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 Theme.3 식민지 시대 망명의 저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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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주의 탄압 피해 중국·소련 망명
세계 전쟁의 참화 목도
코스모폴리타니즘 모색 반제국주의 저항문학으로
글 | 김재용(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근대 이후 한국문학에서 발견되는 망명작가와 문학은 기본적으로 식민지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한다. 신채호, 조명희, 염상섭, 김사량 이 네 작가는 근대 이후 한국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는 이들로서 조국을 떠나 중국 혹은 소련으로 망명을 했다. 근대 이후 한국문학에서 발견되는 망명작가와 문학은 기본적으로 반식민지 투쟁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식민지 시대 망명 작가들은 세계의 유럽의 국민국가와 내셔날리즘이 결국 제국주의로 귀착되고 궁극적으로 세계 전쟁의 참화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반제국주의적 코스모폴리타니즘을 모색하게 된다.
왜 한국문학에는 망명 작가가 많은가
근대 이후 한국문학에서 작가들이 망명한 것은 시기적으로 한정되어 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시점부터 해방되기 전까지이다. 식민지가 되기 이전에 망명을 한 한국 작가는 없고 또한 해방 후에도 두드러지게 망명한 작가는 없다. 해방 이후 북한에서 소련에서 온 작가들이 다시 소련으로 가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 역사적 정황을 고려할 때 일반적인 망명 작가라고는 부르기 어렵다. 또한 남한에서도 이민 등의 형태로 미국 등으로 떠난 작가들이 있지만 이 역시 일반적인 의미의 망명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근대 이후 한국문학에서 망명 작가가 나온 것은 일제 식민지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즉 식민지의 억압에 견디지 못해 조국을 떠나는 망명을 행한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근대 이후 한국문학에서 발견되는 망명작가와 문학은 기본적으로 식민지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근대 이후의 한국문학을 설명할 때 망명문학을 하나의 중요한 현상 혹은 흐름으로 인식하고 이를 해명하는 노력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개별 망명 작가에 대한 연구는 있었지만 이것을 문학사의 중요한 현상으로 간주하고 이를 큰 틀에서 설명하는 노력은 없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된 데에는 한국문학의 독자성을 인식하고 이를 설명하는 데 익숙치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구미라든가 동아시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이론적인 틀에 너무나 익숙하기에 이런 곳에서 논의하지 않는 문학적 현상에는 눈을 주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 글에서는 근대 이후 한국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망명 작가와 망명 문학에 대해서 논의하려고 한다. 신채호, 조명희, 염상섭, 김사량에서 보는 것처럼 망명 작가는 매우 많다. 거론한 네 작가 이외에도 이육사를 비롯하여 많은 망명 작가들이 존재한다. 일본 이외의 지역으로 나가서 활동한 작가들 중에서 앞서 거론한 작가들만큼 뚜렷하지는 않지만 단순한 유학이나 취직이 아닌 상태로 조국을 떠난 경우가 많다. 이 모든 이들을 다루는 것은 그들의 궤적과 활동이 다룰 만큼 분명하지 않거나 혹은 비중이 약하기에 이 글에서는 네 명의 작가를 중심으로 논하고자 한다.
망명의 계기와 그 역사적 기반

신민회 조직이 탄로 나고 더 이상 조선에서 반제국주의 운동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신채호는 연해주를 거쳐 중국으로 망명했다. 해외로 망명을 떠날 무렵의 신채호는 강한 내셔날리스트였다. 유럽의 이탈리아나 메이지 이후의 일본처럼 조선도 당당한 근대국민국가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서는 내셔날리즘의 사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1차대전 이후 세계의 현실을 목격하면서부터 더 이상 이 내셔날리즘에 집착하지 않았다. 유럽의 국민국가와 내셔날리즘이 결국 제국주의로 귀착되고 궁극적으로 세계 전쟁의 참화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내셔날리즘과 결별하고 새로운 밑으로부터 코스모폴리타니즘을 모색하게 된다. 제국주의의 등장으로 인하여 세계가 제국주의 국가들과 식민지로 이분된 현실에서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도 대안이 될 수 없다고 하면서 다른 길을 모색하다가 결국 1929년에 일본 경찰에 잡혀 여순 감옥에서 옥고를 겪다가 1936년에 옥사하였다. 망명 중 다양한 글쓰기를 통하여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는데 특히 『용과 용의 대격전』은 내셔날리즘에서 벗어나 밑으로부터의 세계주의를 모색하던 신채호가 보여준 반제국주의의 전망의 절정이다.

하지만 타고르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그 대안이 쉽지 않았던 차에 레닌의 민족해방론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타고르에서 고리키로 급선회하게 되었다. 조명희는 레닌의 민족해방론이 근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노력과 식민지 민족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줄 수 있는 대안이라고 보았기에 사회주의에 깊이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전망 하에서 카프에 가담하여 열심히 활동하였고 1927년에는 문제작 『낙동강』을 내놓게 된다.
일제의 탄압 때문에 공개적 활동이 어렵게 되자 조명희는 소련의 연해주로 망명을 하게 된다. 아마도 그는 이 무렵까지도 레닌의 민족해방론을 철저하게 신봉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계혁명과 소련의 보위를 위해 비서구 식민지 민중을 동원하려 고안된 레닌의 민족해방론이 갖는 문제점을 이 시기에는 미처 간파하지 못하였기에 주저 없이 소련의 연해주로 망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명희가 연해주로 간 다음에 바로 코민테른이 좌선회를 하게 되면서 식민지 문제가 사라지자 조명희는 힘든 나날을 겪어야 했다. 자신이 연해주로 망명한 동기는 비단 근대를 넘어서는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뿐만 아니라 일제로부터 조선이 해방되는 문제도 함께 고려했던 것인데, 그가 도착한 연해주 지역에서는 정작 6차 코민테른의 좌선회의 영향으로 오로지 소련의 보위만이 중요하게 대두되어 더 이상 조선의 식민지 문제와 같은 것은 고려의 대상으로 되지도 않는 분위기였다. 연해주의 신문과 문학장은 오로지 소련중심주의를 지지하는 조선인들에 의해 장악되어갔고 자신과 같은 식민지 민족을 고려하는 이들은 억압당하고 배제되기 일쑤였다.
코민테른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던 연해주에서 1935년 제7차 코민테른의 노선 변화는 그에게 큰 희망이었다. 다시 반파시즘 인민전선과 반제국주의 통일전선이 당당하게 이야기될 수 있는 분위기였기에 조명희는 활동을 재개하였다. 하지만 일본이 만주국에 이어 중국 관내 지역으로까지 침략하려고 하는 기미를 보이자 소련 당국은 많은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고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을 연해주에서 펼치려고 하였던 조명희로서는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끝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1938년에 일제의 간첩이란 죄명으로 처형을 당한다.

염상섭은 미국과 소련이 기존의 제국주의 국가들보다는 낫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보면서 그 양면성을 드러냈다. 기존의 제국주의 국가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하기에 비서구 식민지 민중들로부터 환영을 받지만 사실은 그 역시 제국의 근대에 불과하다는 인식이다. 염상섭은 제국주의 국가와 제국의 국가들 사이의 헤게모니 대립을 아주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틈을 노려 만주국으로 건너가 망명 생활을 하였다. 만주사변 이후 국제연맹의 간섭으로 인하여 위장된 독립국을 세운 것을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이 제국의 국가인 미국과 소련의 압력에 밀린 결과라고 보았다. 따라서 ‘내선일체’가 시작되는 조선을 떠나 오족협화의 위장된 독립국인 만주국으로 건너가 그 틈새에서 조선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지켜내려고 하였다. ‘내선일체’가 지배하는 조선에서는 자신이 조선인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오족협화’를 내건 만주국에서는 자신이 조선인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37년에 만주국 신경으로 건너갔다가 그곳마저 관동군의 입김이 강해지자 안동으로 가서 간신히 그 좁혀진 틈을 활용하면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흔히 염상섭을 망명 작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중국 관내 지역이 아닌 만주국으로 이주한 것의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한 탓이다. 염상섭의 전 생과 문학을 잘 읽어보면 1937년의 신경 이주와 1939년의 안동 이주는 분명 망명이라고 할 수 있다.
김사량이 1936년에 동경제국대학에 입학하여 동인 활동을 할 때의 동인지 제목은 ‘제방’이었는데 이는 파시즘의 파도를 막는다는 의미였다. 1935년 코민테른조차도 기존의 정책을 바꾸고 반파시즘과 반제국주의를 내세웠을 정도였기에 김사량 역시 이러한 흐름 위에 놓여 있었고 일본어와 조선어를 통하여 제국주의 일본을 비판하였다. 일본어 창작을 요구하던 총독부의 정책 하에서도 우회적 글쓰기로 용케 버티던 김사량이 고비를 맞이한 것은 1943년 일제 말 최후기이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밀린 일본이 학병이란 이름으로 대학생들을 동원하게 되자 김사량은 이전에 감지하지 못하였던 감시에 시달리게 된다. 1944년 한 달 넘게 상해 등지를 돌면서 전환기의 동아시아를 관찰하던 김사량이 중국 전선에서 겪은 일로 귀국 후 강한 감시를 받게 되자 어쩔 수 없이 1945년 5월에 중국 연안 지역으로 망명을 하게 된다. 망명하는 것을 일종의 도피로 간주하였던 김사량이었지만 너무나 강한 압박과 감시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결국 망명을 선택한 것이다.
망명 작가의 특성
네 명의 망명 작가들은 하나같이 일본의 식민지 억압으로 인하여 망명을 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일본의 식민지화 직후에 망명한 신채호, 민족해방운동을 하던 사회주의자들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망명한 조명희, 내선일체의 시작과 더불어 만주국으로 망명한 염상섭 그리고 망명을 도피로 간주하고 국내에서의 우회적 저항을 고수하다 이것마저 여의치 않게 되면서 연안 지역으로 건너간 김사량 모두 일본제국주의의 탄압을 피한 것이다. 만약 일본의 탄압이 신변의 위협으로까지 느끼지 않았다면 이런 망명을 택하지 않고 조선 국내에서의 저항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공통적으로 견디기 힘든 제국주의 일본의 탄압으로 인하여 망명이란 길을 걸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김사량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망명을 일종의 도피라고 간주하던 이들마저도 탄압을 피해 조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을 고려하면 이는 한층 분명하다.
네 명의 망명 작가들을 떠올리면 이들이 모두 내셔날리즘에 입각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제국주의 일본에 맞서 조국을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이들의 행적과 사상을 꼼꼼하게 살펴보면, 이들은 결코 내셔날리스트가 아니고 나름의 코스모폴리탄이라는 점이다. 신채호를 제외한 세 명의 작가들은 작품 창작을 시작할 때부터 내셔날리즘과는 무관하였다. 이들은 유럽의 내셔날리즘이 제국주의로 전화하여 서로 전쟁을 벌였던 1차대전의 의미를 파악하였던 터라 내셔날리즘과는 일찍 결별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고민은 근대 내셔날리즘이 아닌 다른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신채호는 처음에는 내셔날리스트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특히 1차대전 이후에는 이를 과감하게 버린다. 그 이유는 앞선 세 사람과 마찬가지로 1차대전 전후의 유럽을 보면서 이것으로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네 명의 한국 망명 작가는 인상과는 다르게, 모두 내셔날리스트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복합적인 면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망명이라는 행위만 떠올려도 이들이 내셔날리스트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서구 식민지 지식인의 짙은 고뇌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아래로부터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을 견지하였다.

연세대학교 영문학과와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후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한국근대문학과 세계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만족문학운동의 역사와 이론』, 『북한문학의 역사적 이해』, 『분단구조와 북한문학』, 『한국 근대민족문학사』, 『협력과 저항』, 『세계문학으로서의 아시아 문학』, 『풍화와 기억』 등이 있다. 함께 엮은 책으로 『만주국 속의 동아시아 문학』, 『탈유럽의 세계문학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