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 Theme.1 국외에서 펼친 독립운동의 양상과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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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서 아메리카까지 독립운동 무대 확대
시기·성격·양상 달라도
나라 찾겠다는 염원은 세계 어디서나 똑같아
글 | 김희곤(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장)
한국인이 발붙이고 살던 세계 모든 곳에서 독립운동이 펼쳐졌다. 중국이나 일본처럼 가까운 곳이든, 아메리카와 유럽처럼 먼 곳이든 관계없었다. 독립운동을 일으킨 시기나 성격, 펼쳐진 양상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었을 뿐, 나라 찾겠다는 한국인의 염원과 저항은 세계 어디에서나 똑같았다. 나라 밖에서 독립운동이 시작된 곳은 국경을 맞닿고 있는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였다. 유인석을 비롯한 의병장들이 만주를 드나들며 활동하기 시작하던 때가 1896년 무렵이고,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립운동 기지가 만주와 연해주 곳곳에 토대를 잡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 유학생들, 미국과 쿠바 노동이민자들이 합세하면서 독립운동 무대는 더욱 확대되었다.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나라 밖에서 독립운동이 시작된 곳은 국경을 맞닿고 있는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였다. 유인석을 비롯한 의병장들이 만주를 드나들며 활동하기 시작하던 때가 1896년 무렵이고, 1900년대에 들면서 만주와 연해주 곳곳에 여러 인사들이 근거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계몽운동을 벌이던 인물들도 앞다투어 참가함에 따라 1900년대에 들어서는 독립운동 기지가 곳곳에 토대를 잡기 시작했다.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립운동 무대는 확대되었다. 일본에는 유학생들이 조국의 멸망을 막자는 논의를 시작하였다. 미국에는 노동이민자들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펼쳐 나갔다. 1903년 하와이에 도착한 이민은 다시 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한 본토로 확산되고, 이에 따라 한국 독립운동의 영역도 퍼져갔다. 멕시코와 쿠바에 도착한 노동이민도 마찬가지였다.

1910년대에 주목할만한 곳으로 상하이와 베이징이 있다. 상하이와 난징은 신해혁명의 핵심부였고, 한국이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려는 신규식·조성환·신채호·박은식 등이 동제사를 조직하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베이징에는 청국 정부에 기대를 가진 인물도 있고, 국내외를 연결시키는 거점을 만들면서 청년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신한혁명당을 조직하여 대응하고, 1917년에는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여 주권재민과 공화주의 국가 건설을 제시하였다.
미주에서는 안창호가 앞장서서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하여 동포사회의 안정적인 뿌리 내리기와 독립운동의 기틀을 잡아 나갔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질 무렵 하와이에서는 박용만이 앞장서서 대조선독립군단을 조직하여 군사훈련을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 당시 하와이로 갔던 군인 출신들도 주역으로 참가하였다.
독립선언 발표 및 외교활동 본격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3·1운동으로 일컬어지는 한국 독립선언이 터져 나왔다. 이는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에서 한국 문제를 의제로 상정하여 독립을 시켜달라고 전 세계 열강에게 요구하고 나선 것이고, 그 어느 국가나 민족보다 선두를 치고 나간 것이다. 일본 도쿄나 만주, 연해주와 미주를 가리지 않고 한국인이 터를 잡은 대다수 지역에서 독립선언이 터져 나왔다. 거기에서 선언된 독립국의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정했다. 대한제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으로 정함에 따라 한국 역사 최초로 민주공화제가 성립했다. 다만 망명지에서 세운 것이라 임시정부(정부)와 임시의정원(의회)이 이를 운영하되, 국토를 되찾으면 정부와 국회가 이를 계승한다는 사실을 헌법에 명시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나라는 더 이상 제국이 아니라 민국이었고, 독립운동을 통해 근대국가를 달성했으니, 3·1운동을 일컬어 시민혁명이라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지자 세계 곳곳의 한국 독립운동 조직들은 이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임시정부는 원격으로 국내 행정망을 가동하는 데 힘썼고, 만주의 독립군 조직을 정부 안으로 끌어들이도록 노력한 끝에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를 포괄하기도 했다. 또 임시의정원에는 국내외 지역별 의원을 선출하여 의회 기능을 수행하였다.
외교활동에도 힘을 썼으니, 외교총장 김규식을 중심으로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활약과 초대대통령 이승만이 축을 이루어 펼친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미국에 대한 활동이 두드러졌다. 1921년 워싱턴 태평양평화회의를 겨냥하여 중국 쑨원이 이끌던 광둥 호법정부와 연대활동을 펼쳤고, 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표회의 등에 대한 외교활동은 직접 한국 문제를 다루고 지원받는 계기를 만들어냈다.
무력투쟁 노선 지향, 전시체제 본격화
기대한 것과는 달리, 국제적으로 베르사유체제가 굳어지자 국외 독립운동은 장기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김원봉 중심의 의열

1920년대 일본 지역은 제국주의 본국이라는 점에 따라 제약 조건이 많았지만, 2·8독립선언으로 유학생들의 강력한 투쟁성을 드러냈다. 1920년대에 들면서 노동운동과 아나키즘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특히 간토대지진 당시 한국인의 억울한 희생에 항거한 김지섭의 니주바시의거나 박열의 투쟁이 손꼽힌다. 1930년대 들어서는 점차 노동운동 중심으로 축이 형성되어 갔다.

중국국민당 정부가 충칭으로 전시수도를 옮기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을 거쳐 충칭으로 이동하면서 본격적으로 전시체제를 갖추어갔다. 충칭에 도착하던 1940년에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그 이듬해 태평양전쟁이 터지자마자 일본에 선전포고를 발표하고 한·중, 한·미, 한·영 군사합작을 도모하였다. 미국 전략첩보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CIA 전신)와 협력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하고, 인도 미얀마 전구에 요원을 파견하여 한·영 군사합작을 일구어냈다. 중국공산당 본부가 터 잡은 옌안에도 조선의용군이 결성되어 공동항전에 참가하였다. 한편 김구 주석을 중심으로 장제스에게 집중적으로 펼친 외교활동은 카이로선언에 한국독립보장 내용이 담기는 결실을 일구어냈다. 같은 시기에 서영해가 앞장선 유럽 외교활동이나 이승만이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를 이끌며 펼친 외교활동도 높게 평가할 만하다.
시기·지역 따라 독립운동 성향 달라
국외에서 펼친 독립운동은 그 지역의 정치적인 성향이나 지형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과 일본 및 미주지역의 정치적 상황은 서로 달랐고, 그 속에서 전개하던 독립운동도 그 성향을 달리하였다. 심지어 하나의 국가지역에 존재하더라도 그 지역의 정치적 지형에 따라 활동 내용도 달랐다.
예를 들자면 중국지역에서 1910년대와 1920년대는 베이징과 광둥의 성향이 달랐고, 그 이후에는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의 영향권에 따라 차이를 보였다. 또 러시아혁명의 전후가 다르듯이 같은 지역일지라도 시기에 따라 차이를 보였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그 지역 국가나 세력에 종속된 것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반대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이 자리 잡은 지역이나 국가의 이념과 방략을 수용하고 이용한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북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독립운동사를 전공,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8년부터 2019년까지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편찬위원장, 한국근현대사학회장을 지냈다. 2007년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을 세우고, 2014년 경북독립운동기념관으로 승격시켜 2020년까지 관장을 맡았다. 현재 안동대학교 명예교수와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