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절의 사력

자유당 말기 『지조론』을 써서 절개의 높은 가치를 제시한 사람은 조지훈(趙芝薰)이다. 그는 말한다.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진심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는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천선의 변절이 아니고 바른 데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이라 한다”고 명쾌하게 지적했다.

변절은 쉽다. 시류에 따라 세파에 따라 적당히 처신하면서 일신의 안일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변절은 하나의 삶의 방편이 된다. 해바라기처럼 권력만을 따라다니는 사람들, 신념이나 절개를 헌신짝 버리듯 하면서 외세에 빌붙는 부류에게 변절은 철따라 바꿔 입는 의복보다 더 편리한 행위일지 모른다.

우리 근현대사는 정치사회적인 격변을 거듭해오면서 그때마다 숱한 변절자의 군상들을 지켜보아 왔다. 명분과 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왕조시대와 국난기 한말에도 그랬고 민주주의를 기본가치로 삼는 해방 이후에도 그랬다.

‘오취걸 오취탕(五就桀五就湯)’이라는 고사가 전한다. 옛날 중국에서 이윤(伊尹)이란 사람이 다섯 번 걸주에 나가고, 다섯 번 탕왕에게 나갔던 데서 생긴 말이다. 이윤은 원래 하남성에서 농사일을 하던 사람으로 뜻을 품고 하(夏)나라에 가서 걸왕을 만나 현책을 올렸다. 

그러나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그 후 다시 상(商)나라의 탕왕을 만났는데, 탕왕은 이윤의 슬기로움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탕왕은 얼마 후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내치고 말았다. 

이윤은 전후 다섯 차례나 걸왕을 찾아갔으며, 또한 다섯 번이나 탕왕을 찾아갔다. 이윤은 희대의 폭군과 성군 곁을 번갈아 오간 ‘희대의 변절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후세인 누구도 그를 변절자로 매도하지 않는다. 이윤은 소신과 경륜을 폭군과 성군에 따라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척구폐요(拓狗吠堯)’라는 말이 있다. 잔학무도한 도척의 밥을 얻어먹고 사는 개도 아무리 자기 주인이 악당이라도 주인이 지시하면 요(堯)와 같은 성인군자에게까지 서슴지 않고 짖어댄다는 뜻이다. 

변절자들이 새 장(場)으로 옮기면 주체들보다 더 교활하고 악랄해진다. 그쪽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출신 헌병·순사들이 더 가혹했던 것도 같은 이치에 속한다. 독립운동가에서 변절한 친일파들도 이들 유형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변절이라는 독초(毒草)의 뿌리는 깊고 그 패악은 오래간다. 인간사회에서는 어느 시대나 배신자·변절자가 있었다. 공자의 제자, 석가모니의 사촌, 예수의 제자 유다에서부터 21세기 2020년대의 오늘에도 한국에서 식민지근대화론자를 비롯해 미국 램지어 하버드대학 교수의 망발을 지원하는 등 철저하게 일본 극우의 입장을 대변하는 무리가 있다. 

우리에게 변절자의 사력은 아픈 상처의 실존이다. 을사오적이 하나 같이 대한제국의 판사 출신이고, 경술칠적은 왕족과 최고위급 관료들이었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병탄한 다음 매국노 72명에게 일황 명의의 훈장을 주고 관리 3,559명과 양반·유생 9,881명에게 은사금이란 것을 지급했다. 그것도 일본에서 가져온 돈이 아닌 조선의 돈으로 생색을 냈다. 이를 거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유생 중에는 서로 받겠다고 아우성쳤다. 

그들은 왜 변절의 길을 택했나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는 썼으나 민족대표에 서명은 거부하였다. 문약하여 후환이 두려웠던 것이다. 서대문감옥에서 만기 7개월 전에 출감할 때 이미 일제의 회유가 시작되어 괴뢰만주국 교수,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사편수위원’으로 위촉되면서 친일의 길을 걸었다. 중추원 참의까지 지냈다. 

이광수는 ‘2·8독립선언서’를 쓰고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독립신문> 주필이 되어 최일선에서 일제와 싸웠다. 하지만 2년이 채 안 돼 총독부가 보낸 애인 허영숙을 따라 귀국한다. 도산 안창호의 일기에 그의 귀국 전후 사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광수 허영숙(호텔)을 방문한다. 두 사람이 같이 본국으로 갈 뜻을 말한지라, 내가 가로되 이제 압록강을 건너는 것은 적에게 항복서를 바침이니 절대불가요, 군 등 양인 전정(前程)에 큰 화를 짓는 것이라 속단적으로 행하지 말고 냉정한 태도로 양심의 지배를 받아 행하라.

기미년 3·1혁명 준비 과정에서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인 최린의 역할은 막중했다. 그 역시 만기 전에 출소하고 송진우 등과 이른바 조선의 자치를 목적으로 한다는 연정회(硏政會)를 조직하였다. 본격적으로 훼절한 것은 1926년 ‘재외 민족주의자의 후원과 양해를 얻기 위하여’란 명목으로 외국 여행을 떠나면서부터이다. 총독부의 사주에 따라 해외여행을 떠나고 친일파로 변신, 중추원참의에 이어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이 되었다.

독립운동 진영에서 친일로 변절한 인물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인물 중에는 2·8독립선언을 주도하고 <매일신보> 사장이 된 서춘, 임시정부 <독립신문>에서 일하다 친일광신자가 된 주요한, 33인 민족대표에서 교회의 종까지 헌납한 정춘수, 민족종교 천도교를 이끌다 천황주의자로 변신한 이돈화, 33인 민족대표에서 친일광신자가 된 박희도, <동아일보> 창간사를 쓰고 단골 친일연사가 된 장덕수,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을 지내다 불교계 친일원흉이 된 이종욱, 의정원의원 출신으로 ‘유다의 직계’로 전락한 목사 정인과 등이 꼽힌다. 이밖에 언론·교육·문학·음악·예술·기업인 출신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

민족진영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친일 변절에는 일제권력의 각종 공작, 이광수의 사례처럼 일제의 미인계, 총독부의 회유와 감투, 자의반 타의반의 전향, 개인적 비리로 약점이 잡혀서 등 여러 가지 사유가 기적된다. 

친일변절자들의 주요 활동상

일제가 독립운동가(민족주의자)를 변절·전향시킨 것은 ‘쓸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력으로 조선을 병탄했지만 9년 만에 3·1혁명이 거족적으로 일어나고, 무단 통치로 억눌렀으나 여전히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하여 신망이 있는 조선의 명사들을 친일파로 만들어 홍보 선전케 하는 수법으로 조선통치를 영구화하려는 식민지 수탈정책의 일환이었다.

일제는 만주침략과 태평양전쟁 시기에 인력동원과 물자수탈에 이들을 내세우고자 더욱 광분했다. 남아있던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을 겁박하거나 전향공작을 통해 친일파로 만들었다. 국내외에서 이 시기에 전향자가 더욱 많았던 까닭이다.

변절자들의 위상은 중추원 참의에서부터 각종 어용단체 책임 자리가 주어졌다. 역할도 지원병·징병·정신대 등의 강연회 연사 등 다양했다. 그들은 사상보국연맹,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흥아보국단, 문학보국회,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보국회·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조선임전보국단, 국민총력연맹, 종교교화보국회, 조선언론보국회, 방송선전협의회, 조선부인연구회, 애국금채회, 동민회, 갑자구락부, 대정권목회, 시중회, 황도학회, 대화동맹, 대의당, 조선사편수회, 경성이익찬위원회, 수양동우회, 국민동원총진회, 조선음악회 등 친일어용단체를 조직하거나 참여하며 활동하였다. 

식민지 암울한 시대, 모든 언로가 통제되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 비슷한 역할을 한 월간지 <조광> 등에 실린 변절자 친일파들의 글이나 강연은 큰 영향을 미쳤다. 달리 정보가 없다보니 그들의 말과 글을 믿게 된 것이다. 

그들의 언설은 하나 같이 내선일체, 충용스러운 황국신민, 굶더라도 식량공출, 젊은 청년은 자진입대, 젊은 여성들은 정신대 지원을 강요하는 내용이었다. 한때 독립운동 진영에 섰던 인사들의 시국강연과 일제를 향한 ‘우국충정’의 언설은 식민지 국민들의 민족혼을 빼앗고 사회정의를 말살시키는 데 모자라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한 정신적 후예들의 사대주의 근성, 학계 일각의 친일행위 등 영혼이 없는 행각은 그들이 뿌린 잔재에 속한다. 

그 시대에도 소수이지만 끝까지 민족정신을 지키며 변절의 대열에 가담하지 않은 애국지사들도 있었기에, 변절자들의 죄과는 더욱 용납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