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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 Theme.3 러시아 지역 한인사회 형성과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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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전쟁 이어갈 수 있던 사실상 ‘유일한’ 지역 


러 볼셰비키와 연대해 

일본군 수비대와 전투 ‘독립전쟁’ 서막 올려


글 | 오세호(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강사)  


186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러시아 지역 한인사회는 만주와 함께 ‘독립전쟁’의 주요 무대였다. 그중 특히 연해주 지역이 독립전쟁의 주요 무대가 된 이유는 국경이 맞닿아 있다는 지리적인 특징에 기인한 바도 있지만, 오랜 시간 동안 견고하게 형성되어 온 ‘한인사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러시아 지역의 한인사회는 어떻게 형성되기 시작하여 독립전쟁을 수행한 것일까? 그리고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와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으로 상징되고 있는 ‘1920년 독립전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와 한인사회 형성


한인들이 후일 독립전쟁의 주요 무대인 러시아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이유는 역설적이지만 궁핍한 생활로 인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 때문이었다. 1860년대 초 함경도 지역 농민들은 조선과 청나라 관리들의 눈을 피해 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넘나들며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당시 만주와 연해주 지역은 청나라의 봉금령(封禁令)에 의해 출입 시 엄하게 벌해졌지만, 함경도 지역 농민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국경을 건넜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농사를 짓고 다시 국경을 건너 돌아오는 형태였기 때문에 이주와는 거리가 멀었다. 


1863년부터 가족 단위로 조선과 제정러시아의 국경 지역인 포시에트(Посьет)에 정착하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한인들이 이주를 시작한 것은 한반도 북부 지역을 휩쓴 대홍수와 서리로 인한 대기근이 발생한 1869년부터였다. 러시아와 중국의 접경 지역인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 지역은 산악 지대로 논농사가 어렵고, 밭농사도 풍년이 들어야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연해주 지역은 한반도 북부 지역보다 토지가 비옥하고, 아직 제정러시아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미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풍족한 생활이 가능하였다. 이로 인해 생계를 위해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한 한인의 수는 대략 1,850명에 달했다. 


조선 정부는 세금을 감면하고 관리들의 착취를 금지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하는 한편, 월경자들이 돌아오는 경우 처벌하지 않고 식량과 토지를 지급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 정부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는 더욱 증가했다. 그 결과 1870년대 말 연해주와 아무르주 지역에 총 21개의 한인 마을과 6,766여 명이었던 이주 한인의 수는 조로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된 1884년 무렵 8,768여 명에 이르렀고, 조선과 제정러시아를 오가며 생업에 종사하는 계절노동자들도 3,000여 명에 달했다. 이때 이르러서는 최초의 러시아 지역 한인마을인 지신허(地新墟)를 비롯해 연추(煙秋)와 추풍4사(秋風四社, 육성촌·허거우·황거우·영안평·대전자) 등이 생겨났고, 한인사회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초기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는 경제적 이유에 의한 바가 컸다. 그러나 1904년부터 이듬해까지 진행된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한인들의 이주 성격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대 연해주 한인사회의 독립전쟁 준비


일제는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대한 침략을 가속하기 시작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반(半)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 등 구국운동으로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였다. 하지만 광무황제(光武皇帝)의 퇴위와 군대해산 등이 이어졌고, 국내에서의 구국운동을 둘러싼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많은 항일민족운동가는 국권 회복을 위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중국 만주와 러시아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러일전쟁이 끝난 후 러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해 나간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범윤(李範允)을 들 수 있다. 이범윤은 러일전쟁이 끝난 후 휘하 충의대(忠義隊)를 이끌고 1905년 11월 초 국외 망명을 단행하여 훈춘(琿春)을 거쳐 1906년 초 연해주 한인마을인 연추에 근거지를 두고 의병전쟁을 이어나갔다. 1895년 을미의병(乙未義兵)을 시작으로 함경도 지역에서 ‘날으는 홍장군’으로 불리며 의병전쟁을 이어나가던 홍범도(洪範圖) 역시 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했다. 1907년 군대해산 당시 서울에서 대한제국군의 시가전을 목격하고 망명길에 올랐던 안중근(安重根)도 연해주 지역에서 의병전쟁에 투신하여 국권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의병들이 러시아 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한 것은 의병전쟁을 이어갈 수 있던 사실상 ‘유일한’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연해주 지역은 중국 북간도 훈춘과 두만강 접경 지역으로 국내로의 진공 작전을 이어나갈 수 있던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병전쟁을 이어나갈 수 있는 한인사회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병전쟁은 군자금과 식량, 의복, 무기 등의 지원이 있을 때 이뤄질 수 있었다.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일제는 의병들을 진압하는 것뿐만 아니라, 의병을 지원하는 한인들을 강력히 탄압했다. 반면 연해주 지역은 1860년대부터 형성되어 온 한인사회의 강력한 지원을 기반으로 의병전쟁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실제로 이범윤과 홍범도, 안중근 등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 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한 의병들의 활동 중심에는 최재형(崔在亨)의 지원이 있었다. 최재형은 이주 한인사회를 중심으로 을사늑약 강제 체결 이후 항일의 기치를 표방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해 나갔고, 연해주로 이동한 의병들을 지원하였다. 이는 최재형과 러시아 지역 한인사회가 의병전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뜻에 따른 것이었다. 생계를 위해 고향 땅을 등지고 타국으로 이주한 러시아 지역 한인들이 망국(亡國)의 위기에 처한 조국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전쟁의 선두에 나선 것이었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로 국권을 상실하자, 러시아 지역 한인사회는 ‘독립전쟁’을 준비해 나가기 시작했다. 러시아 지역 한인사회의 독립전쟁 목표는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 등의 기존까지 구국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독립전쟁에 필요한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한인사회의 힘을 길러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독립전쟁을 통해 ‘조국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1911년 12월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 신한촌(新韓村)에서 창립된 권업회(勸業會)는 이러한 러시아 지역 한인사회의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권업회는 러시아 지역 한인들의 권익옹호와 민족의식 고취 등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1913년 사관학교인 대전학교(大甸學校)를 설립해 운영하며 독립전쟁을 준비해 나갔다. 권업회의 독립전쟁 준비는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조직하는 움직임으로 구체화 되었다.


러일전쟁 10주년을 맞이한 1914년 당시 제정러시아 내부에서는 반일감정이 고조되어 갔다. 이에 러시아 지역 한인사회는 ‘제2의 러일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고, 이에 맞춰 독립전쟁에 나서고자 준비하였다. 권업회는 ‘러시아 한인 이주 50주년’ 행사에 맞춰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고, 러시아 지역뿐만 아니라 중국 만주 지역과 미주 지역의 독립군들과 힘을 합쳐 독립전쟁에 나서고자 준비하였다. 


그러나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제정러시아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러시아 지역 한인사회의 독립전쟁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제정러시아 정부는 일본과 공동방위체제를 갖추고, 일본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러시아 지역 내 한인들의 정치·사회활동을 금지하였다. 이에 따라 권업회 역시 1914년 9월 해산되었고, 독립전쟁을 수행하고자 하였던 대한광복군정부 역시 해체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침체기에 들어간 러시아 지역 한인사회의 독립전쟁 계획은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으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10월 혁명과 국제간섭군, 1918년 독립전쟁의 시작


1917년 11월 7일 발발한 ‘러시아 혁명’은 세계사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17년 11월 7일 10월 혁명이 발발한 이후, 이듬해 1월 18일 러시아 원동 지역의 정권을 담당할 ‘원동 지방 노·농·병 소비에트 자치위원회(이후 원동인민위원회로 개칭)’가 구성되었다. 이어 하바롭스크(Хабаровск)와 블라디보스토크 등 러시아 원동 지역에서 볼셰비키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원동 지역에서 볼셰비키 정권의 위치는 위태로웠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포로 출신으로 창설된 체코군은 1918년 3월 볼셰비키 정권이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과 강화조약을 체결하자 러시아 원동 지역을 통해 서유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때 볼셰비키 정권이 체코군에게 무장해제를 명령하자, 체코군은 반볼셰비키 봉기를 일으켰다. 러시아 원동 지역의 볼셰비키 정권은 체코군과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열강들의 지원을 받은 제정러시아 백위군(白衛軍)들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했다. 


백위군을 지원하는 열강 중 일본군은 볼셰비키 정권뿐만 아니라, 러시아 지역 한인사회와 북간도 지역 한인사회에 직접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일제는 1918년 4월 5일 일본인 2명이 살해된 사건을 빌미로 ‘자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워 육전대(陸戰隊)를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시켰다. 이에 러시아 지역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소비에트 볼셰비키 세력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1918년 4월 말과 5월 초 원동인민위원회 의장 크라스노쇼코프(А.М. Краснощёков)는 이동휘(李東輝)를 만나 시국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고, 이후 양기탁(梁起鐸), 유동열(柳東說), 오와실리 등과 함께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한 공동 대책을 논의하였다. 


 1918년 6월 체코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봉기에 성공하자 제국주의 열강은 그해 8월 초 ‘체코군 구원’을 명분으로 대규모 국제간섭군을 파견하였다. 특히 일본군은 체코군과 백위군과 협력하여 연해주와 아무르주, 자바이칼주 등으로 진출하여 볼셰비키 권력을 붕괴시켜 나갔다. 이에 한인들은 볼셰비키 정권과 협력하여 백위군과 일본군에 대항할 것을 결의하였다.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은 그해 7월 산하 군사조직으로 한인의병대(한인사회당 적위대)를 조직하였다. 유동열과 전일(全一) 등 100여 명이 조직한 한인사회당 적위대는 우수리 전선 전투에 참여해 적군과 함께 국제간섭군의 지원을 받는 칼미코프(И.П. Калмыков)가 이끄는 백위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백위군이 1918년 9월 하바롭스크와 치타, 블라고베셴스크 등을 점령하며 러시아 원동 지역에서 볼셰비키 정권은 붕괴되었고, 한인사회당 적위대도 해산되었다. 이후 볼셰비키 정권은 정규적인 전선 체제에서 빨치산 체제로의 전환을 결정했고, 유격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1918년 7월 조직된 한인사회당 적위대를 시작으로 러시아 지역 한인사회에서는 1919년부터 볼셰비키 빨치산 부대와 연합하여 일제에 대항하기 위한 독립군 부대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1919년 11월 무렵 하바롭스크 근교에 위치한 다반촌에서 조직된 ‘다반군대’와 이만시(Иман市, 현 달네레첸스크) 근처 깔린스키 구역에서 조직된 ‘제1이만군대(황하일군대)’, 연해주 수청(水淸) 지방의 신영동(新營洞, 니콜라예프카(Николаевка))에서 1919년 4월 정식으로 창설된 조직된 ‘신영동 한인빨치산부대(한창걸부대)’ 등이 대표적인 독립군 부대였다. 이들은 러시아 볼셰비키 빨치산들과 연합하여 백위군뿐만 아니라, 이들을 지원하는 일본군 수비대와 전투를 벌였다. 러시아 지역 독립운동의 근간이 되는 한인사회를 보호하고, 독립운동을 이어나가기 위함이었다. 


1919년 3·1운동 발발 이후 만주 지역에서 조직되어 적극적으로 활동한 독립군들도 러시아지역 한인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북간도 훈춘과 연해주 지역을 기반으로 한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대한신민단은 1918년 일본군이 러시아 원동 지역으로 진출하자, 독립군 조직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듬해 3·1운동이 발발하자 대한신민단은 3월 12일 정식 설립을 선포하고 독립전쟁에 나섰다. 대한신민단이 독립군을 조직한 것은 일본군이 러시아 원동 지역으로 진출한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기반이었던 연해주와 북간도 훈춘 지역의 한인사회를 보호하고, 독립전쟁과 같은 적극적인 투쟁에 의해서만 조국의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는 공감을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대한신민단은 이후 1920년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와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등에 참전하며 독립전쟁을 수행하였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은 ‘1920년 독립전쟁’으로 상징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元年)’으로 선포한 사실에 기인한 바도 클 것이다. 그러나 1920년 독립전쟁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만으로 국한해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일본군의 1918년 러시아 원동 지역 진출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 러시아 지역 한인사회의 무장투쟁은 이른바 ‘1920년 독립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독립전쟁은 청산리대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 등 1922년까지 이어졌다. 더 나아가 러시아 지역 독립운동가들은 1922년 러시아 내전이 종전된 이후 중국 관내 지역과 만주로 이동하여 독립전쟁을 이어나갔다. 이러한 러시아 지역 한인사회의 형성과 독립전쟁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1920년 독립전쟁’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여운을 남기고 있지 않은가 한다.  


필자 오세호 

국민대학교 국사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연구원을 거쳐 현재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 근대사와 독립운동사, 중앙아시아 한인이주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고 있다. 「김규면의 만주·연해주 한인부대 통합 노력과 대한의용군사의회(1921~1922)」, 한국독립운동사연구78(2022), 「‘1920년 독립전쟁’ 시기 독립군들의 동향 재검토」, 한국근현대사연구96(2021), 「소비에트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과 초기 한인사회주의 세력의 갈등(1919~1921)」, 한국독립운동사연구71(2020), 「중앙아시아 고려인사회의 정체성과 홍범도 인식(1937~1964)」, 한국독립운동사연구55(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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