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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 Theme.2 중국 지역 항일무장투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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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치열하고 광범위했던 독립운동의 메카 


국외 독립기지 건설하고

민족교육으로 인재 양성 반제국주의 연대 이끌어  


글 | 김주용(원광대 교수) 


한국독립운동은 전 세계에서 전개되었다. 그 가운데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중국 지역에서 가장 치열하면서 광범위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1931년 만주사변(9.18) 이후에는 한중 공동 항일투쟁이 만주와 중국 관내에서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1943년 11월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승인하는 카이로회담의 결과로 나타났다.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의 눈물겨운 외교전의 승리이자 한국독립운동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국제사회가 인정한 셈이다. 중국 지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한국 독립을 위해 싸웠던 반제국주의전의 주전장(主戰場)이자 협력과 연대의 공간이기도 하다. 


한중 수교 30주년, 한중 공동연대의 의미


2022년 8월 24일, 한중수교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근대 한중 양국은 역사의 공통적 경험이 있다. 바로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했던 역사이다. 만주를 비롯한 중국 전역에서 한중 공동 항일투쟁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따라서 한중 공동 항일투쟁은 중국인들에게 자국민들의 항일투쟁 열기를 고조시키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32년 4월 상하이 홍커우공원의 윤봉길 의거는 중국 국민정부의 대일항전과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이 전환점을 맞게 된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1938년 10월 10일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에서 조직된 조선의용대원들의 활동은 동방 피압박 민족들의 연대를 공고히 하는 기회도 되었다. 당시 중국 언론에는 조선의용대원들의 활동과 희생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한국독립운동의 위상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다고 기사화했으며, 이것이 바로 한중 연합의 정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중국 동북지역(만주) 한인이주와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사의 특징은 세계성과 보편성을 들 수 있다. 세계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만주 지역은 독립운동의 메카였다. 적어도 1930년대 말까지 독립운동의 추동력은 한인사회의 토대 위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었다. 서북간도 지역에 이주한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전개된 독립운동은 신흥무관학교로 상징되는 국외 독립운동 기지의 건설로 나타났다.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쟁탈전이 가속화되던 19세기 말, 한반도의 정치 경제 상황은 극도로 불안정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함경도와 평안도 주민들이 본격적으로 만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한인들의 이주는 관리들의 착취와 가뭄 등으로 인한 기근이 이유였다. 한인들은 척박한 토지를 개간하고 물을 대어 논농사를 시작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만주로의 한인이주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지역적으로 서간도(남만), 북간도(동만)와 북만 지역에 시차를 두면서 한인이주사회가 형성되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항일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1910년대부터 치열한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서간도, 북간도는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으며 많은 한인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어 독립운동의 인적 물적 토대를 이루게 되었다. 또한 일제의 탄압과 중국의 무관심 내지 일제와의 탄압 공조를 통한 독립운동 와해 작업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의 독립운동은 거대한 만주라는 공간 속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북만주 하얼빈에서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대륙 침략과 한반도 침략의 거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였으며, 1920년 10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청산리대첩 역시 북간도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만주 지역의 조직적인 항일투쟁을 선도하고 그 인적자원을 끊임없이 배출해낼 수 있었던 신흥무관학교의 기상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이렇듯 만주 지역은 무장투쟁론에 입각하여 서간도의 서로군정서, 북간도의 북로군정서를 필두로 격렬한 항일투쟁을 전개한 곳이다. 현재 중국 동북 지역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만주 지역은 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을 보고자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주도(州都)인 연길을 통하여 오는데, 초기 이주한인사회가 형성된 곳으로 용정(龍井)을 중심으로 삶의 터전을 가꾸어 나가던 지역이다. 특히 명동촌을 비롯한 연변 지역은 항일민족교육을 실시하여 식민지 조선의 멍에를 거두어 내기 위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도 연변 지역을 비롯하여 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선열들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또는 무디어진 세월 속에 항일독립운동의 열기를 느끼기 위해 이곳을 찾고 있다.


조선의용대, 중국 전장에 나가다


1930년대 중국 지역에서 한국독립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먼저 1931년 9월 18일 일제의 만주 침략과 이듬해 3월 만주국 성립은 만주지역 한국 독립운동 세력에게는 크나큰 시련의 시작이었다. 1933년경 민족주의 세력의 대부분이 관내로 이동해서 활동하게 된 것도 이와 직접 관련이 있다. 한국독립운동의 외적 변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이 북경 근교 노구교(蘆溝橋)에서 침략의 구실을 만들면서 중일전쟁의 서막이 올랐고, 이에 중국도 일본과 전면전을 선포하게 되었다.


1938년 10월 10일 호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에서의 조선의용대 창설은 한국과 중국이 운명공동체임을 알리는 한편, 일제의 만주사변(9.18) 및 만보산사건과 같은 민족이간책 등을 극복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특히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관내 지역 역시 일제의 침략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 중국은 이미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합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에 공동으로 대응할 필요성이 절실했다. 물론 이것은 한국 독립운동세력도 마찬가지였다.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동 항일전선 구축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며, 효과적인 대적(對敵) 활동을 위해 한중 연합론이 급속도로 대두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조선의용대의 창설로 연결되었다.


조선의용대는 우한(武漢)이 일제에 의해 함락되자 급히 꾸이린(桂林)으로 대본부를 이전하였다. 꾸이린에는 중국군사위원회, 중앙군관학교가 이전하여 있었으며, 중국인 문호 빠진(巴金)이 유자명(柳子明)과 교유했던 문화생활출판사 등 당시 중국의 정치, 문화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조선의용대는 또 다른 우군을 만나게 된다. 궈모뤄(郭沫若)가 상해에서 창간한 구망일보사와의 인연은 조선의용대가 중국에서도 한국독립운동을 알리고 중국과 함께 공동 항일전선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용대의 활동과 위상을 알리는 데는 자신들의 선전도 중요하지만,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제3자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조선의용대는 창설 당시 총대부와 3개 구대로 편제되었다. 총대부에는 대장 김원봉을 비롯하여 13명의 대원이 있었으며, 제1구대와 2구대는 각각 40명 정도의 대원이 있었다. 그 후 조직이 확대되면서 1940년 2월에는 본부 인원이 90명에 근접하였고, 제3구대가 새로 추가되어 전체 인원은 200명에 이르렀다. 


조선의용대는 창설부터 중국항전 참가, 조국해방, 동방 약소민족과의 연대를 통한 민족해방 등에 역점을 두면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중국항전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국인들에게 한국 청년들의 활동상을 알려야 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연극이었다. 제1지대가 있었던 호북성 노하구(老河口)에서는 김창만(金昌滿) 등이 주축이 되어 중산공원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연극을 공연하여 호평을 받았다. 특히 일본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중국 노하구 예술대와 공동 공연을 통해 반전동맹을 이끌어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항일무장투쟁 


안창호가 선언했듯이, 1920년은 임시정부에게 ‘독립전쟁의 원년’이었다. 구체적인 선언이 1920년 1월 13일 러시아·만주 지역 동포들을 대상으로 발포된 ‘국무원 포고 제1호’였다. 이는 ‘독립전쟁의 제1년’이라고 규정하고, 지역 동포들에게 분발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았다. 군무부도 ‘국무부 포고’ 1호를 발포하여 지금이 바로 전쟁을 일으킬 시기라고 밝히고,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대양성과 조직에 민족 전원이 참여하라고 촉구했다.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을 준비하면서 크게 네 가지 방면에서 정책을 밀고 나갔다. 첫째는 제도와 법령을 마련하고, 둘째로 국내 지역에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을 조직하여 독립전쟁을 위한 군사 기초조직을 결성하며, 셋째는 육군무관학교를 세워 군사간부를 양성하고, 끝으로 직할부대를 조직하거나 기존 독립군을 산하 부대로 직할시키는 방안이었다. 우선 제도 마련은 정부 수립 초기부터 법제화 작업을 거치면서 완성도를 높여 갔다. 임시정부에서 군사문제는 정부가 수립되던 첫 단계부터 언급되었다. 1919년 4월 11일 통과된 임시헌장 6조에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및 병역의 의무가 유(有함)”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1933년 12월 말 임시의정원 정기회의에서는 ‘특수한 직접행동’을 고려하고, 집단적인 무력전쟁을 전개하며, 민중운동을 무장·조직화하고, 장교 양성과 기술교육훈련을 실시하며, 무기 준비 등을 구체적으로 시행함으로써, 전체 역량을 군사활동 방면으로 집중하여, 전 민족으로 하여금 실전시기(實戰時機)로 돌진케 한다고 결의했다. 또 그 자리에서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경로가 오직 군사행동에 있을 뿐”이므로, 정부는 이를 위한 ‘군사상의 직무’를 다할 것을 다짐하였다. ‘특수한 직접행동’은 의열투쟁 방략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임정은 군사활동으로 의열투쟁·점진적인 군사활동·대중운동의 무장투쟁화 등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그리고 군사활동의 중장기적인 방안으로 장교 양성과 군사교육의 강화, 무기 및 군비 확충을 꼽고 있다. 궁극적으로 전 민족이 동원된 실제 전투 단계로 나아가야 할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충칭(重慶) 시기 임시정부는 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경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성립전례식을 거행하고 본격적인 대일항전에 돌입하였다. 한국광복군의 창설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대한제국의 국군과 독립군을 계승하고 30여 년에 걸친 항일무장투쟁의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창설되었다는 점에서 민족사의 맥락을 이어갈 자주독립군이었다. 둘째 자주적 군사활동을 통해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에 대한 의지가 강하게 투영된 결과물이기도 하다.


한편 중경 시기인 1940년 10월에는 대한민국임시약헌 제4차 개헌이 공포되었으며, 국무위원제를 주석제로 바꾸면서 이동 시기 실질적으로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김구가 주석에 선출되었다. 다음 해 11월에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 발표하였으며, 12월 10일에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되면서 군사적으로 좌우통합을 달성하였다. 그해 10월 임시의정원에 조선민족혁명당 등 좌파 14명이 의원으로 선출되어 실질적인 정치적 통합도 이루어냈다. 중경에서 임시정부는 본격적인 외교활동을 통해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얻어내고자 노력하였으며, 인도 버마 전선에 광복군 인면공작대의 파견 및 미국 OSS와의 군사합작 등 해방되기까지 정식 정부와 같은 활동을 전개했다.


한국독립운동은 전 세계에서 전개되었다. 그 가운데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중국 지역에서 가장 치열하면서 광범위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는 한중 공동 항일투쟁이 만주와 중국 관내에서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1943년 11월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승인하는 카이로회담의 결과로 나타났다.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의 눈물겨운 외교전의 승리이자 한국독립운동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국제사회가 인정한 셈이다. 


중국 지역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인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한국 독립을 위해 싸웠던 반제국주의전의 주전장(主戰場)이자 협력과 연대의 공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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