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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 Theme.3 독립운동가의 두 민낯, 변절자 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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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100명보다 밀정 하나가 더 무섭다 


독립운동 심장부 침투, 

극비문서 팔아넘기고 동지들 회유해 내분조장


글 |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수)


밀정은 다양하였다. 직업이 밀정인 경우도 있었고 변절한 독립운동가 밀정도 있었다. 일제는 안중근 의거 이후 밀정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3·1운동 전후로 많은 밀정을 양산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한 .한민족독립운동사.에 따르면, 밀정 수를 대략 4만 명 정도로 추산하였다. 특히 직업 밀정들보다 독립운동가의 탈을 쓴 밀정들은 고급 정보를 일제에 넘겨줬다. 독립운동가의 탈을 쓴 밀정 보고서는 더욱더 치명적이었다. 이에 독립운동단체가 와해되기도 하고, 의열 활동 계획이 사전에 유출되어 실패하기 일쑤였으며,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거나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밝혀진 독립운동가 밀정이 있는가 하면 끝까지 살아남아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로 둔갑하여 국립묘지에 묻힌 이들도 있다. 


‘밀정’을 한자로 보면 ‘密偵’이라 하는데 남몰래 사정을 살피는 염탐꾼을 말한다. 이는 역사가 시작된 이래 동서양을 막론하고 존재했기에 간자(間者)·세인(細人)·세작(細作)·스파이(spy) 등으로 불렸고, 우리나라가 반공이 국시였던 시기에 많이 회자하였던 간첩도 같은 의미이다. 다른 측에서는 이들을 공작원(工作員)·에이전트(agent)라고 하며 이들의 행위를 ‘첩보활동’이라 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밀정’이라면 으레 2016년 9월 개봉한 영화를 떠올린다. 하지만 2015년 7월에 개봉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던 <암살>도 밀정 관련 영화이다. 둘의 공통점은 독립운동가와 함께했던 또 다른 얼굴의 독립운동가, 밀정일 것이다. 조선인 출신 일제 경찰 이정출 역의 송강호와 염석진 역의 이정재가 그렇다. 이를 통해 ‘밀정’의 존재가 세간에 알려졌고 관심을 끌었다. 


변절자가 쓴 밀정 보고서가 더욱더 치명적


밀정은 다양하였다. 직업이 밀정인 경우도 있었고 변절한 독립운동가 밀정도 있었다. 일제는 안중근 의거 이후 밀정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3·1운동 전후로 많은 밀정을 양산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한 .한민족독립운동사.에 따르면, 밀정 수를 대략 4만 명 정도로 추산하였다. 조선총독부·조선군사령부·일본영사관이 이를 주도했고 밀정비·첩보비·기밀미 등의 예산을 별도로 마련하였다. 밀정 보고는 독립운동단체의 회의 내용, 활동 사항, 조직구성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의 생김새와 신상 등도 포함되었다. 특히 직업 밀정들보다 독립운동가의 탈을 쓴 밀정들은 고급 정보를 일제에 넘겨줬다. 밀정들은 일제로부터 돈을 받기도 하고 출세(?)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의 보고문서가 독립운동사를 밝히는 1차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독립운동가의 탈을 쓴 밀정 보고서는 더욱더 치명적이었다. 이에 많은 독립운동가가 체포, 피살되었고 의열 활동이나 독립군의 작전에 실패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 때문에 의열단은 처단해야 할 칠가살(七可殺, 마땅히 죽여야 할 일곱 가지 대상) 중에 적탐(敵探, 밀정)을 포함하였고, 만주의 독립군 단체의 활동 가운데 하나도 밀정 처단이었다.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구는 요원들과 함께 독립운동가를 보호하고 밀정을 색출하여 처단하였다. 베이징에서는 다물단이 결성되어 친일파와 밀정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독립운동가 옆에는 항상 밀정이 있었다


  임시정부 경무국 소속의 경호원이자 의열조직 한국노병회의 단원이었던 한태규가 밀정이었다. <암살> 영화의 밀정 염석진을 닮은꼴이다. 그러한 사실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서 발생한 한국인 명주라는 여성의 피살 사건을 계기로 발각됐다. 살해 수법이 경호원들의 방식과 똑같았기 때문에 주변을 수소문한 결과 한태규를 찾아낸 것이다. 자신이 밀정이란 사실을 알게 된 명주를 살해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김구는 .백범일지.에 “그런 악한을 절대 신임했던 나야말로 세상에 머리를 들기 어렵다는 자괴감이 들었다”고 적었다.


의성단(義成團) 단원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가 밀정이 된 승학산(본명 승정윤)은 단장 편강렬 체포를 돕고는 1만 원을 받았다. 편강렬은 1924년 8월 체포되어 징역 7년 형에 처해 신의주에서 복역하던 중 1929년 1월 발병하여 병보석으로 가출옥하였으나 이내 숨지고 말았다. 정의부의 의용군 사령장 오동진은 밀정이 된 부하 김종원(金宗源)을 믿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사하였고 김종원은 자취를 감췄다. 1925년 3월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단체 참의부 간부들이 고마령(古馬嶺)에서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던 중 압록강을 넘어온 일제 군경의 습격을 받아 대원 29명이 전사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 또한 밀정의 밀고 때문이었다. 


김구는 모두 세 차례에 걸쳐 가까이에 있던 밀정에 의해 암살될 뻔했다. 일명 ‘대김구특종공작(對金九特種工作)’이다. 1차 때는 변절한 밀정 오대근이 난징에서 활동하던 김구를 암살하려다 사전에 탄로나 실패했고(1935.1), 2차 때는 밀정 위혜림(본명 위수덕)이 그와 갈등하던 무정부주의 세력을 이간질해 암살하고자 했지만, 정화암이 걸려들지 않아 실패했다(1935.10). 하지만 3차 때에는 1938년 5월 김구가 창사(長沙) 남목청(楠木廳)에서 독립운동 세력의 합당을 위해 개최한 모임에 참석했다가 밀정 조선혁명당원 이운한의 총에 가슴을 맞았다. 김구는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손을 떠는 수전증이 생겼다.


베이징에 거주하던 이회영 주변에는 밀정이 늘 잠복하였다. 1920~1921년경 이회영은 국내에서 같이 활동했던 유지들로부터 생활비와 활동 자금을 받곤 했는데, 임경호(林敬浩)라는 사람이 이를 전달했다. 독립운동을 같이하던 동지 임경호는 어느새 변절자 밀정이 되어 일제에 극비문서를 팔아넘겼으며 주변 동지들을 회유하였다. 

한편, 1925년 3월 베이징의 독립운동가들과 허물없이 지내며 한인사회에서 명성이 높았고 의열단에도 간여하였던 김달하가 처단되었다. 그는 독립운동의 심장부에 깊숙이 침투하여 독립운동 정보를 팔아먹거나 독립운동가를 회유하고 독립운동 진영의 내분을 조장하였다. 또한 독립운동가 밀정에 의해 1926년 12월 나석주가 극비리에 추진한 식산은행과 동척 폭파 계획이 조선총독부 경찰국에 탐지되었고, 의거 후에는 관련자 김창숙 등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었다. 


끝까지 살아남아 해방 후 독립운동가로 둔갑


그런데 밝혀진 독립운동가 밀정이 있는가 하면 끝까지 살아남아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로 둔갑하여 국립묘지에 묻힌 이들도 있다. 2019년 8월 3·1운동·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KBS의 탐사프로그램 시사기획 창에서 ‘밀정’이란 주제로 방송을 내보냈다. 밀정 탐구는 학계와 언론계 통틀어 그것이 사실상 처음이었으며, 전문가들로부터 독립운동의 ‘이면사’를 실증적으로 밝혀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방송 내용은 시청자들에게 큰 충격은 던져줬다. 익히 아는 독립운동가들이 밀정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특히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를 함께한 우덕순, 김좌진의 최측근으로 청산리전투에서 활약하였고 .진중일지.를 작성한 이정,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기 위해 중국 베이징에서 박용만 등과 함께 흥화실업은행을 설립한 김규흥(김복) 등이다. 우덕순과 이정은 독립장(1962, 1963), 김규흥은 애국장(1998)이 추서된 독립운동가들로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거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우덕순은 1920년대 하얼빈 조선인민회장과 치치하얼 조선인민회 간부를 맡았는데 일본 외무성 대신에게 직접 편지도 보내는 등 밀정 행동을 했다고 한다. 이정은 1924년 독립군 간부들의 용모와 특징, 김좌진과 독립군의 의거 계획, 군자금 모집 상황 등을 상세히 밀고한 점이 드러났다. 김규흥은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 야타로(宇都宮太郞)를 만났고 돈을 받았으며 독립운동가 회유 자금을 김달하와 자신에게 보내달라는 편지를 그에게 보냈다는 것이다. 방송 직후 우덕순은 1930년대 기록에 “농후한 배일사상을 갖고 있다”라는 일제 문서가 있고, 해방 후에는 독립운동가로부터 친일파로 지적받은 사례가 없다며 방송이 무리수를 두었다고 비판하였다. 김규흥기념사업회 측은 방송 내용을 일일이 반박하며 사과를 요구하였다.


그들뿐만 아니라 박용만도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1928년 10월 무장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던 박용만이 베이징의 자택에서 숨졌는데, 밀정 김달하가 처단된 뒤 3년 반만의 일이었다. 사건 현장에서 붙잡힌 의열단원 이해명(본명 이구연)과 그를 지지하는 독립운동계는 그가 1924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일제의 도움을 받았고, 일본 외무성 촉탁 조선총독부 통역관 기토 가쓰미(木藤克己)와 함께 두 차례 비밀리에 입국하여 조선 총독으로부터 기밀비를 받은 변절자였기 때문에 그를 처단했다고 한다. 


이해명은 베이징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지만, 무죄를 촉구하는 한인 독립운동단체의 탄원서로 1년 4개월 만에 풀려났다. 하지만 박용만의 변절 논쟁은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1980년 이해명에게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그보다 늦은 1995년 박용만은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독립운동유공자로 포상받는 기이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밀정은 우리 안의 적이라며 ‘일본군 100명보다 밀정 하나가 더 무섭다’라고도 한다. 실제 이들에 의해 독립운동단체가 와해되기도 하고, 의열 활동 계획이 사전에 유출되어 실패하기 일쑤였으며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거나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그런데도 ‘밀정’과 관련한 연구는 불모지나 다름없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 행적을 담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한 친일 인사 4,389명 가운데 밀정으로 분류된 인사는 22명뿐이다. 더욱이 건국훈장이 추서된 독립운동가로서 밀정 활동을 한 인물들에 대해서는 논란만 무성하고 이렇다 할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독립운동가는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아야 하고 ‘정의를 실천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어야 한다. 정부 당국의 독립운동가의 두 민낯, 변절자 밀정에 대한 분명하고도 확고한 판단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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