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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 Theme.2 만주지역 민족운동 세력의 경쟁과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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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사회 항일 독립투쟁의 두 가지 흐름  


같은 공간서 서로 얽히며

민족혁명 하나 되려 노력

광복까지 각개약진 지속 


글 | 신주백(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애국열에 불타는 사람들은 개인의 수양을 강조하며 문화운동을 이끌었다. 만주로 간 이들은 총을 들었다. 이들이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전역에서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1920년 11월경부터 일본군이 저지른 간도참변은 독립군을 도와준 데 따른 극도로 비참하고 두려운 경험이었다. 반면 사회주의 이념의 전파자들은 학교와 야학이란 공간에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며 대중강연과 연극 활동 등을 통해 사회주의를 알렸다. 1922년, 1923년경에 이르면 만주 지역 조선인 사회를 기반으로 전개된 항일운동은 확실히 두 개의 흐름으로 나뉘었다. 그들 사이의 경쟁은 누가 더 만주 지역 조선인 사회를 위하느냐, 그러면서도 독립투쟁을 더 잘할 수 있느냐를 둘러싼 고뇌의 표현이었다.  


지금의 일상에서도 그렇고 역사에서도 그렇지만 비교는 쉽지 않다. 적절하게 비교했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는 핵심은 기준의 일관성과 균형이다. 요즈음 유행하는 말로 대상을 공정하게 다루어야 들을 수 있는 칭찬이다. 하지만 현상 비교 또는 단순 비교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경우를 지금까지 더 많이 목격했다. 그만큼 쉽지 않은 것이다. 만주 지역 민족운동의 두 흐름인 민족주의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비교할 때도 마찬가지 어려움에 직면한다. 그래서 비슷한 시간대, 같은 공간에서, 두 흐름은 무엇을 선택했고 어떤 주장을 했는지 평면적으로 병렬해 보는 얄팍한 수를 써 보겠다. 


항일운동 세력이 분화하다


3·1운동은 그때까지 걸어온 시간을 압축해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동시에 앞으로 걸어가야 할 주체들의 시간을 미리 보여주는 것 같은 예지(豫知)적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모두 함께 싸워도 일본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는 높은 고갯마루를 보여준 사건이면서, 그래도 같이 해야 뭔가 답을 낼 수 있다는 희망가를 만세 소리로 들려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전자와 같은 고개에 눈을 돌린 사람들은 3·1운동이 끝나자 곧바로 자치를 말하거나 대놓고 친일 행위를 서슴지 않는 길로 들어섰다. 반면에 후자와 같은 기대를 품은 사람들은 각자의 처지에서 다양한 형태로 민족을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전에 없었던 사회적 현상을 가리키는 ‘애국열’, ‘교육열’이란 말이 등장하였다. 그 현상을 이끄는 주체로서 ‘민중’이란 새로운 말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애국열에 불타는 사람들은 개인의 수양을 강조하며 문화운동을 이끌었다. 만주로 간 이들은 총을 들었다. 이들이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전역에서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교육열에 뜨거운 사람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학교를 세우거나 감기는 눈을 비벼가며 새로운 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우려고 달려들었다. 만주에서 이들이 모인 학교는 사관학교가 아니었음에도 예비 독립군을 양성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혁명의 여파로 만주에 인접한 시베리아에서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곳에 이주한 사람도 독립군도 볼셰비키 혁명을 지지한 적군(赤軍) 편에 섰다. 반면에 일본군은 백군(白軍)을 지원하며 조선인 사회를 탄압하였다. 내전에 참가하거나 목격한 사람들 눈에 적군이 옹호하는 혁명은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이들은 사회주의가 우리 민족에게 도움이 되는 주장으로 비치는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중 일부는 만주로 와서 정착한 사람이었다. 특히 1921년의 자유시참변을 겪으며 그랬다. 


만주로 돌아온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담을 말하였다. 만주의 조선인 사회에서도 이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민중이 점차 늘어갔다. 이들은 민중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무장투쟁만을 내세운다고 독립군의 운동방식을 비판하였다. 사실 1919년, 1920년 애국열이 고조되었을 때만 해도 곧 독립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었으니 민중들로서는 식량, 의복, 의무금 등에 대한 부담을 감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920년 11월경부터 일본군이 저지른 간도참변은 독립군을 도와준 데 따른 극도로 비참하고 두려운 경험이었다. 그렇다고 민중의 생활 형편이 나아지게 독립군이 뭔가 도움을 제대로 준 적도 드물었다.

 반면 사회주의 이념의 전파자들은 학교와 야학이란 공간에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며 대중강연과 연극 활동 등을 통해 사회주의를 알렸다. 사회주의 이념에 긍정적인 사람들의 비판이 조선인 민중 사이에서 먹혀들 수 있는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조선인 사회의 새로운 동향은 독립군의 무장투쟁 위주로 활동하던 민족주의자에게 뭔가 대응해야 할 결정적인 자극제였다. 1922년 만주 지역 주요 항일단체를 상당 부분 망라하여 결성한 대한통의부는 그 첫 번째 결과물이었다. 대한통의부는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려 했으며 공화주의의 원리를 법규로 보장하였다. 군정 부분 일변도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았던 독립군 조직과 달리, 조직을 민정과 군정으로 나누고 보통 교육의 의무 조항을 삽입하는 등 교육 진흥을 민정 활동의 핵심 가운데 하나로 내세웠다. 


이처럼 1922년, 1923년경에 이르면 만주 지역 조선인 사회를 기반으로 전개된 항일운동은 확실히 두 개의 흐름으로 나뉘었다. 그들 사이의 경쟁은 누가 더 만주 지역 조선인 사회를 위하느냐, 그러면서도 독립투쟁을 더 잘할 수 있느냐를 둘러싼 고뇌의 표현이었다. 


서로 경쟁하며 연대를 모색하다


민정을 우위에 두려는 민족주의운동 계열의 움직임은 1924년 11월 결성된 정의부에서 확연히 정착되었다. 정의부는 3권분립에 입각한 공화주의와 조선인 사회의 생활 안정을 위한 자치를 선명히 내세웠다. 그래서 설립 당시부터 산업을 부흥시키고 민족의 발전에 유일한 요소인 교육을 진흥시켜 실력을 양성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정의부 소속 독립군은 일본과의 독립투쟁을 벌이는 군대로서의 역할보다는 자기 조직의 영향권 안에 있는 조선인을 마적 등으로부터 보호하고 의무금 징수 활동을 지원하는 데 더 치중했다. 경찰 기능을 강화한 것이다. 


정의부와 같은 시대적 흐름에 확실히 합류하지 못한 단체가 1923년 압록강변 남만주에서 결성된 참의부와 1925년 북만주에서 결성된 신민부이다. 민정과 군정 가운데 어느 쪽을 우위에 두느냐는 문제는 곧 자신의 영향권 안에 있는 조선인 사회와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라는 운영방식의 문제이기도 했다. 참의부와 신민부는 이를 두고 내부적으로 큰 갈등이 있었다. 특히 신민부는 1928년 10월 군자금을 납부하도록 무력을 앞세워 주민들에게 요구했지만 이를 부담스러운 세금으로 간주하며 거부하는 주민과 갈등이 일어나자 그들을 살상하는 빈주사건을 일으켰다. 흔히들 이 사건을 일으킨 신민부 사람을 군정파, 여기에 반대하는 신민부 사람을 민정파로 분류한다. 이렇듯 정의부를 포함해 삼부(三府)라고들 말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조금 달랐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민족주의운동 계열 단체에서는 민정을 강조하는 흐름이 대세로 뿌리를 내렸다. 


1920년대 중반경 북만주와 남만주에서 삼부가 자리를 잡을 즈음 사회주의자들도 그 공간에서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1926년 북만주의 영안현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만주 지역 사회주의자들의 이러한 움직임을 지휘하는 컨트롤타워였다. 


만주 지역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에 비해 젊었다. 그리고 학교를 다녀 서구적 근대 지식을 흡수한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농민단체를 결성하기보다 주로 청년단체를 조직하며 이미 자리를 잡은 민족주의자들의 세력권에서 영향력을 넓혀갔다. 그러는 도중에 갈등이 일어난 경우도 있었고 한때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경우도 있었다. 북만주에는 신민부와 연계를 맺은 북만노력청년총동맹과 여기에 대항하는 북만조선인청년총동맹이 있었다. 남만주에는 정의부의 청년단체인 남만청년연맹과 사회주의 운동 단체인 남만청년동맹이 한때 좋은 관계였다.


오늘날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있는 동만주에서는 간도참변을 계기로 민족주의운동 계열의 활동이 사실상 중단되었다. 그 공백을 메운 사회주의자들은 동만청년연맹에 결집해 있었다. 비록 1927년 제1차 간도공산당사건 때 많은 사람이 체포되고 만주총국도 무너졌지만, 이후에도 만주 지역 조선인 사회주의운동의 중심은 동만청년연맹 등이 있는 오늘날 연길이었다. 

이처럼 민족주의운동과 사회주의운동 계열이 같은 공간에서 서로 얽히면서도 따로따로 활동하던 도중인 1927년 들어 이들의 관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서로 하나 되어 민족혁명을 진행하기 위한 만주 지역 지도부로 민족유일당을 결성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이들의 움직임은 중국 본토에서 진행되고 있던 국민혁명군의 북벌에 자극받아 일어난 민족유일당 촉성운동에 영향을 받았다. 또 국내에서 전개된 신간회 지회 결성 운동에도 자극을 받았다. 


1928년 5월 하나의 조직을 만들기 위한 회의가 남만주의 반석현 등지에서 있었다. 많은 항일운동가가 참가한 회의에서 뜻하지 않은 논점이 나왔다. 기존의 단체를 그대로 둔 채 민족혁명을 지도할 새로운 정당에 단체로 가입해도 되느냐, 아니면 해체하고 새로운 정당에 개인별로 가입해야 하느냐를 놓고 큰 갈등이 일어난 것이다.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회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 사이에 갈등이 확인된 데다, 두 이념 내부에서도 복잡한 편차가 확인되었다. 삼부의 단체마다 각각 양분되었고, 사회주의자들은 애초의 파벌에 따라 각개 약진하는 양상이 펼쳐졌다. 결국 단체가입을 지지한 민족주의자들은 1929년 남만주 지역 조선인 사회에 기반을 둔 국민부를 결성하였다. 개별 가입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뚜렷한 조직을 만들어 결집하지 못하고 흩어졌다.


상대에게 주저 없이 대결적이다


상처만 남은 통일 논의였다. 결과적이지만 시도하지 않음만 못하였다. 남은 것은 민족의식은 한쪽으로 치운 적대적 대결 감정뿐이었다. 특히 이념 갈등이 크게 작용했다. 1929년 국민부에서 사회주의 청년들을 죽인 남만참변이나 사회주의자가 김좌진을 죽이는 행위처럼 목숨까지 노릴 만큼 갈등이 고조되었다. 


이런 와중에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하였다.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원리를 조직 운영에 적용하고 있던 국민부는 조선혁명군을 즉각 동원하였다. 북만주의 한국독립당도 한국독립군을 편성하고 대응하였다. 눈 뜨고 일어나면 총을 들고 싸우는 일상적 무장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한국독립군은 1933년경까지, 조선혁명군은 1935년경까지 무장투쟁을 벌였다. 한국독립군의 지휘부는 본토로 이동하여 항일운동을 지속하다 한국광복군 결성의 중심축으로 활약했으며, 조선혁명군은 본토에서 결성된 조선혁명당의 군대로도 활약하였다. 


사회주의자들은 남북 만주를 가리지 않고 이들보다 더 오래 싸웠다. 특히 1929년부터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중국인보다 먼저 유격대를 조직하고 싸웠다. 조선인이 유격대를 조직하지 않았다면 만주 지역에서 중국공산당의 대응은 매우 늦었을 것이다. 유격대는 조선인만의 부대인 민족주의운동 계열의 무장대와 달리 중국인과 뒤섞인 대오였다. 유격대는 중국공산당의 좌경 방침에 따라 민족주의운동 계열의 무장대와 함께하지 않았다. 유격대는 1935년 12월부터 자신의 정치 이념과 다른 무장대라도 항일투쟁 의지만 있다면 ‘연합군’을 결성하고자 하였다. 사회주의자들의 유격대는 1940년경 대부분 소련으로 넘어갔지만, 하바로프스크 야영지에서 동북항일연군교도려라는 이름으로 부대를 정비한 이들은 10~15인 이내의 소부대를 편성하여 만주로 내보냈다. 이들의 주된 임무는 정찰 활동과 파괴된 조직의 복원이었다.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자 조선인 유격대원들은 조선공작단위원회를 결성했고, 9월 북한으로 귀국하였다.  


필자 신주백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독립운동사, 학술사, 군사사, 역사교육사를 연구하면서 동아시아의 시야에서 바라보려 노력하고 있다. 『일본군의 한반도침략과 일본의 제국운영』, 『한국역사학의 전환』, 『한국역사학의 기원』, 『역사화해와 동아시아형 미래 만들기』,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 등 저서와 『고교 한국사』(씨마스) 교과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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