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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 Theme.2 한국문학에 투영된 대일 저항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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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일기」로 보는 여학생의 3·1운동  


저항 의지 우회적 암시

일제 검열 피하면서 최대한 항일운동 묘사   


글 | 이상경(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일제강점기 작가들은 우회적으로 넌지시 저항의 의지를 암시하는 식으로 검열을 피하면서 최대한으로 작품 속에 항일운동을 묘사하고자 했다. 소작쟁의나 노동쟁의에 나선 개인과 집단의 내면, 운동의 과정을 그린 작품들도 많다. 이들도 넓은 의미에서 항일운동의 문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3·1운동으로 터져 나온 모습을 직접 묘사한 작품 「여학생일기」는 운동을 준비하고 직접 현장을 경험했던 여학생의 육성이 담겨 있어 생생함을 더하고 기록문학으로서의 가치도 높다.  


일제강점기 한반도 안에서 나오는 모든 출판물은 검열을 받아야 했기에 문학 작품에서 항일 독립운동가와 그들의 활동, 구호를 외치는 시위운동 등을 직접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작가들은 작중 인물의 꿈이나,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고난을 당한 사람들의 후일담, 항일운동가의 남겨진 가족의 고통 등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넌지시 저항의 의지를 암시하는 식으로 검열을 피하면서 최대한으로 작품 속에 항일운동을 묘사하고자 했다. 항일운동가를 주인공이 아니라 주변인물로, 혹은 풍문 속의 인물로 설정하고 항일운동의 장면은 소설 속에 스치듯이 삽화로 처리했다.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된 사람들이 태형을 받는 모습을 묘사한 김동인의 「태형」(1922), 3·1운동 후 상해에 모여든 항일운동가들의 활동을 다룬 심훈의 『동방의 애인』(1930, 미완), 1929~1930년의 학생운동이 진행되는 시점에 그 장면을 삽화로 작품 속에 담아낸 염상섭의 『광분』(1929~1930), 의열단의 폭탄투척사건을 암시한 현진건의 『적도』(1933~1934) 같은 작품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소작쟁의나 노동쟁의에 나선 개인과 집단의 내면, 운동의 과정을 그린 작품들도 많다. 이들도 넓은 의미에서 항일운동의 문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겨진 가족의 고난에 관한 이야기는 서사의 출발로서 두루 활용되고 있다. 여기서는 이런 작품들과는 다르게 서울의 여학생이 3·1운동의 주체로 성장해서 벌인 운동을 직접 묘사하고 있는 「여학생일기」를 통해 여학생의 3·1운동을 살펴보겠다. 


3·1운동 주체로서 여학생들 육성 담겨 

생생함 더하고 기록문학 가치 높아 


1910년대 여학교 교실에서 일본과 조선을 문명과 야만으로 설명하고, 강제병합을 시혜로 설명하는 제국 출신 교사와 그것의 불합리성을 논파하며 맞서는 피식민지인 여학생들 사이에 감도는 민족적 갈등의 긴장감과 그것이 3·1운동으로 터져 나온 모습을 직접 묘사한 작품 「여학생일기」는 일제의 검열이 작동하지 못하는 상해판 『독립신문』 제14~21호(1919.9.27~10.16)에 6회 연재 발표되었다. 운동이 일어난 지 반년 정도 지난 시점에서 발표된 이 글은 운동을 준비하고 직접 현장을 경험했던 여학생의 육성이 담겨 있어 생생함을 더하고 기록문학으로서의 가치도 높다. 


「여학생일기」에 묘사되는 1910년대 교실의 풍경은 매우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오늘날 3·1운동의 대표적인 여성으로 부각되어 있는 유관순과 김마리아 같은 경우는 그들이 어떤 삶의 맥락 속에서 그런 자리로 나아갈 수 있었는지가 잘 드러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행적만으로 영웅화됨으로써 실감이 떨어지는 측면이 있었다. 그런데 「여학생일기」에는 개성 제1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관립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 여학생이 교실에서 식민지 노예교육을 받으면서 오히려 민족적 자각을 하게 되는 경험이 아주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보통 식민주의자는 제국은 문명, 식민지는 야만이라는 도식을 가지고서 식민지를 문명 개화시키는 것이 자기들의 사명이며,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고 피식민지인에게 되풀이 말한다. 제국의 지배논리를 꿰뚫지 못하고 현상만 보는 경우 피식민지인은 열등감에 휩싸이기 십상이다. 「여학생일기」에는 그런 식민주의자의 고성과 거기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다양한 논리와 목소리가 담겨 있다. 


일본인 교사는, “조선은 아직 멀었다. 해마다 이렇게 식목을 하여도 사흘만 지나서 가보면 다 뽑아다 불을 때고 마는구나. 그런 야만 된 소위가 어디 있겠니. 원래 미개한 나라에는 도적이 많은 법이니라”, “조선 사람은 함부로 고추를 쳐먹으니까 대강이가 못쓰게 된다. 보통과에서 본과에 올라올수록 차차 성적이 나빠가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이지. 사탕은 그렇지 아니해서 문명한 나라일수록 많이 먹는데 내지는 각국에 비교하면 제일 많이 먹는다”고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을 구사했다. 


이런 말에 대해 여학생들은 무반응 침묵으로 부정의 의사를 표시했다. 학생들이 제일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해석에 관한 대목이다. 일본인 교사가 “일본은 우리나라”니까 “일본과 조선”이 아니라 “내지와 조선”으로 불러야 한다면서 이를 “큰댁”과 “행랑것”에 비유했다가 “그러면 우리는 일본 사람의 행랑것들이에요?”라고 하는 학생들의 거센 반발에 말을 얼버무린다. 


‘내지’라는 용어는 조선이 일본의 한 지방임을 표시하는 것으로 일제강점기 내내 식자들이 극력 피하려던 용어였다. 그런데 이미 1910년대 초두부터 어린 보통학교 학생들조차 이런 식으로 식민지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있었기에 이 기운들이 모여 3·1운동으로 터져 나오게 되었을 것이다. 


‘합병문제의 대 논전’이라고 소제목이 붙은 대목에는 그 기운이 완전히 무르익어 있다. 일본은 ‘합병’은 시혜라고 선전했지만 여학생들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합병이 시혜이기에 일본 측에서 보면 도리어 손해라고 선생이 말하자, 바로 그 논리를 그대로 가져다가 그렇다면 손해 보는 일은 그만두라고 역공한다. 이 밖에도 1918년 9월 시베리아로 출병하는 일본군의 환송객으로 동원되었을 때 만세를 부르라는 강요에 여학생들은 “망세(亡歲)”라고 외치는 것으로 저항을 했다.


「여학생일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죽은 뒤부터 1919년 3월 1일까지 여고보에서 벌인 항일운동이다. 여학생들은 1월22일에는 수업을 마친 뒤 저녁에 100여 명이 단체로 대한문 앞에 가서 망곡(望哭)하고 돌아왔고 23일부터는 교장 선생과 싸워서 결국 복댕기를 드리고 아침마다 함께 곡을 한 뒤에야 수업을 시작했다. 매일 곡을 하면서 인산날까지 두 달 동안 여학생들은 여러 가지로 시위 준비를 한 뒤 3월 1일에는 단체로 기숙사를 뛰쳐나와 시위에 참가했다.


1919년 3월 1일. 2개월간 우리는 여러 가지 준비를 하였다. 학우의 주소를 조사하며 돈을 모으며 일인의 눈을 피하여 비밀히 동지를 단속하였다. 어떤 때는 아궁이 앞에 널짝을 놓고 그 밑에 들어가 가만히 한 마디 두 마디씩 연락을 하여 주기로 하였다가 3월 1일 오전을 당하여 (…) 하나씩 둘씩 끌고 가서 오늘 할 일을 일러 주었다. 그래도 천연스럽게 하오 1시 될 때까지는 참고 공부하기로 하였다. “불의(不義)코 백년 살지 말고 의(義)코 하루 살아라.”를 변소 벽에 기록하고 한 사람씩 가보게 한다. 


하오 1시경에 독립선언서 1장이 들어왔기로 몰래 들여다보고 있을 때 탑골 공원에서 독립만세 소리가 천지를 울리다. 통학생은 곧 책보를 던지고 출동하였으나 기숙생은 그리하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 직원회임을 틈타 기숙사 후문 열쇠를 주먹으로 쳐 비틀고 사동(寺洞)으로 하여 대한문 앞에 나가 행렬을 만나다. (…) 종일 만세를 부르고 돌아다니다가 하오 7시경이나 되니 혹 기색(氣塞)하여 노방에 쓰러진 친구, 혹 왜경에 결박을 지여 끌려가는 친구, 혹 휘젓는 군기 끝에 찔려 넘어져 어머니를 찾는 친구, 그 정상(情狀)이야 어찌 차마 보랴. 그날 밤 9시까지 경찰서에 잡혀가 얻어맞고 나오다. (…) “이렇다고 일을 아니 할쏘냐?” 낙심 말고 나아가 내 동포를 구원하여 남과 같이 자유롭게 살아보자 굳게 언약하고 얼른 퇴사하기를 권고하고 돌아오다.


1910년대 숱한 유관순‘들’ 존재 드러내

작가는 김원경 애국부인회 부회장 추정


일기의 작자는 경찰서에 잡혀가 맞으면서 조사를 받고 난 뒤에 훈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학생일기」는 3월 1일에서 끝났다. 


다음날인 3월 2일 김마리아, 박인덕, 황애시덕, 나혜석 등 지도층 여성 인사들이 모여 여학생들을 조직적으로 시위에 참가시키는 의논을 했다. 그리하여 서울 시내의 여학생들은 3월 5일에 대대적으로 참여한다. 3·1운동으로 기소된 여성의 75%가 당시 25세 미만이었고, 또 그들 중 절반은 여교사, 절반은 여학생이었다. 이화여고보 1학년으로 3월 5일의 시위에 참가한 뒤 고향으로 내려가서 시위를 조직했다가 체포되어 옥사하기에 이른 유관순은 어린 소녀가 야만적인 폭력에 희생되었다고 하는 비극성으로 강한 인상을 주고 3·1운동에 참여한 여학생의 상징이 되어 있지만, 실상 1919년 당시에는 숱한 ‘유관순’이 존재했다. 이런 점에서 「여학생일기」에는 1910년대의 유관순‘들’이 민족의식을 키워가는 과정과 그 결과로서 터져 나온 여학생의 3·1운동을 표현한 작품이다.


작가는 심원 여사(心園女史)로 되어 있는데 이는 김원경(金元慶, 1898.11.13~1981.11.20)으로 추정된다. 호는 운당(雲堂)이고, 본적은 ‘경성부 무교정 30’으로 되어 있다. 관립경성여고보 출신으로 1919년 3월 1일 경성여고보생들이 단체로 시위에 나갈 때 주도적으로 참가한 뒤 상해 임시정부 조직 준비위원회 사무소에서 부인단체 대표를 파견해 달라는 교섭이 와서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와 혈성부인회의 두 단체의 공동 대표로 상해로 파견됐다. 


상해에서 김원경은 상해애국부인회의 부회장직을 맡았고 1922년 모스크바의 극동인민대표대회에 권애라(權愛羅)와 함께 참가했다. 남편은 임시정부 제10대 의정원 의장을 지낸 최창식(崔昌植, 1892.6.3~1957.5.21)이다. 김원경은 해방 후에도 중국에서 지내다가 남편이 죽은 후 1957년 미국으로 이주해서 거기서 생을 마감했다. 2008년 후손이 이들 부부가 쓰던 병풍을 기증했는데 그 병풍 뒷면에서 상해 임정 설립자금을 모금한 비밀 장부를 발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필자 이상경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현재 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관심사는 한국근대문학사와 여성문학이다. 『강경애 전집』(1999), 『나혜석 전집』(2000), 『한국근대여성작가선집』(2021) 등을 펴냈고 주요 저서로 『인간으로 살고 싶다- 영원한 신여성 나혜석』, 『한국근대여성문학사론』, 『임순득- 대안적 여성주체를 향하여』, 『경계의 여성들-한국근대여성사』(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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