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 Theme.1 일제에 맞선 우리 문인들의 구국 독립운동
페이지 정보
본문
일제 강점에 온몸으로 저항한 문인들
불의에 복종하지 않고 비판과 저항으로 항거
암흑기 버텨내는 등불
글 | 김주현(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국내에서는 3·1운동의 영향으로 각종 신문 잡지들이 발간되면서 항일 저항문학도 나오게 된다.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개벽』(1926.6)에 발표했다. 일제 강점의 현실에서 어쩌면 봄조차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빼앗기고 싶지 않은 간절한 마음을 노래했다. 심훈은 1930년 3월 1일을 맞아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를 써서 독립과 해방의 그날을 염원하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항일 독립투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은 50여 편에 이른다. 검열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국외에서는 독립운동의 실상이 오롯이 형상화됐다. 간도에서 일화 15만 원을 탈취한 철혈광복단의 사건을 담은 「이순화」(미완), 독립군의 국내 침투 및 습격 현장을 아주 생생하고 실감나게 그려낸 「눈 나리는 국경의 밤」 등이 그러하다.
장지연은 을사늑약으로 우리의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이날을 목 놓아 통곡하노라(是日也放聲大哭)」를 써서 “아, 원통하고 분하도다. 우리 남의 노예가 된 이천만 동포여! 살았느냐, 죽었느냐?”라고 하며 을사늑약의 원통함을 알렸다. 민영환은 을사오적 처형과 늑약 파기를 주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2천만 동포에게 경고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박은식 역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통해 민족의 각성을 부르짖었다. 최익현은 의병 활동에 나섰다가 대마도에서 순국하고, 유인석은 연해주로 가서 독립운동에 나선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순국했다. 신채호는 애국 전기, 정론 및 문학혁명론을 써서 구국계몽운동을 폈다. 이처럼 일제침략에 맞서 지식인들은 목숨으로 일제에 항거하거나 언론과 문필을 통해 구국 독립운동을 펼쳤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합병조약이 이루어지자 황현은 “새짐승 슬피 울고 산과 바다도 찡그리네/ 무궁화 세계는 이미 몰락하고 말았구나/ 가을밤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역사를 생각하니/ 세상에서 지식인 노릇하기 어렵구나(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沈淪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라는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했다. 금산군수였던 홍명희의 아버지 홍범식도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으니 죽지 않고 무엇하리(國破君亡 不死何爲)”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어찌 이들뿐이겠는가. 당시 수많은 선비들이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했다. 한편 1910년 일제 강점 직전 신채호는 중국으로 갔으며, 신규식도 강제 합병 소식을 듣고 자결하려다가 살아남아 중국으로 망명한다. 이후 박은식, 조소앙 등 수많은 지사들이 중국으로 향한다. 그들은 신문 잡지를 발간하여 우리의 말과 역사, 정신을 계승 유지함은 물론 단체를 만들어 반일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3·1운동을 전후해서는 대동단결과 독립, 그리고 항일투쟁을 선포하는 선언서들을 발표한다. 1917년 조소앙이 기초한 「대동단결선언」에는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등 14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서명했다. 이것은 1910년 맺어진 한일병합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통일기관의 수립을 통한 새로운 한국 건설을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1919년 이광수는 동경에서 「2·8선언서」를 작성하였으며, 국내에서는 최남선이 기초한 「선언서」 일명 「기미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고, 길림에서도 조소앙이 기초하고 신규식, 신채호 등 해외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서명한 「대한독립선언서」가 선포됐다. 그리고 염상섭은 1919년 3월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오사카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들 선언서는 독립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 의지를 대내외에 선포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아울러 신채호는 1923년 1월 의열단선언서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했다. 이는 파괴와 혁명으로써 일제를 타도하고 이상적 조선을 건설하자는 무력혁명 선언이었다.
국내외 문인들의 항일 문학
국내에서는 3·1운동의 영향으로 각종 신문 잡지들이 발간되면서 항일 저항문학도 나오게 된다.

심훈은 1930년 3월 1일을 맞아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를 썼다. 그는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鐘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라고 노래했고, 이육사는 「광야」(1945)에서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하여 독립과 해방의 그날을 염원하는 시인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임화는 「우리 오빠와 화로」에서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이가 있고/ 그러고 모―든 어린 ‘피오닐(pioneer)’의 따듯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라고 하여 투쟁 의식과 민족 해방 의식을 담아냈다. 이 밖에 민족주의 계열 시인 한용운, 윤동주도 저항 의식을 담은 시를 썼으며, 사회주의 계열의 시인 박팔양, 박세영, 이용악 등도 현실 고발과 투쟁의식을 담은 시들을 발표했다. 한편 김지섭은 3·1운동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서 의열단에 가입한 후 상해에서 배를 타고 동경에 갔다. 그는 가는 도중 “평생 뜻한 바 갈길 정하였으니 고향을 향하는 길 다시 묻지 않으리(此行已決平生志 不向關門更問秦)”라는 결의의 찬 시를 남기고 일본 왕궁을 폭파하려다 체포돼 옥사당했다.

한편 검열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국외에서 독립운동의 실상이 오롯이 형상화됐다. 3·1독립만세를 부르다가 두 팔이 잘려 죽은 여학생의 이야기를 그려낸 「피눈물」, 간도에서 일화 15만 원을 탈취한 철혈광복단의 사건을 담은 「이순화」(미완), 독립군의 국내 침투 및 습격 현장을 아주 생생하고 실감나게 그려낸 「눈 나리는 국경의 밤」 등이 그러하다. 또한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신채호는 「꿈하늘」, 「용과 용의 대격전」을, 신규식은 『한국혼』, 『아목루』를, 조소앙은 『유방집』, 『소앙집』을 쓰는 등 문필을 통한 구국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국청년전지공작대 한형석(호 먼구름, 1910~1996)은 오페라 「아리랑가극본」을 창작, 공연해 한중 양국 전사들의 투쟁과 혁명의식을 고취하였다.
저항으로서의 문학과 우리의 과제
“펜(문)은 칼(무)보다 강하다”고 했다. 일제는 무력으로 3·1운동을 진압하려 했지만 오히려 더 큰 민족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우리 문인들은 일제의 총칼에 맞서 붓을 들었다. 단재는 1912년 「이날」(是日)」에서 경술국치를 되새기며,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몸을 바쳐 우리가 자나 깨나 사나 죽더라도 이날을 잊지 말고 우리가 이날이 우리의 기념할 날 되기까지 힘쓸지어다”라고 했다. 그리고 1923년 「조선혁명선언」에서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剝削)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라고 했다. 우리 조선 민중이 힘을 합쳐 일제를 몰아내고 일체 제도를 개선하여 이상적 조선을 건설하자는 것이다.
문인들은 일본의 절대 권력이나 힘에 복종하지 않고 비판과 저항을 함으로써 민족해방에 일조했다. 특히 그들의 문학은 암흑기를 버텨내는 하나의 등불이자 희망이었다. 그들에 의해 일제 강점기 우리의 정신은 죽지 않고 마침내 해방을 이룩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독립이 아니었다. 해방과 함께 강대국들에 의해 이루어진 민족 분단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우리는 이제 다시 자유와 평등의 이상적 조선, 남북이 하나 되는 통일 한국을 건설해야 한다.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를 취득했다. 경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전임강사, 버클리대학교 방문학자, 북경대학 외래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김환태평론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주요 저서로 『정본이상문학전집』(2005), 『신채호문학연구초』(2012), 『실험과 해체-이상 문학 연구』(2014), 『선금술의 방법론-신채호의 문학을 넘어』(2020)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