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 역사를 통해 오늘을 본다
페이지 정보
본문
Special Theme.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 우리의 역사 바로 세우기 (1)
역사는 미래 밝혀주는 빛
순국과 호국정신을 하나로 엮어나가자
글 | 김중위 (월간 순국 편집고문, 초대 환경부장관)
“우리는 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라고 말을 하는가? 역사는 미래를 밝혀 주는 해도(海圖)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망망대해에서 항로가 분명치 않을 때 역사를 통해 항로를 찾아보자는 뜻이다. 그러기에 역사는 미래를 밝혀 주는 빛이요 길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과거의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면 어느 나라의 경우에나 망하게 되어 있다. 나라가 망하려면 남의 나라가 쳐들어오기 전에 나라 안에서 먼저 스스로 나라를 해치기 마련이다. 대표적이 사례가 조선조 아니었던가? 맹자(孟子)가 그렇게도 뼈저리게 외쳤건만 배운 것은 간 데 없이 어이없게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 할 이유다. 모든 역사는 후대를 위해 켜놓은 미래의 등불 나라 잃은 백성의 서러움을 알지 못하고는 나라의 중요성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뼈저린 역사를 경험한 민족이다. 그러나 그 역사를 누군가가 기록해 놓지 않고는 아무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백암 박은식 같은 분은 이역만리 중국에서 책상도 참고서적도 없이 밥을 굶으면서도 <독립운동지 혈사(獨立運動之血史)>를 저술했고 단제 신채호 같은 분은 차가운 감옥 안에서도 <조선사>를 저술했고 <조선 상고사>까지를 저술했다. 그리고 우남 이승만 역시 감옥안에서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보면 임진왜란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남겼고 뒤이어 당시의 정승이었던 서애 유성룡은 유명한 <징비록(懲毖錄)>을 남겼다.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懲戒)하여 뒷날에 환난이 없도록 조심(毖)“하기 위해 기록한 책이라는 얘기다. 그렇게 보면 모든 역사는 징비록이기도 할 것이요 후대를 위해 켜놓은 미래의 등불이라고도 할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생각에서다. 이에 대해 연세대학교의 송 복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징비록을 읽고 울분을 토하며 눈물을 삼키지 않은 사람은 조선사람(한국인)이 아니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들은 읽으려 안했고, 읽어도 몰랐고, 알았어도 감동이 없었다. 오직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고 했다…(중략) 내 나라 개념이 없고 내 나라 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그러고도 망하지 않는다면 역사의 기적”이라고. 그러나 역사의 기적은 일어났다. 벼슬아치들이 망친 나라를 흰옷 입은 무명의 백성들이 새롭게 나라를 일으켰다. 우리 민족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재산을 바치고 백성 스스로가 정부를 만들어 기어코 나라를 되찾아 온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닌 민족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슨 행사 때마다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를 제창하고 난 후에는 반드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에 대한 묵념을 한다. 이런 의식(儀式)은 왜 하는가? 그것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다. 선조들의 거룩한 죽음과 우국충정의 정신을 이어 받기를 맹세하고 또 그 각오로 나라발전에 이바지하자는 굳은 결의를 다지기 위해 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한 의로운 죽음, 순국선열과 호국영령 그러나 누구나 다 수만 번의 묵념 경험을 했겠지만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의사와 열사, 호국영령 등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 것을 본다. 먼저, 순국선열이란 누구를 지칭하는 가부터 말해야 할 것 같다. 순국선열이란 “1895년 명성황후 살해사건 때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전까지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고자 독립투쟁을 하다가 전사(戰死) 형사(刑死) 절사(節死) 옥사(獄死) 피살(被殺) 옥병사(獄病死)등 6개항에 의거 희생된 분(1960년 보사부령)을 일컫는다.” 여기서 명성황후 살해사건을 왜 순국선열 기념의 기점으로 보느냐 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는 간단하다. 죽은 국모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을미의병을 일으켜 왜적(倭敵)과 싸운 사례가 이때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독립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얘기다. 전국 곳곳에서 수천 명 또는 수백 명의 의병들이 일어나 친일관료들을 처단하고 일본군과 격전을 벌렸던 것이다. 당연히 이 때에 숱한 희생자가 생겼음은 자명하다 할 것이다. 이 기록 또한 우리 역사에서 간단히 보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우리의 역사가 숱한 외적의 침략을 받은 역사이면서도 지금까지 꿋꿋하게 우리 민족이 살아남은 것은 의병의 역사였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도 우리는 패퇴하는 관군의 뒤에는 언제나 의병이 있어 나라를 온전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전통이 살아있어 을미의병(1895년)에 이어 을사의병(1905년)과 정미의병(1907년)을 거쳐, 1945년 해방될 때까지 독립군으로의 발돋움을 통해 대일 항쟁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는 가히 의병의 나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의병에 참가한 숫자는 50만이요 전사자는 15만이나 된다(박성수). 그 외에도 민영환·최익현·황현처럼 국권이 침탈되는 것을 보고 순절(殉節)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안중근 강우규 윤봉길 이봉창 같이 의사(義士)로 순국한 분이 있고 유관순처럼 옥사(獄死)한 분도 부지기수다. 이처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 모두 순국선열이다.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른 사람은 5,323명(조선일보, 2019. 1. 18)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애국지사들이다. 우리 후대들에게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르치자 그러나 어떤 정신을 선양해야 하느냐의 문제는 크게 따질 일은 아니라고 본다. 예우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떤 경우나 숭고한 애국충정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통일된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서는 순국과 호국 정신을 하나로 엮어 이어가도록 하는 데에 힘을 기우려야 할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이 되지 않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