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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 Theme.2 친일 매국노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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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나라 배반하고 ‘실리’를 쫓은 자들


일본의 식민 침탈 과정 

문명화·근대화로 정당화 부·명예 누리며 천수 다해 


글 | 구선희(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우리는 매국노라고 하면 자연스레 ‘친일파’라는 말을 떠올린다. 우리 역사에 일본의 침략에 협조함으로써 나라를 망하게 하고 동포에게 위해를 가한 ‘친일 매국노’의 흔적이 각인되어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친일 매국을 한 사람들은 갑신정변, 갑오개혁, 독립협회로 이어지는 개혁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많다. 이들은 대개 왕족이나 집권관료층에 속한 자들로 이 중 대표적인 인물이 이완용이었다. 이완용은 말했다. “무릇 천도(天道)에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를 변역(變易)이라 한다. 인사(人事)에 동서남북이 있으니 이것 역시 변역이라 한다. 천도,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실리를 잃고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 개인의 잇속만 챙기는 게 실리라고 생각한 매국노들은 끝까지 몰랐다. ‘민본(民本)’이 무엇이며, 나라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매국이란 민족의 역사와 조국을 배신하는 행위이다. 우리는 매국노라고 하면 자연스레 ‘친일파’라는 말을 떠올린다. 우리 역사에 일본의 침략에 협조함으로써 나라를 망하게 하고 동포에게 위해를 가한 ‘친일 매국노’의 흔적이 각인되어있기 때문이다. 이런 매국노는 구한말에서 시작하여 일제강점 시기에 양산되었다. 해방 이후 이들의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처단이 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지금까지도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문제가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친일 매국을 한 사람들은 갑신정변, 갑오개혁, 독립협회로 이어지는 개혁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많다. 이들은 대개 왕족이나 집권관료층에 속한 자들로 이 중 대표적인 인물이 이완용(1858~1925)이었다. 


외국에 이권 이양하고 재산 늘린 엘리트


이완용은 전통학문인 사서오경을 배워 과거시험에 합격해 관직에 들어간 엘리트였다. 그는 나라의 개혁·개방이 대세가 되는 시점에서 국가에서 설립한 육영공원에 들어가 영어와 서양문물을 공부했다. 이완용의 회고에 의하면 이때의 행보는 장차 확대될 서양과의 교제를 위한 준비였다. 영어를 배운 이완용은 1887년 주미공사관 참찬관으로 발탁되어 미국 워싱턴에 부임했다. 이후 약 2년 동안 미국에 체류하면서 이완용은 미국처럼 독립이 되어 세계에서 제일 부강한 나라가 되도록 부국강병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키워나갔다. 


그런데 1896년 2월 이완용은 국왕 고종과 태자를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시키는 데 앞장섰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하자 친러 정권이 성립되었다. 친러 정권의 농상공부대신으로서 이완용은 운산금광 채굴권과 경인선 철도부설권을 미국에, 울릉도 등의 산림벌채권을 러시아에 넘겨주었다. 이로 인해 이완용은 외국에 이권을 양여했다고 비난을 받았으나 그만큼 재산을 늘릴 수 있었다. 1896년 7월 독립협회가 조직될 때는 창립총회 위원장에 추대되기도 했다. 독립협회가 외국의 이권 침탈과 대신의 이권 개입을 규탄하는 등 차츰 정부 정책을 비판하자 이완용은 독립협회를 탈퇴했다. 


이완용의 국제정세에 따른 변신은 고종의 줄타기 외교와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이완용은 고종황제에게 충직한 신하였다. 그의 권력이 어디로부터 나오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 후 그는 궁내부 특진관이 되면서 친일파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국제정세 흐름에 밝았던 이완용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을 장악하리라는 것을 읽고 있었다. 이완용은 나라를 빼앗으려는 일본에 맞서 싸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완용뿐 아니라 무소불위의 전제 황권을 갖고 있던 고종황제나 그 밑의 정부 관료나 다 똑같았다. 


그들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에 반대하며, 지배층의 부정부패에 맞서 개혁을 요구하는 백성들의 열망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통치력을 유지해 온 집단이었다. 때문에 설령 외세를 막기 위해 맞서고자 해도 그들과 함께하며 지지해 줄 백성의 동력을 규합해낼 수 없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자신들의 기득권이 보장되는 범위 내에서 제국주의 세력과 결탁하며, 일본의 식민 침탈을 대한제국이 문명화·근대화로 가는 길이라 믿으며,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길뿐이었다.


이완용의 친일 매국노로의 변신은 그가 이런 지배층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데서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1905년 11월 17일 그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으려는 일본과의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서면서 나라를 저버리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이어 1907년 7월 24일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당할 위기에서 이완용은 내각총리대신으로서 대한제국의 국방력을 무력화시키는 길을 택했다. 


1910년 8월 22일 이완용은 대한제국과 일본과의 합병을 추진함으로써 자신의 나라를 일본에 넘겨주었다. 그는 일본의 한국 병탄에 협조한 공으로 일본으로부터 작위도 받고 돈도 받고 훈장도 받았다. 민족과 나라를 배반한 원흉으로 여러 번 습격을 당했지만 부와 명예를 한껏 누리며 천수를 다했다.


일본어를 출세의 도구로 삼아


송병준(1857~1925)은 일본이 계획한 대한제국과 일본의 병합 실행 과정에 동원된 친일 매국노이다. 함경남도 장진 출신인 그는 한때 민영환의 식객으로 있었다. 그는 무과에 합격해 수문장, 훈련원 판관, 사헌부 감찰 등을 지냈다.


1884년 갑신정변 후 송병준은 일본에 망명해 있던 김옥균을 암살하라는 밀령을 받고 일본으로 갔다. 그가 민씨 척족과 끈이 닿아 있었기에 이런 역할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오히려 김옥균에게 감화되어 동지가 되었고, 1886년 귀국 후 김옥균과 밀통 혐의로 투옥되었다. 민영환의 주선으로 곧 풀려난 후 흥해군수, 양지현감을 지내다가 1891년 장위영 영관이 되었다. 

송병준은 갑오개혁 당시 민씨세력으로 지목되자 일본으로 건너갔다. 노다 헤이지로(野田平治郞)라는 이름으로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양잠, 염직 기술을 익히고, 야마구치현에 양잠강습소를 열어 양잠 기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일본 저명인사와 교류하고, 고위층 정계 인사들과 교제하기도 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군사 통역관으로 조선에 들어와 전쟁 과정에서 군납상인으로 이권을 챙겼다. 이완용이 영어를 잘해서 행세를 했다면, 송병준은 일본어를 출세의 도구로 삼았다. 일본의 후원으로 일진회가 만들어지자 동학교단의 이용구는 회장이 되었고 송병준은 평의원회 의장, 지방총대장 그리고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 대표 등을 맡아 활동했다. 송병준과 이완용은 일진회에 참여하고 있던 일본 낭인들과 연계되어 일본의 전쟁 수행에 협조했다. 러일전쟁이 끝나자 송병준은 동양평화를 위해 일본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는 내용의 대중강연을 벌이고 다녔다. 


송병준은 1907년 이완용을 중심으로 새로운 내각이 조직될 때 당시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농상공부대신으로 들어갔다. 송병준은 일본이 실시한 대한제국의 국유재산과 황실재산 조사를 담당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송병준은 이완용과 함께 고종황제를 위협하여 양위를 성사시켰다. 이어 대한제국의 내정까지 넘겨주는 ‘정미7조약’ 체결에 앞장섰다. 


송병준은 이완용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의 양 날개가 되어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을 도왔다. 1909년 송병준이 주도하고 있던 일진회에서 한일합병 청원을 일본 내각에 제출했다. 이 과정에서 송병준과 이완용은 서로 경쟁하면서 일본의 하수인 노릇을 했다. 경쟁의 결과 송병준은 이완용에게 밀려 1910년 병탄 조약은 이완용 내각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송병준은 친일 매국노로 세간의 지탄을 받았으나 일본에 협조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으로부터 작위도 받고, 돈도 받아 끝까지 개인의 영달을 위해 살았다. 


축적한 부 유지 위해 기득권 보호


일본은 대한제국을 병탄한 후에 ‘조선귀족령’을 제정하고 친일 매국노 76명에게 귀족의 칭호를 주었다. 76명 중 즉시 작위를 거절한 사람 8명을 제외하면, 나중에 인원수 변동이 있었지만 당시엔 68명이 작위를 받았다. 68명 중 명성황후 민씨 척족이 8명이었다. 그 8명 중에 ‘자작’ 작위와 함께 5만 엔의 은사공채를 받은 민영휘가 있었다. 민영휘는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이자고 주장했던 민영준으로, 1901년에 이름을 영휘로 바꾸었다. 


민영휘(1852~1935)는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일제강점기 조선 최대 부자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며, 휘문고등학교를 세운 이다. 그는 1877년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오른 이후 민씨 척족으로 고종과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아 1888년(양력)에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는 등 요직을 거치며 백성의 재물을 수탈함으로써 부를 쌓기 시작했다. 민영휘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농민군 진압을 위해 청나라 군대의 파병 요청에 적극적이었던 것도 축적한 부를 유지할 수 있는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로 인해 일본은 힘들이지 않고 일본군을 조선에 들여보낼 수 있었다.


1894년 7월 23일(음력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장악한 다음날 민영휘는 “오로지 수탈을 일삼아 자신을 살찌우는 것으로 원망을 샀다”는 이유로 원지유배 처벌을 받았다. 이날 탐학자에 대한 조치는 동학농민전쟁의 원인이 탐관오리 특히 민씨 척족들의 부정부패에서 기인한다고 여겨 본보기로 민영휘를 비롯한 민씨 척족 몇 명을 처벌한 것이었다. 


민영휘는 1894년 8월 5일(음력 7월 5일) 다시 탄핵을 당했다. 전국의 억만 백성의 입을 대신해 진술한다고 시작되는 상소에서 민영휘의 잘못은 “정사를 전횡하고 임금의 총명을 가리며 백성을 수탈하여 소요를 초래하고 원병(援兵)을 불러들이게 만들며 난이 일어나자 먼저 도망친 간신(奸臣)”이라는 데 있었다.


민영휘는 자신에게 재산을 강탈당한 사람들이 재산을 되찾겠다고 나서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황성신문』(1905.7.24.), 『대한매일신보』(1908.10.15.), 『공립신보』(1909.1.27.) 등에는 민영휘에게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이 그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는 보도가 게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축적한 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민영휘는 일본의 시조신을 모시는 신궁봉경회의 고문으로 위촉되거나 한일합병을 선동하는 이완용의 국민연설회 총대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에 협조함으로써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와 돈을 받았다. ‘일한합방 기념사진’(1910.8.29)을 보면 맨 윗자리 가운데 메이지 일왕이 있는 줄에서 일왕의 왼쪽으로 순종, 고종, 민영휘가 나란히 앉아있다. 그 아래 줄에 이완용 등이 있다. 사진으로도 당시 민영휘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이완용은 말했다. “무릇 천도(天道)에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를 변역(變易)이라 한다. 인사(人事)에 동서남북이 있으니 이것 역시 변역이라 한다. 천도,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실리를 잃고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


개인의 잇속만 챙기는 게 실리라고 생각한 이완용·송병준·민영휘 같은 매국노들은 끝까지 몰랐다. ‘민본(民本)’이 무엇인지를, 나라의 힘은 백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나라를 잃은 소식을 전해 들은 전라도 구례에 사는 백성, 매천 황현은 나라가 망했는데 오백 년 선비를 키운 나라에서 책임지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며 자결했다. 일본의 병탄에 맞선 사람들은 대한제국의 황제도 고위 관료도 아니었다. 나라를 잃음에 온몸으로 슬퍼하고 잃은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해 신들메를 고쳐 맨 이는 바로 깨어있는 백성이었다.  


필자 구선희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근대 한중관계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사연구관을 역임했으며, 현재 고려대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 근대 대외관계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근대 대청정책사 연구』(1999)가 있고, 공저로 『한반도의 외국군 주둔사』(2001), 『다시보는 명성황후』(2006), 『韓国併合100年を問う』 (2011), 『개항기 서울에 온 외국인들』(2016),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근대편』(201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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