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 Theme.4 독립군을 키운 숨은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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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자금으로 나라와 민족을 구하다
전 재산 조국 제단에 바쳐
항일투쟁의 기틀 마련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글 | 이동언(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소장)
한민족은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과정에서 독립운동자금은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절실하였다. 경제적인 여력 없이는 독립운동을 추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자금 조달에 큰 공을 세운 대표적 인물로 안희제, 이회영, 대한민국임시정부 민당요원으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신현상, 러시아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재무차장 윤현진 등을 들 수 있다. 대일항쟁기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해 전 재산을 기꺼이 내놓는 것 역시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대담하고 고귀한 이들의 희생은 조국의 독립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실천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

한민족은 국권 회복을 위해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과정에서 독립운동자금은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절실하였다. 경제적인 여력 없이는 독립운동을 추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한 숨은 주역들이 있었다.
독립운동자금과 군자금이라는 용어는 혼용해서 쓰이고 있다. 군자금의 사전적 의미는 ‘군대의 운영과 군사 행동에 필요한 모든 자금’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군의 자금을 말한다. 독립운동자금은 ‘독립운동을 위한 모든 자금’을 뜻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일제 측 보고서를 보면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거나 발각된 개인이나 단체가 많이 있었다. 독립운동자금이나 군자금을 모집하는 일은 비밀리에 추진되었기 때문에 이를 입증하는 문서나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현재 남아있는 자료 중에서 군자금의 경우 1921년 1월 서로군정서에서 군자금을 낸 이종식에게 발행한 영수증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공채가 있다. 그 외에는 독립운동가들의 회고록이나 증언을 통해 언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개인이나 단체를 통해 독립운동자금을 상해로 보내왔다. 미주를 비롯하여 중국·러시아 등지의 한인동포들이 푼푼이 모은 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냈다. 특히 하와이와 멕시코 등지로 이주한 한인 노동자들은 사탕수수밭에서 힘들게 번 눈물겨운 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냈다.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해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로 안희제, 이회영, 대한민국임시정부 민당요원(民黨要員)으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신현상(申鉉商), 러시아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崔在亨),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재무차장 윤현진(尹顯振) 등을 들 수 있다. 지면 관계로 안희제와 이회영 일가를 소개한다.
독립운동자금의 젖줄, 안희제

안희제(安熙濟 1885.8.4~1943.8.3)처럼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는 흔치 않다. 안희제는 근대교육의 보급을 위한 교육구국운동으로 의신·창남·구명학교 설립, 교남교육회에서의 계몽운동,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결성,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한 백산상회 설립, 독립운동 인재 양성을 위한 장학재단 기미육영회 조직, 문화운동 확산을 위한 부산예월회 조직, 경제권 수호를 위한 협동조합운동 전개, 중외일보를 통한 항일언론투쟁,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발해농장 경영, 만년에는 대종교에 귀의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안희제의 활동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독립운동자금 조달이다. 배가 고파서 우는 어린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엄마의 심정으로 안희제는 독립운동자금의 젖줄이 되고자 했다.
1910년 일제의 한국강점으로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렵게 되자 안희제는 이듬해인 1911년부터 3년간 러시아와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일본 견학이라는 소문을 내고 러시아 원동지역으로 갔다. 두만강을 건너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페테르스부르크를 거쳐 북간도 지역을 둘러보았다. 이때 안희제는 6개월간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면서 러시아로 망명해 있던 안창호(安昌浩)·신채호(申采浩)·이갑(李甲)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만나 앞으로의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였다. 안희제가 1911년 말경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러시아의 수도 페테스부르크에 갔었다는 사실은 1911년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와병 중이던 이갑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안희제는 페테르스부르크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귀국길에 상해에 들러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을 만났다. 이때 김구 주석은 안희제에게 국내 정세에 대해 물었다. 안희제는 “국내의 기강이 해이하고 변절자가 많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며 애국 사상이 있다는 사람도 『정감록(鄭鑑錄)』의 ‘양백지간(兩白之間)에 가활만인(可活萬人)’만 안일하게 찾고 앉았다”고 대답하며 “세인구구양백지간(世人口口兩白之間 세상 사람들이 말끝마다 양백지간 운운하다)”이라고 하자, 김구는 안희제의 손을 잡으며 “차시양백오등양인(此是兩白吾等兩人 양백지간은 바로 우리 둘이다)”이라고 하면서 “백범(白凡)의 ‘백(白)’과 백산(白山)의 ‘백(白)’을 합하면 ‘양백(兩白)’이니 우리 두 사람이 장차 이 나라와 이 민족을 구하자”고 말했다.
1914년 귀국한 안희제는 고향의 전답 2천 마지기를 팔아 자본금을 마련하여 1916년경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설립하였다. 백산상회는 설립 초기에는 주로 곡물·면포·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소규모 개인상회였으나, 1917년 경기 호황에 힘입어 합자회사 백산상회로 전환하였다. 이후 1919년 5월 백산무역주식회사로 발전하였다. 독립운동자금 조달은 장부상 거래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일본 경찰에 발각되지 않았다. 백산무역주식회사는 국내에 서울·대구·원산·인천 등 18개소, 중국 안동·봉천·길림 등 3개소에 국외 지점 및 연락사무소를 설치했다. 이들 지점 및 연락사무소는 영업 활동지역 확대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을 위한 연락과 자금 전달을 담당했다.
독립운동자금 조달이 무엇보다도 어려웠던 만큼 안희제는 ‘임정첩보 36호’ 등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광복이 되고 경교장에서 백범 김구를 만난 최준(崔浚)은 자신이 안희제에게 건넨 독립운동자금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정확하게 전달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내심 안희제를 의심했던 죄책감에 최준은 그가 묻혀있는 의령을 향해 큰절을 하고 통곡하였다고 한다.
6천 석 재산 쾌척, 이회영 일가

이회영(李會榮 1867.3.17~1932.11.17) 일가가 우리 사회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표적인 집안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유는 민족의 역사적 과제를 일가의 재산을 던져 희생적으로 개척해 나갔다는 점이다. 더구나 형제간의 돈독한 우애를 바탕으로 생사고락을 같이했다는 점 또한 모범사례이다. 이회영 7형제 중 여섯 형제 50여 가족이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모두 만주로 이주해 항일투쟁의 기틀을 마련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은 우리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회영은 서울 저동(苧洞)에서 이유승(李裕承)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이유승은 이조판서와 의정부 참찬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鄭順朝)의 딸이다. 이회영은 위로 3명의 형 건영(健榮)·석영(石榮)·철영(哲榮)이 있었고, 아래로는 동생 시영(始榮)과 여동생 2명 그리고 이복동생 소영(紹榮)·호영(頀榮)이 있었다. 여동생 2명과 소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첫째 여동생은 신익희의 여섯째 형으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신재희의 부인이다.
1909년 봄 서울의 양기탁 집에서 신민회 간부인 이회영과 안태국(安泰國)·이승훈(李昇薰)·김구(金九)·이동녕·김기홍(金基弘)·조성환(曺成煥) 등이 함께 모여 독립군 양성을 위한 방책을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여름 이회영과 이동녕·주진수(朱鎭洙) 등이 독립운동기지 건설의 적지를 찾기 위하여 만주에 파견되었으며,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柳河縣 三源堡 鄒家街) 지방을 선정하여 개척하기로 하였다.
1910년 이회영은 6형제 가족회의의 결의에 따라 전 가족 40여 명이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자금 40만원(圓)(2021. 12 화폐가치로 31억 6천만원:한국은행 화폐가치 계산)을 가지고 12월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6형제 중 둘째 형 이석영은 당시 재상이자 부호였던 큰아버지 이유원(李裕元)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이석영은 양부로부터 물려받은 ‘6천 석(石)’이라는 거대한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자금으로 내어놓았다.
이회영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계몽(1898년), 을사오적에 대한 규탄(1905년), 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이동녕(李東寧)·신채호(申采浩)·노백린(盧伯麟) 등과 함께 설립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 활동(1906년), 중국 동삼성(일제는 만주라고 불렀음)에 이상설 이동녕 등을 특파해 교포 자녀교육을 하게 한 서전서숙(瑞甸書塾) 개설(1907년), 신민회 조직(1907년), 서울상동(尙洞)교회의 상동청년학원 개설(1908년), 농업생산과 교육을 위한 교민자치단체 경학사(耕學社) 조직(1911년), 청산리전투의 주역들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 설립(1912년), 재(在) 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조직(1924년), 항일구국연맹 조직(1931년) 등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회영은 1932년 만주에 연락근거지를 마련함과 아울러 주만일군사령관 암살 등을 목적으로 대련(大連)행 기선을 타고 만주로 가던 중, 일경에 탐지되어 체포되었다. 일본경찰의 이회영 체포 과정에서 4등 선실의 수많은 중국인 중 정확히 이회영을 지목한 것을 의심스럽게 여긴 남화한인청년연맹 단원들은 마지막으로 이회영이 상해를 떠날 때 만난 인물인 이규서(이회영 조카, 이회영의 둘째 형 이석영의 둘째아들)와 연충렬(임정요인 연병호의 둘째아들)을 의심하였고, 증거를 가지고 그들을 추궁하여 일본 경찰에 밀정행위를 한 것을 확인하고 처단하였다. 그는 노령인 데다가 일경의 무자비한 고문으로 1932년 11월 17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이석영·이회영·이호영 3형제가 만주와 중국에서 순국했으며 해방 후 이시영이 임정 요인으로서 마지막으로 환국했을 때 살아남은 가족은 2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경제적 여력 없이는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하고 절실한 독립운동자금이야말로 독립운동의 생명수였다. 대일항쟁기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또한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해 전 재산을 기꺼이 내놓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들의 대담하고 고귀한 희생은 조국의 독립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실천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

필자 이동언
건국대학교 사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근현대사를 전공하고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으로 활동했다. 현재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소장, (사)백산안희제선생기념사업회 백산학술연구원장,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 편집위원장 등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