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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 Theme.3 군자금 관련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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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 준비를 위한 대담한 거사


일제의 현금수송차 습격

조선 부호·친일밀정 찾아 목숨 건 군자금 모집  


글 | 김주용(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2008년 상영된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놈놈놈)’은 1920년 1월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은행 용정출장소로 운송 중인 ‘15만원’을 탈취하는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의 주역은 ‘철혈광복단원’으로 전해진다. 철혈광복단원들은 일제의 현금수송차를 습격하여 15만원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 이 사건은 1910년대 독립전쟁 준비 시기 연해주 지역에서 무기 구입 사업을 추진했던 독립군 단체들의 거사였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일제 경찰에게 탐지되었으며, 단원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1920년 8월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결성된 항일무장단체인 보합단은 조선 각지의 부호들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고, 암살대를 조직해 군자금 제공을 거절한 부호·친일밀정, 일제 관헌 등을 제거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에 중점을 두었다.  


군자금: 독립군의 생명수


국민의 의무 가운데 국방의 의무는 공동체의 존립 자체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소이다. 이것은 초국경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그 가운데 국방비, 즉 예산은 인적 자원과 함께 군사력을 유지하는 두 축 가운데 하나이다. 


대일항쟁기 국내외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들이 가장 공통적으로 떠안고 있던 문제는 재정확보, 즉 군자금 모금이었다. 그 방법과 대상은 다를지라도 조직의 존립을 좌우할 수 있는 군자금 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1920년대 만주지역 대부분의 독립운동단체의 군자금은 국내 모금에 비중을 두었다. 국내 부호들에게 군자금 모금의 정당성과 부호들의 군자금 헌납에 대한 거부감을 제거하고자 했던 방략의 일환이었다. 


독립운동단체들의 군자금 모금 방법과 수단은 먼저 권총과 폭탄 등 무기를 휴대하고 부호들에게 자금을 요구하거나 협조를 구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직접 무기를 사용하기보다는 휴대하고 위협하여  협조를 요구하였다. 이는 독립자금을 순순히 내줄 부호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현실이 배경에 있었다.  


둘째 망명시 국내 재산을 처분하여 조달한 자금이었다. 1910년 경술국치 전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만주지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이주한인 자치단체를 설립하거나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의 장기화에 대비하였다. 여기에서 필요한 비용은 대부분 국내에서 이주할 때 휴대한 자금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자금은 세월이 지나면서 소진되었고 1920년대 초 독립운동 단체의 핵심 멤버들은 이미 자금 여력이 충분하지 못한 상태였다. 셋째 독립운동 단체들이 관할 지역 내 한인들에게 세금 형태의 의무금을 체계적으로 징수하는 형태이다. 그러나 척박한 해외 개척지에서 가난한 동포들이 충분한 독립자금을 낼 수 없었다. 독립군 조직의 군자금 모금은 독립운동 단체 운동의 추동력을 담보하는 결정적인 문제였다.


철혈광복단의 15만원 사건


십여 년 전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개봉되었을 때 그 역사적 배경에 관심이 모아졌다. 그 영화는 1920년 1월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은행 용정출장소로 운송 중이던 ‘15만원’을 탈취하는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되었다고 했다. 이 사건의 주역이었던 독립운동가들은 ‘철혈광복단원’으로 알려져 있다. 


간도 15만원 사건은 철혈광복단원 윤준희(尹俊熙), 임국정(林國順), 최봉설(崔鳳卨), 한상호(韓相浩), 박웅세(朴雄世), 김준(金俊) 등 6명이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용정 조선은행 출장소로 가던 일제의 현금수송차를 습격하여 조선은행권 15만원을 탈취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15만원은 오늘날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15억 8천만 원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이들이 소속되어 있던 철혈광복단은 1911년 초 이동휘가 간도에 왔을 때 조직한 광복단(光復團)과 이후 노령지역에서 1917년 러시아 혁명 전에 조직된 전투적인 비밀결사 철혈단(鐵血團)이 1918년 가을 1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따라 고양된 운동조건에 부응하여 통합 조직되었다. 약칭 ‘철광단’으로 불린 철혈광복단은 폭력, 즉 무장투쟁의 방법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하려는 목표를 가졌던 청년 단체이다. 그 활동 범위는 간도 지역과 노령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주요한 독립운동가들의 대부분을 포괄하고 있었다. 


최계립에 의하면, 15만원 사건 당시 철혈광복단 단원의 수는 300명 이상의 여성단원들을 포함하여 353명에 달했다고 한다. 철혈광복단은 3·1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직된 비밀결사로서 그 본부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두고 있었다. 철혈광복단의 많은 단원들은 3·1운동 이후에 조직된 노령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나 북간도의 대한인국민회와 같은 대중적인 공개운동조직들의 활동가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철혈광복단은 비합법적인 전투적인 비밀결사로서 대중적, 합법적 정치단체였던 연해주 지역의 대한국민의회나 북간도의 대한국민회의 인적 공급원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철혈광복단원은 군자금 모금 준비과정에서 용정 조선은행 출장소 사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전홍섭(全弘燮)을 설득하여 용정으로 현금 수송대가 오는 정보를 받았다. 윤준희·김준·박웅세는 정찰을 위해 먼저 떠났고, 최봉설·임국정·한상호는 동량어구(東梁於口) 버드나무 숲에 매복하였다. 1920년 1월 4일 철혈광복단원들은 현금수송차를 습격하여 15만원을 탈취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사건은 1910년대 독립전쟁 준비 시기 연해주 지역에서 무기 구입 사업을 추진하였던 독립군 단체들의 거사였다. 탈취작전에 성공한 독립지사들은 국민의회 선전부장 대리였던 김하석과 함께 1월 23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거사는 무기구입 과정에서 한인 밀정에 의해 일제 경찰에게 탐지되었으며, 1월 31일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 등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다. 결국 탈출에 성공한 최봉설을 제외하고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보합단의 군자금 모금: 경계를 넘다


1920년 8월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결성된 항일무장단체인 보합단은 조선 각지의 부호들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고, 암살대를 조직해 군자금 제공을 거절한 부호·친일밀정, 일제 관헌 등을 제거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에 중점을 두었다. 하지만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본부를 중국 관전현(貫甸縣)으로 이전하여 철저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보합단의 군자금 모금은 김도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김도원은 1920년 11월 15일 이광세(李光世), 장정용(張廷鏞) 등과 함께 경성(京城)에서 조상백을 만나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논의하였다. 경성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던 조상백이 500원의 자금을 확보하였다는 소식을 전하였고 이에 김도원이 이를 확보하고자 했다. 보합단 군자금 모집책들이 그러하듯 김도원도 군자금 모집 취지서와 영수증 및 경고문을 항상 휴대하고 다녔다. 김도원은 12월 4일 경성부 운니동 99번지 변덕영(邊德榮) 집에서 군자금 모금을 하던 중 종로경찰서 형사 이정선(李廷善)을 사살하고 근등무례(近藤茂禮)에게 중상을 입혔다. 불행히도 김도원 등은 거사 당일 체포되었다. 이 사건의 반향은 컸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는 ‘전율할 만한 대음모’라고 선전하면서 보합단 활동의 정당성을 폄하하려고 하였다. 특히 일제는 보합단의 활동을 ‘광폭한 행동’이라고 규정하여 일반인들의 지지를 확보할 수 없다고 단정해버렸다.


이른바 ‘관철동 사건’은 20여 명의 연루자가 체포될 정도의 큰 사건으로 알려졌으며, 세간의 큰 관심을 끌었다. 김도원은 3차 신문을 거치면서 1922년 김병로, 허헌 변호사가 참석한 가운데 공판이 진행되었으며, 마침내 1922년 2월 4일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그리고 이듬해 1923년 4월 6일 순국하였다.


김도원과 함께 보합단 군자금 모집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 이종영이다. 그는 인텔리 출신답게 군자금 모금 방식과 그 효과에 대하여 정확하게 인식하였다. 그는 영수증, 경고문, 취지서 용지를 휴대하고 다녔다. 이는 계획적인 군자금 모금이며 일제에 피해를 최대한 입힐 수 있는 방안의 강구였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군자금을 모금한 후 반드시 영수증을 발행하였다. 이는 군자금 모금의 투명성을 담보하는 측면에서 영수증 발행은 필수적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뿐만 아니라 이종영은 만주신문사를 운영하면서 군자금 모금의 거점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중간 거점을 확보한 상태에서 군자금 모집을 진행할 때 그 위험성이 감소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특히 이종영은 보합단원으로는 드물게 일본 유학파 출신이었으며, 일회성 군자금 및 소규모 군자금 모집의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종영은 1920년 5월경 대동상회 주인이었던 최남을 접촉하면서 자신의 군자금 모집과 이를 통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연계를 구체화하였다. 또한 이종영은 청년들을 무장시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군자금 모금을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당시 보합단은 군자금 모금 장부를 작성하는 등 치밀한 계획 속에서 군자금 확보에 주력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무기를 구입하였다. 뿐만 아니라 폭탄을 직접 제작하기까지 하였다. 보합단의 군자금 모금이 국내의 언론에 보도되면서 그 격렬함과 조직성에 대해 일제는 군자금 모금의 부적절성을 부각함으로써 독립운동의 분위기 차단에 주력하였다. 보합단의 군자금 모금활동은 북경에서 또 다른 보합단을 탄생시킬 만큼 영향력이 컸다.


군자금 모금의 특징: 하나를 희생하여 아홉을 구한다


국외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는 취약한 재정상태를 유지한 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운동 역량을 극대화하는 데 일정한 한계로 작용하였으며, 각 단체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무력 등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재정확보의 어려움은 당시 설립된 독립운동 단체의 공통적 현상이었다. 보합단을 비롯한 1920년대 만주지역 단체는 각 기관마다 재무에 관련된 부서를 설치하여 비정규군의 취약성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세수 확보 및 그 운영에는 나름대로 전문가를 고용하는 것이 합리적이었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못했다. 북로군정서의 경우 재만 한인의 재산 정도에 따라 납세 형식으로 일정부분 징수하였다. 하지만 이주한인 대부분이 농민이라는 점, 국내의 힘겨운 삶의 무게를 벗어나기 위해 이주한 사람들이라는 점 등이 재정확보, 즉 군자금 모금에서 가장 고려해야 할 사항이었다. 


비정규군으로서의 일정한 한계를 띠고 출발한 독립운동 단체는 재정확보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는 조직 구조였다. 그 구조에 안주하는 측면도 없지 않지만, 그 구조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독립운동단체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형식의 회비를 일괄적으로 거두었다. 여기에서 일정부분 갈등 요소가 존재하였다. 이것이 재정과 연계해서 독립운동 단체가 극복해야 할 두 번째 과제였다. 즉 이주한인과의 갈등은 재정확보의 큰 장애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와 연동해서 각 단체의 재정 역시 영세함을 극복하지 못했다. 요컨대 독립운동 단체마다 재정부서를 따로 설치하여 회계를 실시하였지만 비정기적 군자금 모금 등으로 재정확보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금 확보를 통해 독립운동의 역량을 발휘해야 할 단체들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었다.


개인의 희생으로 독립운동 단체가 존립하였던 것은 비정규군이 가졌던 취약점 가운데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자신을 버리고 조국을 찾는 길에 열정을 불태웠다. 그 힘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존립케 한 추동력이 아니겠는가. 그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필자 김주용

동국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 연변대학교 민족연구원 교수, 중국 인민항일전쟁기념관 방문학자,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서울역사편찬원 편집위원, 독립기념관 인명사전편찬 실무위원, 국가보훈처 현충시설심의위원,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일제의 간도지역 침략과 한인사회』, 『역사를 따라 걷다 1·2·3』, 『만주지역 친일단체』, 『한국독립운동과 만주』 등 10여 권이 있다. 외교부, 교육부, 서울시, 중앙공무원연수원 등에서 독립운동사 관련 다수 세미나 강연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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