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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 Theme.2 역사의 강을 오염시킨 가짜 애국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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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친일행각 드러나 서훈 박탈당해


독립운동가 탈 쓰고

역사왜곡 주역으로… 


카멜레온들의 민낯


글 | 윤경로(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4,389명 안에는 우리가 그동안 독립운동가로 익히 알고 있었던 이들이 적지 않다. 그중 1962년 이후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다가 친일행적이 드러나 서훈이 박탈된 변절자는 25명에 이른다. 대표적 인물이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장지연이다. 애국계몽운동가 겸 언론인이었던 그는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 이후 친일로 급선회했는데, ‘한인은 단체성이 없다’는 이토 히로부미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 민족을 열등 인종으로 치부하기까지 했다. 광복 이후에도 오랫동안 독립운동가 행세를 하며 호의호식해온 김성수는 역사의 강을 오염시킨 진정한 카멜레온이었다. 친일청산이 정치 질서를 바꾸지 못하도록 이승만과 합작해 역사왜곡에도 앞장섰다. 1962년에 받은 건국훈장 대통령장은 2018년 2월, 서훈 56년 후에야 박탈되었다. 


일제강점기(1905∼1945) 한국인들의 삶의 궤적과 형태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대별된다. 하나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 한 이른바 ‘역사의 길’을 걸은 이들과, 다른 한 부류는 일제에 순응하며 ‘훼절의 길’을 걸은 자들이다. 대체로 전자의 경우 항일과 순국의 길을, 후자의 경우 변절의 길을 걸었다. 


일제강점기가 짧지 않았기에 민족을 반역한 변절자의 규모 또한 적지 않았다. 제정러시아 외교문서(1909년 10월 23일)에 따르면 “간도의 일본총영사관 산하 비밀첩보과에 속한 밀정만도 760명”에 이르렀다고 하며, 간도협조회가 해산되던 시기에 이르면 무려 7,700명의 밀정들이 암약했다는 보고가 있다.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경기도 경찰부장(千葉了)에 따르면 “현하 선내의 일선인(日鮮人)으로 경찰 후원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가 1만 2,000여에 달하며, 그 인원이 무려 139만 4천여 명에 이른다”(.조선독립운동비화.)고 하였다.


이 짧은 글에서 그 많은 변절자들을 일일이 거론할 수 없다. 따라서 1962년 이후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은 자 중 추후 친일행적 등이 드러남으로 서훈이 박탈된 변절자 25명 가운데 대표 인물 두 명을 소개하고자 한다. 


익히 아는 대로 2009년 11월에 민간 시민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를 중심으로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었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4,389명 안에는 일찍이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은 인물들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충격을 주었다. 이들 가운데 전 국민적 관심과 충격으로 다가온 대표적 인물이 다름 아닌 장지연(張志淵)이다.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의 친일행각


  장지연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의 체결을 반대하는 논설문,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황성신문>에 게재했다. 이로써 당대 대표적 애국지사로 각인되었고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2년 독립장 서훈을 받았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 강제 병합된 이후 그의 행각이 친일로 급선회했다는 사실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으로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면서 2011년 서훈이 취소되었다. 그의 친일 행각의 곡필(曲筆)은 일일이 논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하다.


장지연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초빙된 뒤 1914년 12월부터 실명으로 ‘고재만필(古齋漫筆)-여시관(如是觀)’을 연재하기 시작하여 1918년 12월까지 4년여 동안 한시를 포함해 700여 편의 글을 실었다. 이 중에는 조선총독부의 시정(施政)을 미화하고 옹호하는 내용이 다수였다.


1915년 1월 1일자 ‘조선 풍속의 변천’에서 조선총독부의 신정(新政)이 조선의 전통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풍속을 개선하는 존재라며 찬양했다. 같은 해 12월 26일자 ‘송재만필(松齋漫筆)-단체성이 흠결호(欠缺乎)’에서는 조선이 식민지가 된 것은 단체성이 없는 조선인의 민족성 때문이라며 한탄했다. ‘한인은 단체성이 없다’는 이토 히로부미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 민족을 열등 인종으로 치부했다. 


 “오호라 동종동족(同種同族)이 서로 원한을 맺어 서로 원수가 되어 망국의 지경이 되어서도 후회하지 않으니, 어찌 너무나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이 아니랴. 이로 인해 전 조선인의 습관이 되어 마침내는 단체성이 없는 인종이 되고 말았으니, 어찌 개탄할 만한 일이 아니며,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랴. 아아! 슬프도다.”

1916년 12월 10일자에는 2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환영하는 한시 ‘현대시단-환영 장곡천 총독’이 실렸다. “한겨울 매화도 예전처럼 기뻐 웃는 듯”이라며 돌아온 총독을 감격스럽게 맞았다. 1918년 1월 1일자에는 ‘대정 6년(大正六年) 시사(詩史)’라는 제목으로 매달 2편씩 총 24편의 한시를 실었다. 이 한시들은 1917년의 주요 사건을 소재로 쓴 것인데, 일본 천황의 ‘은혜’와 일제가 주도한 경제발전을 부각시키는가 하면, 식민지 농정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건국훈장 서훈 56년 만에 박탈당한 김성수


  그나마 장지연은 1921년 세상을 떠났지만, 광복 이후에도 오랫동안 독립운동가 행세를 해온 김성수는 그야말로 근현대사의 카멜레온 같은 존재였다. 그는 용서받지 못할 친일 행각에도 불구하고 1948년 ‘반민족행위자처벌법’으로 단죄되지 않았다. 한국민주당 지도자가 된 그는 민중의 열기에 힘입은 친일청산이 정치 질서를 바꾸지 못하도록 하고자 이승만과 제휴했다. 독립운동가 출신이기는 하지만 친일청산과 민족통합에 열의가 없었던 이승만과 합작해 기득권층의 이해관계를 지켜내기 위함이었다. 김성수가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와 각종 학교를 세운 언론·교육 분야 공로로 1962년에 받은 건국훈장 대통령장은 2018년 2월, 서훈 56년 후에야 박탈되었다. 

김성수는 28세 때인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지만, 일제의 전쟁범죄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변절자였다. 김성수의 친일 행위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이른바 ‘시국강연’의 연사로 참여하여 일제의 전시동원정책에 적극 협력하였다. 1937년 9월 경성시(京城市)의 라디오 강연에 나서서 일제의 전시 동원에 협조하였으며, 강원도 춘천까지 순회강연을 다녔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일본군국주의를 위해 돈까지 쾌척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1937년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성수는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및 이사로 참여했으며, 후신으로 1940년 10월 조직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로 활동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은 조선인을 ‘총체적으로’ 전시체제에 동원하고 억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특히 1943년부터 징병제와 학병제의 실시에 맞춰 더욱 노골적인 친일 행각을 보였다. 김성수는 보성전문학교 교장의 자격으로 1943년 8월 5일 징병제를 찬양하는 장문의 논설을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기고해 징병제와 학병제를 찬양했다. “문약(文弱)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尙武)의 정신을 찬양하라”는 논설에서 징병제는 조선반도 청년의 영예이며, 조선인의 단점인 문약과 단결하지 못함을 치료할 양약이니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으며, 힘써 노력하여 위대한 황국신민이 돼야 할 것이라는 광기어린 선동을 자행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변절자 논란


서훈이 취소된 25명을 .친일인명사전. 선정 분야별로 보면 종교계가 13명으로 가장 많다. 개신교 7명(김우현·김응순·남천우·박연서·유재기·윤치영·최지화), 불교 4명(박영희·이종욱·차상명·허영호), 천도교 2명(정광조·최준모)이다. 나머지는 친일단체 3명(윤익선·이동락·이항발), 교육학술 3명(강영석·김성수·장응진), 언론 2명(서춘·장지연), 전쟁협력(지역유력자) 2명(김홍량·박성행), 관료 1명(김희선), 해외(일본) 1명(임용길)이다.


현재 25명의 ‘항일·독립운동 공적’은 국가보훈처가 제공하고 있는 공훈전자사료관 홈페이지에서 모두 삭제된 상태이다. 한때 ‘항일·독립운동 공적’으로 독립유공자였던 인물이 친일 행적으로 서훈이 취소됐다고 하더라도, 관련 기록은 온전히 보전함으로써 연구·교육 재료로 활용해야 함에도 국가기관이 이를 삭제한 것은 제대로 된 조처인지는 따져볼 일이다.


   차제에 국립묘지 안장과 관련해 한마디 부연하고자 한다. 독립유공자로 서훈되면 국립묘지(서울과 대전 현충원)에 안장될 ‘권리’가 있다. 반면 서훈이 취소되면 국립묘지에 묻힌 당사자들의 묘지는 이장하는 것이 국민 정서에 부합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두 차례 서훈이 취소되면서 후손들은 국가보훈처에 행정 소송을 제기해 논란이 있었다. 25명이 모두 국립묘지에 안장됐던 것은 아니지만, 2019년 말까지 국립묘지에서 이장된 것은 강영석·김응순·김홍량·박성행·박영희·유재기·윤익선·이동락·이종욱·임용길 10명으로 알려져 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조사한 바로는 아직도 70여 명의 친일파가 국립묘지에 ‘안장’된 것으로 되어 있다.


시민사회단체 등은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함께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은 민족정기를 훼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항일·독립 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 나아가 대한민국 국민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므로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입장을 천명한 바 있다. 이렇듯 독립운동가와 친일파가 국립묘지에 함께 ‘안장’된 것은 현행법인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약칭 국립묘지법)이 이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친일파라고 하더라도 유족 스스로 이장하지 않는 이상 강제로 이장할 수 없다. 따라서 현행 국립묘지법을 개정해 친일파의 국립묘지 안장을 금지하고, 무엇보다 이미 안장된 친일파의 묘지도 이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마땅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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