 안창호는 각 지방회에 연락하여 우선 시급한 자금 7만 6천 달러를 모금하기로 하였다.


3·1운동 당시 도산은 “우리가 금전으로 싸우는 것이 생명으로 싸우는 것만치 요긴합니다. 매삭 매주일 수입에서 20분의 1을 거두어들이게 합시다. 실시하려면 4월부터 시작하게 되리니 이달에는 미주·멕시코·하와이 재류동포 전체가 10원 이상의 특별의연을 내게 합시다”라고 호소하였다. 대한인국민회에서는 재정 확보책을 ‘독립의연’이라고 이름하고, 중앙총회에서 직접 북미·하와이·멕시코 각 지방에 출장소를 두고 3월까지 한 사람당 10달러의 의연금을 거두게 하였다. 이와 함께 1919년 4월부터 매삭·매주일 혹 1년 수입의 20분의 1을 내게 하는 ‘21례’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대한인국민회에서 모금된 독립운동자금은 우선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파견된 김규식에게 3천 500달러를 송금하였다. 그 후 중앙총회 전체대표자대회에서는 안창호를 중국으로 파견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도산은 1919년 4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필리핀과 홍콩을 거쳐 5월 25일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다.


도산이 중국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재정이 없어 정부로서의 체제를 전혀 구축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산은 임시정부 운영자금으로 대한인국민회가 모금한 2만 5천 달러를 가지고 왔다고 한다. 이 자금으로 도산은 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하고, 차장들을 지휘하여 임시정부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구미위원부, 

독립운동자금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하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국임과 자주민을 선포하였다. 이승만은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성립되고 국무총리에 선임되었다. 국내에서 선포된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로 선출되었다는 문건을 받은 이후, 이승만은 1919년 8월 25일 미국 워싱턴에 집정관총재 직권으로 ‘대한민국 특파 구미주차위원부’ 즉 ‘구미위원부’를 출범시켰다. 구미위원부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회의나 임시의정원의 동의 절차를 받은 공식 외교기관은 아니지만, 이승만의 직접적인 관할 하에 미주지역의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1919년 6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임시정부의 지시하에 ‘애국금’이라는 명목하에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고 있었다. 그런데 구미위원부에서는 그해 9월 4일 대한인국민회의 애국금 모집을 중단하고 공채금을 모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한인국민회는 이에 반발하여 ‘공채표-애국금’ 논쟁이 한동안 지속되어 독립운동에 갈등이 초래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20년 2월 24일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이 재무부 훈령으로, 미주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주관하던 애국금을 폐지하라고 지시하고 독립공채로 정부 재정을 통일하였다. 임시정부의 결정에 의하여 미주지역에서 독립운동자금을 거두는 일이 구미위원부로 넘어가게 되었고, 더 이상 대한인국민회에서는 독립운동자금을 거두는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구미위원부는 설립 직후인 1919년 9월부터 1922년 4월까지 148,653달러의 금액을 모집하였다. 인구세·공채금·의연금 등의 명목으로 자금을 거두어 임시정부 지원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지만, 수입금의 대부분은 구미위원부 자체 운영과 외교활동에 지출되었다. 임시정부로 보낸 자금은 총지출의 18%인 16,452달러에 불과하여, 이로 인해 구미위원부와 임시정부 간에 마찰이 발생하였다.


동해수부 홍언, 

중남미에서 화교들로부터 독립자금을 거두다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기관지인 '신한민보' 주필로 미주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동해수부 홍언은, 평생 문필활동을 통한 독립사상 고취와 독립운동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 3·1운동의 소식이 전해진 이후 미주지역의 한인들은 독립의연금, 애국금, 혈성금, 공채금 등의 명목으로 수십만 달러를 거두어 중국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홍언은 3·1운동 이후 미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보았다. 그는 그전까지 어떤 독립운동가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캐나다와 중남미지역에서 화교들을 상대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려고 하였다. 1919년 4월 대한인국민회 화교위원으로 임명된 홍언은 로키산맥 서쪽에서 화교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자금을 거둔 바 있었고, 이때 로키산맥 서편에서만 홍언 혼자서 재미 화교들에게 1만 달러에 달하는 독립운동자금을 거두었다. 1920년 9월 구미위원부의 화교위원으로 임명된 홍언은 미주 각 지역을 다니면서 화교들에게 독립자금을 거두어 구미위원부에 보냈다. 그러다가 1921년 6월부터 다음 해 6월까지 1년 넘게 중남미 파나마·페루·칠레·에콰도르·자메이카 등을 순방하며 그곳의 화교들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다.


홍언은 1921년 6월 초순에 뉴욕에서 배를 타고 중남미 여러 나라에 사는 화교들을 방문하여 독립운동자금을 거두기로 하였다. 1921년 8월 초순 남미 페루의 수도 리마의 화교들은 “한국지사(韓國志士) 홍언”이라고 표현하면서 대대적으로 그를 환영하였다. 중남미의 화교들은 3·1운동이 발발하여 한국민들이 일제로부터 반인륜적인 참혹한 박해를 당하는 것을 보고 한국인들을 크게 동정하여 홍언에게 의연금을 주었다. 홍언은 중남미 지방을 순행하며 대략 1만 2천 달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렇지만 홍언이 중남미 지방 순행에 필요한 여행경비로 반액 이상 사용되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5천 달러 미만의 자금을 거두었을 것으로 추단된다. 그렇지만 홍언은 약 1년간 중남미지역을 순행하면서 그곳에 거류하는 화교들에게 한국 독립운동에 대해 선전한 성과는 대단히 컸다.


미주 여성들, 

조국의 독립 위해 독립자금을 거두다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가장 두드러진 곳이 미주지역이다. 미주에서 독립운동은 남성들의 책무만이 아니라, 여성들도 똑같이 담당해야만 하는 책임이었다. 그래서 미주의 여성들은 남성보다도 더 열성적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데에 온 정열을 쏟았다.


3·1운동의 소식이 전해진 이후 북미지역 여성들은 ‘부인애국단’ 이름으로 50~100달러, 많게는 300~400달러의 애국금을 모집하여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로 보냈다. 1919년 3월 24일부터 7월 31일까지 약 150명의 여성들이 독립운동자금을 내었다. 그 가운데 10달러 이상을 낸 사람이 90여 명이며, 30달러 이상을 낸 사람도 13명이나 되었다.


이와 같이 북미지역 여성들은 3·1운동을 후원해 오다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인준을 받아 1919년 8월 ‘대한여자애국단’을 조직하였다. 대한여자애국단의 독립운동자금은 생활절용을 통해 모은 절용금, 회원의 회비인 연례금, 또는 기부금과 기타 수익금으로 이루어졌다. 수익금은 고추장·간장·된장을 제조하여 판매하였고, 절용금은 1923년까지 1,079달러를 모금하였다. 이렇게 모집된 자금은 임시정부에 1923년까지 2회에 걸쳐 총 1천 달러, 독립신문사에도 300달러를 보냈다. 그리고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설된 이후 대한여자애국단에서는 1941년 1월 20일 임시정부에 500달러를 송부하였다.


국내에서 3·1운동의 소식이 전해진 이후 하와이의 한인 여성들도, 일제의 탄압으로 희생자가 속출하면서 이에 대한 후원과 구원을 위한 단체가 조직되었다. 하와이에서는 ‘대한인부인 적십자회’를 조직하고, 거액의 자금을 모집하여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가 희생된 동포들을 구제할 목적이었다. 그 후 1919년 4월 1일 하와이에 있는 모든 단체의 여성대표들이 모여 ‘대한부인구제회’를 정식으로 결성하였다. 부인구제회가 결성된 이후 한 달 만에 국민구휼금·입회금 등 모금된 자금이 550달러에 달하였으며, 6월 말까지 1,100달러를 모금하였다. 이 가운데 500달러는 임시정부에 보냈고, 500달러를 워싱턴의 이승만에게 보냈다.


대한부인구제회에서는 「독립선언서」를 인쇄, 그 사본을 판매하여 독립운동자금으로 지원하였다. 회원들은 매일매일 점심 한 끼를 굶고 그 쌀 한 줌씩을 모아 그것으로 떡을 해 팔았으며, 태극기를 그려서 집집마다 걸게 하고, 또 손수건을 만들어 팔아 독립운동을 지원하고자 하였다. 이 밖에 하와이의 한인 여학생들도 ‘하와이 조선 여학생회’를 조직하여 독립정신을 받들고자 하였으며,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을 원조하기 위해 편지와 더불어 60달러를 보냈다. 3·1운동 당시 부인구제회에서 모금한 독립운동자금은 하와이 한인 남성들보다 여성들이 앞섰다.


이처럼 미주의 여성들은 먹을 것을 절약하여 푼푼이 모든 돈을 절약하여 애국금을 냈고, 고추장·간장·된장·묵·떡을 만들어 판 자금을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보냈다. 대한여자애국단 단장을 역임하였던 한성선은 “대한은 남자 여러분의 대한만이 아니오, 우리 여자들의 대한도 되나니, 여러분의 아내나 딸들로 하여금 책임을 다하게 하소서. 의무를 각근히 하소서”라고 하였다.  


필자 김도형

국민대 대학원에서 한국근대사를 전공했다. 하와이대학 한국학연구소에서 연구했으며, 국민대·단국대·경원대·서경대 등에서 강의했다. 미주지역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에 큰 역할을 했으며,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으로 정년퇴직했다. 현재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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