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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 Theme.4 미주 지역 항일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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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힘과 여론 토대로 자발적 헌신 


세계 여론의 중심지에서 

일제 식민통치 실상 폭로 독립운동자금 모금 전개    


글 | 홍선표(나라역사연구소 소장) 


미국은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민주적인 사회여서 미주 한인들은 직업과 신분의 귀천이나 빈부의 차별 없이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때문에 자유로운 모임으로 토론할 수 있었고 여기서 나온 민주적인 힘과 여론은 독립을 위한 자발적인 헌신으로 이어졌다. 미국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대륙이어서 적극적으로 항일무장투쟁이나 의열투쟁을 전개하기 어려웠지만, 상무정신으로 무장한 미주 한인들은 선구자적인 면모로 독립전쟁을 위한 군사운동을 추진하였다. 또한 선전외교 활동을 통해 세계 여론의 중심지인 미국에 한국에 대한 일본 식민통치의 실상을 폭로하고 친한 여론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무엇보다 가난한 노동이민자 처지에서도 수입의 3분의 1 이상을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사용했다.  


미주 한인사회의 시기별 성격


하와이 이민이 시작된 1903년부터 하와이와 북미에서 한인들이 모인 곳에는 동회를 비롯해 신민회, 친목회 등 수많은 단체가 결성되었다. 그중 주요 단체는 공립협회, 합성협회, 대동보국회, 대한인국민회, 동지회, 대조선국민군단, 대조선독립단, 대한부인구제회, 대한여자애국단,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등이다. 이들 단체의 설립 목적의 대강은 조국 대한의 독립과 미주 한인들의 권익보호와 안녕, 교육과 실업 증진에 초점을 맞추었다.  


미주 한인사회는 이들 단체를 중심으로 통합과 분열을 거듭하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해방 이전까지 미주 한인사회의 변천에 따른 시기별 성격은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해 설명할 수 있다.


제1기(1903〜1909)는 미주 각 지역에서 한인들이 정착하면서 무수한 단체들을 결성하고 활동하던 시기이다. 그러면서 점차 한인사회의 합동과 통일을 위해 모색해 갔던 시기였다. 


제2기(1909〜1922)는 분산된 미주 한인사회가 국민회로 통일되어 활동해 나간 시기이다. 국민회는 1909년 2월 1일 하와이의 합성협회와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가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사건 의거를 계기로 나타난 미주 한인사회 최초 통합의 결실이다. 그 후 이듬해인 1910년 국민회에 합류하지 않았던 샌프란시스코의 대동보국회와 하와이의 전흥협회가 합류해 대한인국민회를 결성하면서 미주 한인사회는 통일되고 자주적인 자치기관이자 독립운동의 기관을 갖게 되었다. 


제2기 미주 한인사회의 특징은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이 최고조로 활성화되고 있다는 점과 동시에 한인사회가 점차 분열의 길로 나아간다는 점이다. 독립운동의 열기가 크게 확산될수록 미주 한인사회의 이면에는 새로 설립된 단체들과 기존 단체 간의 주도권 싸움이 계속되었다. 즉, 미주 한인사회의 오랜 자치기관이자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와 이승만이 한성임시정부 집정관총재의 자격으로 워싱턴DC에 세운 구미위원부와의 갈등이었다. 이것은 다시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 간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3·1운동 직후 이 같은 갈등과 반목은 미주 한인사회를 지역적으로는 하와이와 북미로, 단체별로는 대한인국민회 세력과 동지회 세력으로 크게 양분시켰다. 


제3기(1922〜1941)는 대한인국민회가 분열해 쪼개어지고 새로운 단체들이 등장하는 시기이다.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가 이승만 세력에 의해 장악된 후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으로 바뀌고, 대한인국민회의 위상은 미국 본토와 멕시코로 한정되어 그 위력이 크게 축소되었다. 이 시기가 되면 독립운동도 침체에 빠진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한인사회의 분열과 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한인들의 자구 노력도 거세게 일어났다. 1930년대 북미에서는 미주한인연합회의 결성과 국민회 합동운동이 펼쳐졌고, 하와이에서는 동지회 중심의 통일운동과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 간의 통합 시도 그리고 1940년 10월 연합한인위원회의 결성 등의 노력으로 나타났다. 


제4기(1941〜1945)는 하와이와 북미의 한인사회가 다시 손잡고 통일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시기이다. 1941년 4월 9개의 미주 한인 단체 대표들이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고 그동안의 분열과 독자노선을 반성하면서 새로운 통합단체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기존 단체들을 해체하고 만든 통일단체가 아니라 연합단체에 불과했다. 하지만 재미 한인사회가 다시금 통일된 힘으로 독립금을 모금하고 일치단결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중요한 기관으로 부상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미일 간에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8개월 전에 결성되었고,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해 해외 한인의 독립운동단체들이 분열되어 독립운동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나온 미주 한인 통합의 결실이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출범은 해외 한인 독립운동 단체들에게 통합의 모범을 보여줌과 동시에 미주 한인들의 위상을 크게 제고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4기의 미주 한인사회는 미국방공작봉사원이던 한길수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 간의 외교 주도권을 둘러싼 분쟁, 1942년 이승만의 외교권을 둘러싼 시비와 주미외교위원부 개조를 둘러싼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이승만 간의 분쟁 등으로 큰 위기에 봉착한다. 결국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이승만을 외교 실패를 이유로 외교에서 배제시키고 주미외교위원부 개조를 시도하였다. 여기에 반발한 이승만과 동지회는 1943년 12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탈퇴를 단행함으로써 일치단결의 상징이었던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위상과 역할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승만과 동지회의 연합회 탈퇴는 곧이어 충칭 임시정부 내 김구, 조소앙, 차리석 등 여당세력이던 한국독립당과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간의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을 끝까지 지지하였다. 때문에 그동안 임시정부 봉대를 대의명분으로 삼아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펼쳤던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임정과의 관계 악화를 계기로 임정에 대한 후원을 중단하였고, 1944년에는 마침내 임정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조치를 내렸다.


미주 한인의 독립운동


미국에서 뛰어난 한국인 작가로 알려진 강용흘은 그의 저서 『East goes West』 (뉴욕, 1937)에서 “모든 한국인은 유배자가 아니면 혁명가이며 모든 동양인은 백인의 인종차별과 사회적 편견의 대상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이것은 해방 이전 미국 사회에서 미주 한인들의 민족적 위상이 어떠했음을 잘 설명해 준다. 미주 한인들은 미국 내 소수민족 가운데서도 극소수의 계층이었고 미국 시민권을 획득해 미국 시민으로서 보호받을 수 있는 희망조차 가질 수 없는 미미한 존재였다.  


미주 한인들의 삶에는 백인우월주의와 배척의 대상이 되는 소수 동양인의 한계와 차별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미주 한인들은 자주독립을 이루어야 한다는 민족적 과제를 깨닫고 끊임없이 민족적 자부심을 일깨우고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이것은 힘든 이국땅 미국 사회에서 미주 한인들이 반드시 생존해야 하는 이유와도 같았다. 


미주 한인의 독립운동은 다양한 방략과 형태로 추진되었다. 먼저 해외 한인 최초로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스 처단의거를 일으킨 미주 한인은 군인양성을 통한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박용만에 의해 헤스팅스 한인소년병학교와 하와이 대조선국민군단이 결성·운영되었고 3·1운동 직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과 한인 농업실업가 김종림·이재수·신광희 등에 의해 윌로스에 비행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같은 미주 한인의 군사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의 정신은 미일전쟁 발발 직후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의한 한인경위대(일명 ‘맹호군’) 결성과 미국 전략첩보국(OSS)에 의한 납코작전의 참가로 이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연이은 국제회의는 미주 한인들에게 선전외교 활동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하여 뉴욕소약국민동맹회의에 한인 대표를 파견하였고, 파리강화회의에는 비록 한인 대표 파견을 성사시키진 못했으나 선전외교 활동을 본격화시켰다. 그런 가운데 3·1운동 발발은 미주 한인들의 선전외교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먼저 필라델피아에서 이승만·정한경·서재필의 주도로 ‘제1차 한인회의’를 개최하였다. 그 영향으로 서재필에 의해 필라델피아에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가 결성되어 선전활동은 전 미국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한편 이승만은 한성정부 집정관총재의 자격으로 구미외교를 총괄하는 구미위원부를 설립했다. 


미주 한인의 독립운동에 주목해야 할 또 다른 활동은 재정의 모금과 후원이다. 직접 일선에 나가 항일투쟁에 뛰어들 수 없는 지역적 한계 때문에 미주 한인들은 선전외교 활동을 돕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원동의 군사운동을 도울 최상의 방책으로 재정을 지원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미주 한인들이 펼친 독립운동의 자금 명목은 다양했다. 특별의연, 독립의연·21례·애국금·공채표·인구세·구휼금·혈성금·독립금 등 각기 다른 명목으로 모금활동을 전개했다. 이렇게 모인 금액은 광복 때까지 최대 350만 달러 정도로 추산되고 현재 가치로 환산할 경우 약 5,760만 달러에 상당한다. 


미주 한인들이 거둔 자금은 많고 적고 간에 독립운동의 주요 활동자금으로 사용되었다. 특별히 27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 여타의 해외 독립운동 단체들의 항일투쟁을 위해 지원되었고, 곤경에 처한 국내외 한인들을 돕기 위한 방편으로도 사용되었다. 


미주 한인 독립운동의 의의


미국은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민주적인 사회여서 미주 한인들은 직업과 신분의 귀천이나 빈부의 차별 없이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때문에 자유로운 모임으로 토론할 수 있었고 여기서 나온 민주적인 힘과 여론은 독립을 위한 자발적인 헌신으로 이어졌다. 


미국은 지리적으로 태평양을 가운데 두고 멀리 떨어진 대륙이어서 미주 한인들이 적극적으로 항일무장투쟁이나 의열투쟁을 전개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상무정신으로 무장한 미주 한인들은 선구자적인 면모로 독립전쟁을 위한 군사운동을 추진하였다.   


미주 한인들이 펼친 선전외교 활동은 세계 여론의 중심지인 미국에 한국에 대한 일본 식민통치의 실상을 폭로하고 친한 여론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또 한국의 독립문제를 국제적인 이슈로 만들어 일본의 항복은 곧 한국의 독립이라는 점을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정부들에게 각인시켜 주었다. 


미주 한인의 독립운동 자금 모금과 지원은 그들의 생활이 넉넉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었다. 가난한 노동이민자 출신인 미주 한인들의 삶은 부초처럼 떠도는 고단한 인생이었다. 그런 가운데서 수입의 3분의 1 이상을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사용했다. 


미주 한인의 독립운동은 우수한 문화민족이라는 한국인 고유의 강인한 민족적 정서와 자부심과 연결되어 있다. 국권을 상실했다는 자각 속에 다져진 강렬한 민족의식과 항일투쟁의 정신은 독립운동의 불길을 꺼지지 않게 활활 타오르게 만들었다. 

미주 한인사회에 설립되거나 결성된 한인교회나 한글학교, 자치단체나 정치단체이던 주된 목표와 방향은 조국의 독립이었고, 또 각종 출판물이나 신문·잡지 등에도 한결같이 이 같은 목표와 방향을 공유하였다. 미국 땅에서 미주 한인들이 생존을 위한 틈바구니에서 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에 온몸과 마음, 그리고 물질을 아끼지 않았던 것은 한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강인한 민족정신과 민족적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 홍선표 

한양대학교 사학과 및 동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연구교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대한민국 공군 역사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공·저서로 『서재필 개화 독립 민주의 삶』, 『자주독립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재미한인의 꿈과 도전』, 『대한민국 국방사』(공저), 『Koreans in Central Europe』(공저), 『3·1운동과 국제사회』 (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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