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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 Theme.4 친일 또는 대일협력과 문학인의 변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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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이광수를 중심으로 본 변절 


노골적 전향의 길 걸으며 

정신 팔고 욕된 생명 이어 해방 후 민족의 죄인으로    


 글 | 방민호(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채만식은 1939년경부터 대일협력적인 문필 행위가 본격화된다. 그는 장편소설 『여인전기女人戰紀』를 비롯하여 여러 편의 ‘친일소설’을 남겼다. 이광수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피검되어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죽음으로써 사는 길을 선택하지 못했고 노골적인 대일협력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장편소설 『사랑』을 통하여 중일전쟁 중임에도 불교와 기독교의 종교 통합적인 사랑을 통한 사람 구제를 이야기했다. 곧이어 먼저 국가를 위하여 적을 죽이자는 노골적인 전향으로 나아갔으며 이는 결국 내선일체, 학병 지원을 선전하고 동등한 천황의 신민으로 대우받기 위해 그에 합당한 희생을 치를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까지 전개되었다.  


친일 또는 ‘대일협력’


지금 쓰는 원고에 대한 본래의 요청은 일제강점기 친일문학과 문학인들의 변절에 관해 써달라는 것이었다. 


‘친일’이라는 말은 지금도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일제강점기에 ‘대일협력’을 행한 이들을 비판적으로 거론할 때 늘 등장한다. 필자는 이 말이 현상론적 차원과 가치론적 차원이 함께 뭉뚱그려져 있는 용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대신에 작가 채만식이 자신의 과거 행위를 묘사하면서 사용한 ‘대일협력’이라는 말을 새롭게 제안한 바 있다. 


여기서 말하는 ‘현상론적’ 차원이란 ‘그’가 어떤 일들을 ‘저질렀는가’에 대한 객관적, 외적 사실에 관한 것이고, ‘가치론적’ 차원이란 왜 그렇게 했는가를 둘러싼 내적, 정신적 경위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이 실리는 월간 『순국』의 취지와 정신을 고려하여 여기서는 용어를 둘러싼 날카로운 논의는 미루어 두고자 한다. 


해방 후 나타난 채만식의 자기반성


필자가 2000년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은 작가 채만식(1902.7. 21~1950.6.11)에 관한 것이었다. 이 작가는 『친일인명사전』에도 올라 있고 그의 이름을 빌린 문학상도 한때 문제가 되기도 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해방 후에 「민족의 죄인」(『백민』, 1948.10)과 「낙조」(『한성일보』, 1948.11.2~ 1948.12.4, 28회)라는 두 중편소설 연작을 통하여 일제 말기에 이루어진 자신의 대일협력 행위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과 반성을 시도했다. 그럼에도 한 역량 있는 연구자는 그가 ‘민족의 죄인’이 된 자신의 친일 행위를 변명하기 위해 한국인들을 ‘죄인의 민족’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비판하기도 했다.(김윤식, 「민족의 죄인과 죄인의 민족」, 『수필문학』, 1976.3) 


그때는 두 작품 가운데 오로지 「민족의 죄인」만 논의에 오르내리고 있었고, 여기서 작가는 일인칭 주인공을 내세워 자신은 일제의 폭력 앞에서 ‘용렬하고 나약한 지아비’에 불과했다고, 변명으로도 읽힐 수 있는 논법을 구사한다. 


나중에 연구자 정호웅에 이어 필자가 주목하게 된 「낙조」의 주인공 초등학교 선생인 ‘나’는 일제 말기에 자신이 아이들에게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우게 한 것을 반성하면서 새 나라의 새 선생님이 되겠다고 생각한다. 해방 전부터 자신을 짝사랑하던 먼 친척 누이 ‘춘자’가 양공주가 되어 미군의 아이를 갖게 된 것을 보고 ‘나’는 작중에서 ‘차라리 죽어버리지나 않고’ 하는 식의 비난을 가한다. 그러자 춘자는 ‘나’를 향해 나는 지금 외인에게 몸을 팔았지만 당신은 일제 때 정신을 팔지 않았느냐고 힐난을 하고 있다. 


「낙조」를 통하여 채만식은 자신이 단지 「민족의 죄인」의 ‘용렬하고 나약한 지아비’였을 뿐 아니라 일제에게 정신을 팔아버린 자였음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던 것이 아닐까?


위력의 현실 앞에 노출된 개체의 향방


채만식이 그가 말하는 ‘대일협력’이라는 것으로 나아간 계기는 1938년에 있었던 구금의 경험이었다. 그때 지금은 이북 지역인 개성에 기거하고 있던 채만식은 중학생들의 독서회를 지도하는 역할을 했는데, 학생들 중 하나가 피체되는 바람에 그 또한 경찰서에 끌려가게 된다. 


그런데 그를 몇 개월간의 구금 생활에서 풀려나게 한 것은 서울에서 열리는 친일 문학인 단체에 참석하라는 엽서 한 장이었다. 서울에서 온 엽서가 경찰서에서 그를 풀려나게 해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냉혹한 구금 생활에서 풀려난 채만식은 개성을 떠나 경기도 안양으로 이사를 하지만 그럼에도 1939년경부터 그의 대일협력적인 문필 행위는 본격화된다. 그는 장편소설 『여인전기女人戰紀』(『매일신보』, 1944.10.5~1945.5.17)를 비롯하여 여러 편의 ‘친일소설’을 남김으로써 『탁류』(『조선일보』, 1937.10.12~1938.5.17), 『태평천하』(『천하태평춘』, 『조광』, 1938.1~9)로 대변되는 현실 비판 정신의 추락의 흔적을 남겨 놓고 말았다. 


채만식의 문학세계를 아끼는 필자는 그가 어째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질문을 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일제의 강점이라는 폭력적, 억압적 현실, 그 메커니즘의 압력에 대한 굴복이자 체념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대일협력 또는 친일이라는 현상은 권력의 진공 상태에 놓여 있는 지식인의 자율적, 자유의지적 선택의 산물이 아니라 엄연히 존재하는 폭력, 억압의 메커니즘, 그리고 그 위력 앞에 노출된 인간 개체의 의지적 힘의 상실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개체의 내구력을 압도적으로 초월하여 존재하는 위력 앞에서 고립된 개체는 당연히 저항력을 지속해 가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때문에 지식인들은 서로 조직적이든 비조직적이든 일종의 유대를 형성함으로써, 그러한 저항 네트워크를 통하여, ‘친일’로 기울어지려는 자신을 그로부터 끌어내어 다른 길로 향하게 할 수 있다. 필자는 일제 말기의 이육사나 오장환, 김기림, 신석초 같은 이들, 그리고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등 청록파의 시인들이 어두운 밤하늘 아래서 서로 ‘나 아직 살아 있소’라고 별빛 같은 신호를 주고받는 ‘풍경’들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채만식은 그렇지 못했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94년 『창작과 비평』 제1회 신인 평론상을 수상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문학 평론집으로 『문학사의 비평적 탐구』(2018), 『감각과 언어의 크레바스』(2007), 『행인의 독법』(2005) 등이 있다. 한국문학 연구서 『이상 문학의 방법론적 독해』 『일제말기 한국문학의 담론과 텍스트』 『한국 전후문학과 세대』 『채만식과 조선적 근대문학의 구상』, 산문집 『서울문학기행』 『명주』 등 다수를 펴냈다. 현재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광수와 채만식 또는 이광수의 대일협력 문제 


채만식을 소설가로 입문시킨 사람은 1924년에 잡지 『조선문단』을 주재하던 이광수(1892.3.4~1950.10.25)였다. 이광수라면 본격적인 근대소설 『무정』의 작가요, 1919년 2·8 조선인 유학생 독립선언서를 집필한 사람이요, 상해로 가 안창호(1878.12.2~1938.3.10)와 김구(1876.8.29~1949.6.26) 아래서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을 편집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그는 2년간의 상해 시기를 뒤로 하고 1921년 3월에 조선으로 귀국했는데, 구금당하지 않고 『동아일보』에 들어가 소설을 쓰며 살아갈 수 있었고, 『개벽』 편집진의 후의로 당해 잡지에 「민족개조론」(『개벽』, 1921.5)을 발표하여 사회적 물의를 빚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준비론적인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었으며 이는 자신이 1922년 2월에 조직한 수양동맹회를 안창호 흥사단의 국내 조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데서도 입증된다. 나중에 작가 김동인의 형 김동원이 주도한 동우구락부와 합쳐 1926년 1월에 결성된 수양동우회는 1937년 중일전쟁의 소용돌이를 목전에 둔 조선총독부에 의해 이른바 치안유지법 사건으로 다루어지게 된다.(1937.8~1941.11)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피검된 안창호는 세상 떠나기 직전에서야 풀려났지만 그의 제자임을 자처한 이광수는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죽음으로써 사는 길을 선택하지 못했고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노골적인 대일협력의 길을 걷게 된다. 


시기로 보면 이때는 이광수가 소설 「육장기」(『문장』. 1939.9)를 통하여 홍제동 별장을 팔고 ‘환속’하는 뜻을 밝힌 1939년 경이니, 그는 장편소설 『사랑』(박문서관, 상권 1938.10, 하권 1939.3)을 통하여 중일전쟁 중임에도 불교와 기독교의 종교 통합적인 사랑을 통한 사람 구제를 이야기한 직후였다. 전쟁의 시대에 사랑을 고창한 그는 곧이어 먼저 국가를 위하여 적을 죽이자는 노골적인 전향으로 나아갔으며 이는 결국 내선일체, 학병 지원을 선전하고 동등한 천황의 신민으로 대우받기 위해 그에 합당한 희생을 치를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까지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해방까지의 이광수가 친일로써 시종일관했는가는 아직도 논의의 여지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는 이 시기에 한편으로는 국책에 호응하는 친일소설을 쓰면서도 시간이 흐르면서 일제의 몰락과 패퇴를 예감한 듯한 행적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1면에 1917년 1월 1일부터 『무정』(『매일신보』, 1917.1.1~6.14)을 연재할 수 있었던, 체제가 길러낸 지식인 소설가 이광수는 끝내 욕된 생명을 이어 해방 후 민족의 죄인으로 반민특위에까지 회부되기에 이른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채만식은 자신을 문단에 입문시켜 준 대작가 이광수의 전향을 목도하면서, 체제의 위력에 항거하고 이 힘으로부터 자신을 보존할 수 있는 의지력을 상실했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상해로부터 돌아와서도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민족 지사로서의, 민족주의 작가로서의 면모를 유지하려 했던 이광수가 죽음 대신에 삶을 선택했을 때, 채만식의 현실 비판 노선 역시 문제작 「냉동어」(『인문평론』, 1940.4~5)가 보여준, 시대의 혹한에 꽁꽁 얼어붙은 지식인의 허무주의적 포즈로 하락해 버렸던 것이다. 


친일, 대일협력의 다른 근거들, 

그리고 비상구는 있는가?


여기서 하나의 비판적 질문이 가능하다. 일제강점기 지식인들, 문학인들의 변절, 친일과 대일협력이라는 것은 오로지 일제의 강압과 위력의 소치로만 해석되어야 하는가? 


다른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수 있다고도 생각된다. 예를 들어, 한국인(조선인)을 일본인과 비교하여, 근원적으로 열등하고, 덜 문화적이며,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믿는 것이다. 자기가 속한 민족이 자기 위에 군림하며 채찍을 휘두르는 민족보다 못하다고 보아, 그들의 지배를 수용하고 그들을 따라 배움으로써 ‘우리’ 또한 내일에 더 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제 말기에 일본어 소설로 일본 문단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해방 후에 일본인으로 귀화한 장혁주(1905.10.13~1998.2.1) 같은 작가라면 혹여 그런 자기 부정에 빠져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히, 일관되게, 자민족 부정에 귀일한 작가는 상상하기 어렵다.


근원적인 자기 부정 또는 ‘자학사관’ 외에도 사람은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앞에 대두한 물질적 유인이나 입신출세, 권력의 배분이나 구걸 따위를 위해서도 얼마든지 정신을 팔고 몸을 젖혀 버리는 행동을 할 수 있다. 문제적인 1939년에 이효석(1907.4.5~1942.5.25)은 희곡 「역사」(『문장』, 1939.12)를 발표한다. 이 알레고리적 희곡에서 이효석은, 로마제국과 헤롯왕의 압제에 무력으로 항거하자는 ‘토마스’라는 청년과, 사랑과 용서의 길을 제시한 ‘예수’와, 물질에 자신이 지켜야 할 스승을 팔아버린 ‘유다’의 세 유형의 길을 나타내 보였다. 


중국 파견 중에 연안으로 탈출, 저항작가의 길을 택한 김사량(1914.3.3.~1950.9.17)은 일본어 소설이지만 「천마」(『文藝春秋』, 1940.3)라는 작품에서 일제의 지배 체제에 기생하는 ‘현룡’이라는 타락한 영혼의 형상을 제시한다. 이는 당대의 비평가 김문집(1907.7.7.~?)을 모델로 삼은 것이라지만 그 시대를 살며 체제의 어떤 위치에서든 삶을 영위해야 했던 이들은 크든 작든 그런 유혹에 시달렸다고도 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 시대를 ‘욕되게’ 넘겨 살아남은 것이 ‘큰 죄’가 된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식인이고 작가라면, 또 더 잘 알려지고 더 높은 이름을 가진 지식인, 작가라면 문제의 차원이 달라진다. 


그때 그는 선택하고 결정해야 한다. 사람은 반드시 죽을 운명을 타고난 존재들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단 한 번 있을 그 죽음의 자리를 언제 어디서 맞을 것이냐를 지식인, 작가는 심사숙고해야 한다. 또한 이때는 용기가 필요하다.


필자 방민호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94년 『창작과 비평』 제1회 신인 평론상을 수상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문학 평론집으로 『문학사의 비평적 탐구』(2018), 『감각과 언어의 크레바스』(2007), 『행인의 독법』(2005) 등이 있다. 한국문학 연구서 『이상 문학의 방법론적 독해』 『일제말기 한국문학의 담론과 텍스트』 『한국 전후문학과 세대』 『채만식과 조선적 근대문학의 구상』, 산문집 『서울문학기행』 『명주』 등 다수를 펴냈다. 현재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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