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 Theme.5 일본 지역 항일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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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에서 벌인 목숨 건 투쟁과 일본인의 연대
설움의 땅 망국민 처지에도
‘민족적 자존심’ 지키며 독립에의 희망 놓지 않아
글 | 윤소영(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
일제강점기, 많은 한인들이 국외로 떠나 이향(異鄕)에서 새로운 터전을 만들어 독립운동에 직접 나서거나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서도 일본에서처럼 현지인으로부터 차별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에서도 크던, 작던 독립운동이 결행되고 있었다. 1920년 영친왕 이은과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의 결혼을 반대하여 폭탄의거를 시도한 서상한, 1921년 친일파 민원식을 저격·사망시킨 양근환,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체포된 박열의 항일운동에 이어 1924년 초 도쿄 한복판 궁성에서 폭탄의거를 결행하여 일본인을 경악시킨 김지섭 의거 등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속에는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조력한 일본인도 있었다.
차별과 배제의 공간에서 독립운동 결행
일제강점기, 많은 한인들이 국외로 떠나 이향(異鄕)에서 새로운 터전을 만들어 독립운동에 직접 나서거나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서도 일본에서처럼 현지인으로부터 차별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재일사학자 고(故) 강덕상 교수는 일본에서 조선인이 차별을 받은 단적인 사례로, 해방 직후 우에노의 경찰서가 제작한 방범 포스터를 든다. 이 포스터에는 도둑을 조심하라며 태극 문양 뒤에 마귀 모양의 도둑을 그려 넣어 도둑이 곧 조선인임을 암시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재일한인의 인구는 1910년대에 1만여 명에 불과했으나, 1920년에 4만 명, 1930년에 42만 명, 1940년에 124만 명으로 증가한다. 초기에는 유학생이 중심이었다가 1920년대부터는 남성 노동자의 이주가 증가하고, 1930년대 전후부터는 가족을 동반한 정착형이 증가했다. 이들의 직업구성을 보면, 토목업과 중소 영세공장 노동자가 가장 많아 일본 하층사회를 떠받치고 있었다. 하층 노동자였기 때문에 주거환경이나 위생도 열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제국(帝國)’의 국민으로서의 우월감을 갖고 있던 일본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방을 빌려주기를 꺼려하여 한인들은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하천 주변에 움막을 짓고 생활했다. 조선인의 임금은 일본인의 60% 정도였다.
이와 같은 악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으로 도항하는 한인이 증가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1920년대를 기준으로 조선에서의 고용기회를 1로 보았을 때 일본이 26.9로 조선보다도 훨씬 고용기회가 높았다는 점, 중일전쟁 이후가 되면 전쟁 특수로 탄광, 공장 등의 노무인력 수요가 높아졌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일본으로의 도항은 엄중한 검문이 동반되었다. 특고경찰과 사상검사들은 「불령선인(不逞鮮人) 명부」를 정기적으로 업데이트하며 이들을 감시했다. 이러한 점에서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에서도 크던, 작던 독립운동이 결행되고 있었다. 3·1운동에 앞서 도쿄 유학생들이 결행한 2·8독립운동은 너무나 유명하다. 이를 이어 1920년 3·1운동 1주년 기념을 맞이하여 황신덕 등의 유학생들은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시위를 벌여 히비야경찰서에 구금된 일이 있었다.
1920년 영친왕 이은과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의 결혼을 반대하여 폭탄의거를 시도한 서상한, 1921년 친일파 민원식을 도쿄스테이션호텔에서 저격·사망시킨 양근환,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체포된 무정부주의자 박열의 항일운동에 이어 1924년 초 도쿄 한복판 궁성에서 폭탄의거를 결행하여 일본인을 경악시킨 김지섭 의거 등이 이어졌다.
특히 김지섭 의거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이라는 만행을 규탄하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 한국독립운동계를 매우 고무시킨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한 번도 일본에 간 적이 없는 김지섭이 어떻게 이 거사를 결행할 수 있었던 것일까? 더욱이 김지섭은 항구, 여객선 안, 열차 안에서 일제 경찰이 상주하여 삼엄한 경계를 펴는 가운데 폭탄을 휴대하고 상해에서 도쿄까지 가서 거사를 단행한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일본인의 조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독립운동을 도운 일본인들
김지섭 의거를 도운 일본인은 사회주의자 히데지마 히로시(秀島廣二)이다. 이 계획은 상해에서 김원봉, 윤자영, 김지섭에 의해 계획되었고, 당시 상해에 체류하고 있던 히데지마가 작전을 도왔다. 당초의 제1차 계획은 야마모토 내각을 붕괴시키기 위해 야마모토 곤베(山本權 兵衛) 수상의 저택이나 제국의회에 폭탄을 투척하는 것, 제2차 계획은 오사카에 화재를 일으켜 일본 경제계에 일대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었다. 히데지마는 상해에서 일본으로 검문을 피해 잠입할 수 있는 선박으로 미츠이(三井)물산 소속의 화물선 아마기산마루(天城山丸)에 승선할 수 있도록 알선하고, 일본에 가본 적이 없는 김지섭의 길잡이 역할로 고바야시 카이(小林開)를 동행하도록 했다.

김지섭의 거사 후 히데지마는 상해에서 체포되어 도쿄로 압송되어 김지섭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1925년 8월 12일 도쿄공소원에서 김지섭은 무기징역, 히데지마는 징역 5년형, 고바야시 카이는 징역 2년형 등을 선고받았다. 김지섭은 안타깝게도 1928년 치바형무소에서 순국하였고, 히데지마 히로시 등의 그 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에서의 항일운동이 일본의 운동가들과 연대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일본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가 “재류조선인 사상단체 또는 노동단체는 고립하여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효과를 거두기 곤란하여 항상 일본의 좌경단체와 협조 연락을 취하고 있다”(「대정14년(1925)의 재류조선인의 상황」, 경보국 보안과, 1925.12)는 지적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들의 연대투쟁은 조선의 주요기념일 투쟁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재일한인은 3·1운동, 5월 1일 메이데이, 8월 29일 국치일, 9월 1일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4대 기념일로 지키며 집회를 열고 단체행동을 벌였다. 1930년 3·1절 기념 한일 공동투쟁의 모습을 살펴보면, 먼저 『제2무산자신문』 제15호에 「만세기념일, 일선노동자 제휴하여 공동의 적을 타도하자」라는 기사를 실었고, 『무산청년』 제23호에 「잊지 마라! 3·1독립만세사건의 날」이라는 기사를 통해 일본과 조선 노동자의 단결과 공동투쟁을 제창했다. 또한 반제동맹은 1930년 2월 14일에 「조선민족해방운동 지지를 위한 반제동맹 운동방침」을 지령하고 공동투쟁할 것을 격문을 통해 호소했다. 희생자구원회는 2월 18일에 「3·1조선만세사건기념투쟁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일본 제국주의 타도! 조선해방운동 정치범의 즉시 석방! 조선의 완전한 독립만세! 일선노동자 농민의 제휴 만세!”를 내걸었다. 1931년 반제동맹 및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약칭은 전협)에서 만든 3·1기념일투쟁 격문에는 “3월 1일! 조선독립만세기념일!! 식민지 독립, 제국주의 전쟁반대 데모로 싸우자!”고 호소했다.
일본인을 감동시킨 조선 청년의 기개
그러던 중 1932년 새해 벽두에는 이봉창 의거가 일본 전국을 경악시켰다. 『특고월보』는 “1월 8일 사쿠라다몬 밖의 불경사건이 일어나고 최근 상해에서 일본과 중국의 충돌사건이 일어나자 일부 재경 조선인 학생은 이 틈에 민족운동을 일으켜 조선민족의 입장을 명확 선명하게 해야 한다고 하여…명목을 동창회, 졸업생 송별회 등을 구실로…민족운동을 대두시키려는 분위기가 농후(「재류조선인의 운동상황」, 『특고월보』 1932.1)”하다고 분석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설상가상 4월 29일에는 상해에서 윤봉길 의거 소식이 전해졌다.
의거 다음날인 1932년 4월 30일 『오사카 아사히신문』 사설에는 「어떤 자의 행패, 상해폭탄사건」이라는 제목 하에 “재상해 관민합동축하회 식장에서 만세를 축원하고 있던 경사스런 날에 유혈참사를 연출하다니, …이 무리의 연루 관계를 조사하여 일본에 끼칠 뿌리를 잘라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인식은 당시 언론의 일반적인 것이었지만 프롤레타리아문학 작가로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지한 아키타 우자쿠(秋田雨雀)는 1932년 4월 29일 일기에
4월 29일. 천장절의 날. 상하이의 천장절 축하식장에서 「기미가요」 합창을 하던 중 식단의 뒤에서 폭탄이 날아와 시라카와 노무라 각 장군, 시게미쓰 공사 및 가와바타 민단장은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양심적인 일본의 일반 민중에게 깊은 반성과 정려(精慮)할 기회를 부여했다고 생각된다.(秋田雨雀,『あかつきえの旅ー50年自伝記録』, 潮流社, 1950)
고 적어 윤봉길의 거사가 일본인들에게 깊은 반성과 숙고할 기회를 주었다고 보았다. 프롤레타리아문학 작가인 무라야마 도모요시는 에세이 『타협은 없다』에서 유치장에서 다리가 불구인 조선인 청년을 만난 이야기를 적고 있다.
나는 그 남자가 가만히 눈을 감고 식은땀을 흘리며 오랫동안 앉아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오른쪽 무릎이 너무도 고통스러워 작은 진동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중략) 간수에게 잘 보이면 잠시라도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작업을 배정받을 수 있는데 가만히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조선인 청년이 너무 안쓰러워 간수에게 발을 좀 펼 수 있도록 부탁해주겠다고 제안하자 조선인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뼈가 썩어도 저놈에게 부탁 같은 것은 절대 안합니다.” 나는 한 방 먹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村山知義, 「妥協はない!」,『戰旗』1929.4.; 『新選村山知義集』, 改造社, 1931)

‘조선인의 자존심’ 하면, 박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대역사건으로 무고한 죄를 뒤집어쓰고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박열은 법정에서 네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대심원 특별법정에서 재판관이 일본 천황의 대표로 관복을 입고 서 있으니 본인은 조선민족의 대표로 왕의 옷을 입고 서겠다고 기염을 토하고, 둘째 일본이 조선을 강탈한 강도행위를 탄핵하기 위해 법정에 설 것이며, 셋째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고 조선어로 진술하겠다고 하였다. 넷째 일본인 재판관이 상석에, 피고인이 낮은 위치에서 서서 재판을 받는데, 자신은 재판관과 똑같은 높이에서 재판을 받겠다고 하였다. 결국 그가 제시한 조건은 첫째와 두 번째 조건이 수용되었으나, 박열의 이와 같은 태도는 평소 나라를 잃었다는 패배감으로 기운을 잃고 있던 조선의 동포들을 크게 고무시켰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이러한 박열의 기개를 세상에 전한 인물은 그를 변호한 후세 다츠지였다.
1925년 사회주의·공산주의운동과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치안유지법이 제정된 후, 1930년대에 일본 내 치안유지법을 위반하여 검거된 조선인 숫자는 1932년 338명, 1933년 1823명을 정점으로 1934년 884명, 1935년 232명이다.(坪江汕二, 『(개정증보)조선민족독립운동비사』) 해방 직전까지도 이른바 조선독립에 대한 ‘불온사상’을 연구한다는 독서회사건 등이 일본 각지에서 발각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처벌당했다.
히로시마에서 검거된 함경북도 성진 출신 시마즈 혜길[島津惠吉] 등의 조선독립운동 관련 계몽활동, 히로시마조선소 징용공인 경성 출신 마츠모토 용진[松本容鎭]의 독립운동 관련 불온언동, 고베시 육영상업학교 학생 황보석(皇甫石), 도쿄에서 검거된 경북 달성 출신 이중희(李重熙) 등의 총독정책 비판 및 불온언동, 와세다전문학교 상과 1년생이자 노무자인 원종철(元鐘澈,황해도 옹진 출신) 등의 조선 독립기도 협의사건 등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었다.(「조선인 치안유지법 위반자 검거조사」(1945.1~7), 내무성 경보국)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의 여러 모습을 살펴보면, 일본이라는 설움의 공간에서 망국민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한인들이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며, 독립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피지배 민족 조선인’과 ‘지배 민족 일본인’이 기본적 대립 구도로 자리한 일제강점기이지만, 그 속에서도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조력한 일본인도 있었다는 점을 소중히 여겼으면 한다. 특히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모색하고자 할 때 후자의 사례는 한일 역사 화해의 징검다리가 될 것이다.

숙명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대학원에서 인문과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공 분야는 근대한일관계사, 일본 지역 독립운동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