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 Theme.1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종교의 역할과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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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멸망 앞에 선 종교인의 책임
망국의 치욕 앞에서
종교적 태생 막론하고 다함께 불의에 항거
글 | 신복룡(전 건국대학교 석좌교수)
세계사적으로 민족의 멸망 앞에 가장 먼저 봉기한 무리는 신앙인이었다. 그들은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불의에 항거하는 것이 곧 빛과 소금의 역할이요, 창의(倡義)요, 보살행(菩薩行)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종교인 역시 망국의 치욕 앞에서 고군분투했다. 임진왜란에서 승병(僧兵)의 활약, 동학농민혁명에서의 민족적 저항, 3·1운동에서 기독교의 역할 등이 대표적이다. 일제강점기 한국의 종교는 국내 특파원, 독립자금 전달, 독립운동 소식의 국내 전달, 독립운동 사료의 전달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자생(천도교), 신입(기독교), 전통(불교) 등 태생을 막론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독립운동을 주도했으며, 직접 총칼을 들고 무장 항쟁에 나서기도 했다.
망국 시대의 종교 망국의 책임을 어느 누구에게 몰아서 묻는 일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망국은 민족과 국가의 총체적 부실이 원인이며, 필부필부(匹夫匹婦)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지, 친일파 몇 사람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나는 당신처럼 살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늦게 태어난 무리의 축복”이자 망국의 책임을 희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비극 앞에서는 지배 계급이 일차적으로 책임질 일이지만, 우리 모두가 죄인이며, 함께 고백하고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이 글의 대주제인 ‘독립운동과 종교인의 역할’이라는 구체적인 논의에 들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의 망국의 사례에 견주어 보면, 우리나라 종교인처럼 망국의 치욕 앞에 침묵한 민족은 드물기 때문이다. 이런 지적에 대하여 민족주의 종교인들은 분노하여 그 반증의 사례를 나열할 것이다. 멀리는 임진왜란에서 승병(僧兵)의 활약, 동학농민혁명에서의 민족적 저항, 3·1운동에서 기독교의 역할, 그 모두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권장한 교단, 3·1운동의 참가를 만류한 교단, 교단을 지키기 위해 일제의 훈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교단의 변명, 3·1운동에 참가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친일로 변절한 무리가 모두 종교 지도자였던 사실에 대한 회개(悔改)를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일제강점기에 27년 동안 연못골교회(蓮洞敎會) 등에서 목회하며 한국의 문명개화에 기여한 캐나다 목사 게일(Rev. James Gale)의 묘사가 가슴을 찌른다. “의인 열 명만 있었어도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구약성경』 「창세기」 19장) 한국의 종교인은 조국의 멸망과 독립에 대하여 더 겸손하고 참회해야 한다. 일제강점기에 식민지 지배에 항쟁한 교당과 침묵하거나 묵종한 교당을 견주어 보면 어느 쪽이 더 많을까? 배가 침몰할 때 쥐가 가장 먼저 탈출하듯이, 나라가 멸망할 때 가장 먼저 배에서 뛰어내리는 무리는 당대의 식자들이며, 그 가운데는 가장 믿음이 굳은 체하는 무리가 많다. 무지한 민중, 믿음도 모르는 중생에게는 조국을 버릴 교지(狡智)도 없고 힘도 없다. 이런 점에서 망국이나 해방과 관련하여 한국의 종교인은 자랑할 것이 그리 많지 않다. 민족이 둥지라면, 교당(敎堂)은 알이다 중국의 삼국시대에 조조(曹操)의 수하에 공융(孔融)이라는 어진 선비가 있었다. 그는 충직했으며, 공의로웠다. 그런 그가 조조의 미움을 받았다. 조조가 대로하여 정위(廷尉: 형벌을 맡아보던 벼슬)에게 공융을 잡아들여 죽이라고 지시했다. 공융의 가신들이 그 소식을 듣자 이를 어린 두 아들에게 전갈했다. 공융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나이가 어렸다. 그때 아들들은 바둑을 두고 있었다. 하인들이 들어와 아버지가 처형을 당하게 되었으니 어서 피신하라고 아뢰었다. “정위들이 아버님을 잡아가 목을 친다 합니다. 공자께서는 어찌 서둘러 달아나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두 아들이 말했다. “둥지가 무너지는데 알이 어찌 안전하겠는가?”(覆巢之下 安有完卵乎)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정위가 들이닥쳐 공융 집안의 가솔과 두 아들을 잡아다가 목을 베고 공융의 시체를 저자에 내걸도록 했다. (『삼국지』 제40회) 청말 민국 초 중국의 지식인이었던 양계초(梁啓超)는 조선의 멸망을 바라보면서, 이 시를 인용하여 이런 시를 남겼다. 둥지가 무너지는데 어찌 알이 성하랴! 아, 가련한 벌레들이여 (覆巢安得卵 嗟爾可憐蟲) (량치차오(지음), 최형욱(옮김), 「가을바람이 등나무를 꺾다」(1910), p.236.) 물론 이 시에는 스스로 조선의 종주국임을 자처하던 중국인으로서의 오만한 우월감이 배어 있고 우리로서는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의 멸망에 대한 준열한 꾸짖음이 담겨 있다. 종교와 민족은 함께 간다 사도 바울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9:3)에서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을 했다. 사랑하고 희생하고 베푸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라면, 민족과 국가를 위해 사랑하고 희생하고 베푸는 것보다 더 고귀한 것이 없을 것이다. 애국심이란 그리 거창하고, 크게 결심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개인 구원이 집단화된 것이 애국심이며, 작은 것을 사랑하다 보니 큰 것을 사랑하게 된 것이 독립운동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위대한 사람이 큰 꿈을 안고 일신을 버려 애국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애국에서 시작하여 민족과 국가를 위해 “피땀을 흘리며 기도할 때”(『신약성경』 「루카복음」 22:44) 그가 애국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즉 애국을 위해 당초부터 큰 결심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작은 사랑이 모여 큰 사랑이 되는 것이다.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스님이나, 전덕기(全德基) 목사나 손양원(孫良源) 목사나, 최시형(崔時亨) 선사가 위대하신 것은, 그 삶 자체가 위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사신 분들이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니 역사가 귀하에게 들려주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먼저 조국을 사랑하라. 그러면 그대도 위대하게 되리라.”